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00화 (200/272)

200화. 딜레마(4)

강성원과의 술자리는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무거운 이야기가 오갔던 초장엔 술 마시는 속도가 비교적 느렸지만, 가벼운 화제로 돌아섰을 땐 아무 핑계나 대고 무조건 건배를 남발하던 두 사람이었다.

덕분에 자정을 약 30분 정도 앞두었을 때는 누가 더 취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두 사람 모두 다 흠뻑 취해있었다.

바로 그 무렵 이돈두가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지태와의 약속을 깨뜨린 핑계치고는 참으로 어설프기가 그지없었다.

구역 내 업장들을 점검하러 나왔다가 겸사겸사 들렀다는 거였다.

보스씩이나 되는 사람이 하급 관리자에게 맡겨도 되는 일을 손수 발 벗고 나섰다고?

그 핑계가 스스로도 어설펐다고 느꼈는지 이돈두는 곧 실토했다.

두 사람이 보고 싶기도 하고 또 술 생각도 나서 왔다는 거다.

덕분에 술자리가 두 시간 남짓 더 길어졌다.

지태는 너무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강성원을 먼저 보냈다.

택시를 불러 태워 보내려 했는데 이돈두가 그를 말렸다.

가다가 택시 안에서 잠들면 곤란하니까 부하를 시켜 강성원의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거였다.

지태는 이돈두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그의 뜻에 따랐다.

강성원을 차에 태워 보낸 후 이돈두가 지태를 은근하게 쳐다보았다.

“나랑 한잔 더 할래?”

“야, 지금도 겨우 버티고 있는 거다. 많이 취했어. 다음에 해.”

지태가 고개를 내젓자 이돈두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 * *

깜빡 졸았나 보다.

지태는 대리운전기사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예? 뭐라고 했습니까?”

“말씀하신 동네 근처에 다 왔다고요, 사장님.”

“아, 그래요?”

지태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승용차는 집 근처 놀이터를 이제 막 스쳐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대쯤이면 빌라 주차장은 이미 꽉 차 있을 거다.

빌라 입주 세대가 반지하층까지 총 열 집인데 차량을 소유한 세대가 일곱 집이었다.

그런데 주차장이 워낙 협소하여 다닥다닥 붙여 주차를 한다 해도 맥시멈 다섯 대였다.

다행히 놀이터를 지나자 차 한 대를 주차할 만한 공간이 보였다.

“기사님, 저기 세웁시다.”

지태가 1톤 트럭 뒤편을 검지로 가리켰다.

대리운전기사가 주차를 하는 동안 차 밖으로 나온 지태가 주변을 훑었다.

유월 한낮의 열기가 식은 지금은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후우!”

지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다음 취기를 날리려는 듯 한숨처럼 다시 날숨을 내뱉었다.

“자, 여기!”

기사가 지태에게 스마트키를 내밀었다.

지태는 대리 요금 1만 원에 팁으로 1만 원을 더 얹어 기사에게 주었다.

기사는 횡재를 했다는 표정으로 꾸벅 절을 하고는 돌아갔다.

멀어지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태는 느리게 기지개를 켰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깜빡 졸은 것에 불과하지만, 꽤나 많이 숙면을 취한 것처럼 몸이 가뿐했다.

아버지를 위해 신장까지 떼어낸 몸이지만 최봉준이 빙의한 이후 신체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취기가 빠르게 가시고 피로의 회복이 남다른 이유도 그 불가사의하고도 신비로움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지태는 빌라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였다.

뷔이익, 뷔이익.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성원인가?’

하지만 많이 취해서 돌아간 강성원이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지태는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역시나 강성원은 아니었다.

발신자는 국정원 3차장 산하의 부국장 김성욱이었다.

지태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아, 이 양반 뭐야!’

그러다가 곧 쓴맛을 다셨다.

김성욱은 특별 세무조사 건을 무마시켜준 건 신뢰의 증표 차원이라 했지만, 어쨌거나 지태의 입장에서는 신세를 진 거였다.

적어도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 정도는 전하는 것이 도리일 거였다.

“예, 한지탭니다.”

- 어, 한 회장! 이제야 집에 들어가는 길인가?

김성욱이 대뜸 내뱉은 소리에 지태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혹시 근처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가 싶어서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뭡니까? 나를 감시하고 있는 거요?”

지태가 얼굴의 온 근육들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 감시라기보다는 경호차원이라고나 할까. 자넨 이제 우리한테 아주 소중하고도 귀한 존재니까 말이야.

“아, 씨! 정말 이렇게 나올 거요?”

- 우리에게 협조, 아니지 동업이라고 해야 옳은가? 암튼 우린 한배를 탄 사이잖아.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게.

“허!”

지태는 애써 올려놓았던 기분이 급 다운됐다는 듯 어두운 허공에 대고 헛웃음을 흩날렸다.

그래도 김성욱에게 크나큰 도움을 받은 것만은 사실이다.

“여하튼 감사드립니다.”

- 말했잖은가. 그게 자네와 우리 쪽의 관계 개선을 위한 신뢰의 증표라고. 너무 부담 갖지는 말게. 우리도 그만큼의 보상을 되돌려 받을 생각이니까.

쩝.

지태가 떫게 입맛을 다셨다.

그렇지.

기브 앤드 테이크.

왜 그 소리가 안 나오나 했다.

- 오늘은 너무 늦은 것 같고, 내일쯤 얼굴 한번 볼까? 그래야 하지 않겠어?

김성욱이 호탕하게 웃음을 뱉어낸 후 은근하게 물어 왔다.

하는 수 없다.

지태에겐 지금 그의 청을 거부할 힘이 없으니까.

지태는 승낙했다.

하지만 기선 싸움에서만큼은 우위를 선점하겠다는 듯 살짝 튕기며 배짱을 부렸다.

“내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물론 가기 전에 내 빈 스케줄에 맞춰 전화를 드리죠.”

- 아냐, 그럴 거 없어. 여기 자주 들락거리면 서로가 안 좋아. 내가 자네 회사 근처로 가지. 오후쯤에!

지태의 의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럽시다, 그럼.”

쩝.

전화를 끊고 나자 지태는 입안이 씁쓰름했다.

그러자 절로 쓴맛이 다셔졌다.

* * *

다음 날 오전 지태는 이돈두에게 전화를 넣었다.

오후에 김성욱의 연락이 오기 전 그보다 먼저 처리할 일이 있었다.

“어, 돈두! 미안한데 내가 부탁 하나 하자.”

- 뭐 얼마나 대단한 거기에 부탁씩이나! 그냥 편하게 말해봐. 뭔데?

이돈두는 친구 사이에 부탁이니 뭐니 따지는 게 달갑지 않은 듯 픽 웃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대단한 건 아니고, 스마트폰 하나를 개통했으면 해서.”

- 뭐어, 스마트폰 개통? 그게 무슨 뜬금없이 소리…… 아하!

이돈두는 되물으려다가 무슨 뜻인지 이해한 모양이다.

마치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탄성을 내뱉었다.

- 대포 말이지? 대포폰은 갑자기 왜?

“쓸 데가 있어서 그래. 하하, 보이스피싱 사기나 한번 쳐볼까 하고.”

- 아놔! 언제까지 필요한데?

“당장!”

대포폰 하나 구하는 게 뭐 대수겠는가.

이돈두는 지금 바로 수배해서 점심시간 전까지 회사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지태는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묻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스마트폰을 감청하는 것 같으니 대포폰으로 김영철과 먼저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지금 국정원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그랬다간 김영철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연락 자체를 끊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그에게 제안할 게 있었다.

통화할 때 은연중 말조심을 하자는 것 말이다.

그래야 감청을 당하더라도 약점을 덜 잡힐 테니까.

그리고 국정원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할 작정이었다.

김영철에게 얼어붙은 남북한의 관계 개선 사업에 자신과 더불어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탤 의향이 있는지 은근히 타진해 보는 것 말이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반문하겠지만, 그에 대한 답변은 김영철의 태도와 반응을 보면서 적절히 대응해 나갈 생각이다.

이돈두는 약속을 확실하게 지켰다.

점심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어느새 취득한 대포폰을 퀵서비스로 보내온 것이다.

지태는 대포폰을 가지고 회사에서 멀리 벗어난 지점으로 걸어갔다.

행여 이곳 건물 옥상까지 저들의 감청 범위에 들어있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지태가 걸어온 곳은 인근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오후 1시.

미얀마는 지금 오전 10시 30분가량 되었을 것이다.

첫 번째 통화 연결은 실패했다.

생소한 번호라서 김영철이 일부러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지태는 잠시 여유를 두고 다시 시도해볼 생각으로 나무 벤치에서 일어나 자판기가 세워진 곳으로 갔다.

자판기에서 시원한 이온 음료를 한 캔을 빼서 다시 나무 벤치로 돌아와 두 번째 통화를 시도했다.

다행히 이번엔 전화를 받는다.

두 번 연달아 전화를 해오자 누군지 궁금했던 모양인데 그렇다고 먼저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지태가 피식 웃으며 말을 붙였다.

“김영철?”

스마트폰 너머에서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김영철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 뭐네? 동무래 한지태야?

“벌써 내 목소리도 까먹은 거야?”

- 까먹긴! 손전화에 저장된 번호가 아니라서 기렇디. 긴데 전화번호를 바꾼 거이네?

“그런 건 아니고, 사정이 좀 있어서…….”

- 사정이라니? 기거이 혹시…?

눈치 하나는 빠른 놈이다.

지태가 긍정의 웃음을 픽 하고 흘렸다.

그 위로 김영철의 확신이 배어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 국정원 아새끼들한테 감시당하는 거로구만, 기래?

“감시까지는 아닌데 미리 조심하자는 차원이지. 미얀마에서 내가 워낙 시끄럽게 굴었어야 말이지. 그것 때문에 아무래도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이 정도만 해도 김영철은 충분히 알아먹었을 거다.

김영철이 킥킥 웃었는데 비웃음은 아니었다.

그의 속내까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할 말이 잔뜩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데? 왜 웃어?”

- 아니, 기냥. 기나저나 혹시 낼모레쯤 시간 좀 만들 수 있갔네?

“왜?”

- 중국으로 좀 넘어왔으면 해서 말이디.

“뜬금없이 웬 중국?”

- 내래 공화국으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았거든. 기래서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무래 잠깐 보고 갔으면 해서 말이디.

지태는 순간 김영철의 말속에 무슨 다른 의도가 숨어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주저 없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질문이 날카로워 보이지 않도록 짐짓 김영철의 사투리를 흉내 내었다.

“김영철 동무, 확실히 말하디 못하간? 뭣 땜에 내래 보자는 거인데?”

- 하하. 이 동무래 사상이 의심스럽구만, 기래. 기러다 국정원 아새끼들한테 붙들려 가면 어쩌려고 기러네?

“흰소리 그만두고, 뭐야? 왜 만나자고 하는 건데?”

- 전화상으로는 긴말하기가 좀 기렇고, 우리래 얼굴 보고 진지하게 대화 좀 하자우.

“그래도 뭔가 암시는 줘야 넘어가든 말든 결정을 내리지.”

- 실은 말이디, 공화국 상부에서 지령이 내려왔드랬어. 내래 한지태 동무와 미얀마에서 공조했다는 사실을 위에 보고했거든. 기랬더니 한 번 더 만나본 후에 귀국하라더군. 이만하면 됐네?

“흠…….”

이게 단순히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천우신조인가.

지태는 기가 막힌다는 듯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그래도 즉답은 피했다.

일단 오후에 김성욱을 만나 김영철의 제안에 대해 의견을 물어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밤에 다시 연락하지. 그때 결정해도 되는 거지?”

- 맘대로 하라. 대신 내 입장을 봐서라도 긍정적인 답변을 달라. 알간?

그 말을 끝으로 김영철은 전화를 끊었다.

지태는 끊어진 폰을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원하지 않는 격랑 속으로 점점 발을 내딛어가는 기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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