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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99화 (199/272)

199화. 딜레마(3)

계약을 마친 지태는 강동진과 더불어 세부 사항을 논의하라며 유기영 부사장을 회사에 남겨둔 채 밖으로 나왔다.

“저녁 드시지 않겠습니까?”

아직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태는 굳이 유성락 부회장에게 저녁 식사를 청했다.

이래저래 나눌 이야기가 많아서 저녁 식사를 핑계로 삼은 것이다.

“잘됐구먼. 그러잖아도 나도 자네한테 물어볼 게 좀 있었는데.”

유성락 부회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지태는 인근 한정식 전문식당으로 그를 모셨다.

신선로의 국물이 알맞게 졸여졌을 즈음 유성락 부회장이 술잔을 권했다.

“새로운 도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건배 한번 하지.”

“예, 회장님.”

“부디 신화를 다시 써주시게.”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해요. 앞으로도 변함없이 따끔한 채찍질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물론 가끔은 달달한 조언도 얹어서요.”

“허허, 이 친구 말하는 본새 좀 보게.”

유성락 부회장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털털하게 흘렸다.

그러다가 이내 정색하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그나저나 압수해갔던 물품들은 다 돌려줬다면서?”

서울지방국세청에서 압수해갔던 컴퓨터 하드디스크며 각종 서류들을 말하는 거였다.

압수물 집행 당시 직원들을 지휘했던 조사국 홍성문 과장은 어제 오후에 지태를 찾아와 잘못된 제보로 무리한 실사를 벌였다며 오히려 사과했다.

설령 아무리 잘못을 했다손 쳐도 저들은 기업들의 입장에서 보면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따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처지인 거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며 업체에게 고개를 숙인다?

이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그런 까닭에 무지 당황스러워 했던 기억이 지태는 아직도 생생했다.

“자네, 혹시 내가 모르는 무슨 대단한 빽이라도 숨겨두었나? 그 친구들 어지간해선, 아니지, 하늘이 두 쪽이 난다 해도 절대 고개를 숙일 친구들이 아닌데…….”

유성락 부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정권이 바꾸니까 그 사람들도 덩달아 정신이 바뀌고 개과천선했나 보죠, 뭐.”

지태는 농담으로 웃어넘기려 했지만 속으로는 김성욱의 힘을, 아니 국정원의 대단한 위력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아무리 그 위세가 예전만 못하다 하더라도 국정원은 역시나 국정원이었다.

그나저나 김성욱이 먼저 신뢰의 증표를 보여줬으니 이제는 자신이 그에게 화답해줄 차례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리 실실 웃어!”

마음속 생각이 저도 모르게 입가로 드러났던 모양이다.

지태가 멋쩍게 웃으며 변명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오늘 너무 기분이 좋아서 말이죠.”

“원 싱거운 친구하곤!”

유성락 부회장이 고개를 두어 번 내젓더니 자기(瓷器)로 된 주전자를 들어 지태의 빈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 * *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지태는 식당 주차장에서 유성락 부회장을 배웅했다.

저녁 식사에 반주까지 곁들이고 나왔지만, 아직 저녁 7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왠지 가슴 한쪽이 허전하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드리워졌던 짙은 먹구름이 걷히고 새 희망과 설렘을 품은 날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양말을 걸어두고 잠 못 이루는 아이처럼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기대감이 넘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겉으로 표출하기엔 좀 부끄러운 나이가 아니던가.

이럴 때 지은이가 더없이 그리웠다.

하지만 불러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오늘을 그냥 덧없이 흘려보내긴 싫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대상이 어느 때고 부담 없이 불러낼 수 있는 강성원이었다.

지태가 전화를 걸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을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벨이 울렸다.

살펴보니 유기영 부사장이다.

“예, 부사장님!”

- 어디십니까, 회장님?

“유성락 회장님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제 막 나오던 참입니다.”

- 저도 강동진 사장과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 보완 작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입니다. 보고는 어떻게……?

“이미 그물에 잡힌 물고기인데 달아날 곳이 있겠습니까. 내일 천천히 듣기로 하죠.”

- 예,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유능하고 꼼꼼하기로 소문난 변호사 출신이니 어련히 마무리를 잘했을까.

더구나 M&A의 전문가였다.

지태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통화 목록을 뒤졌다.

곧 강성원의 이름을 찾아낸 후 지태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

자신은 이른 저녁을 먹은 상태지만 강성원은 아직 식사 전인 것을 감안해 지태는 요깃거리와 술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약속을 잡았다.

횟집이었다.

메인보다 서브로 깔리는 해산물들이 외려 더 푸짐하고 화려하게 나온다는 맛집을 선택했다.

지태보다 먼저 와 있던 강성원이 자연산 우럭을 주문해 놨다.

아닌 게 아니라 메인이 나오기 전에 깔린 서브 안주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오늘 모처럼 허리띠 풀어놓고 맘껏 마셔볼까?”

뒤늦게 도착한 지태가 자리에 앉자마자 강성원에게 불쑥 내던진 말이다.

강성원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피식피식 웃어댔다.

“어쩐 일이냐, 네놈이 먼저 허리띠 풀자는 소리를 다 하고?”

“이 형이 기분 좋은 날이라서 그런다. 오늘은 그냥 맘껏 자축하고 싶어서.”

“뭔데?”

“지난번 내가 얘기한 거 있잖아. 조금 전에 그거 사인하고 나오는 길이다.”

“거 뭐냐. 빤쓰 만드는 회사?”

“그래, 빤쓰!”

지태가 정겨운 모습으로 웃었다.

역시나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강성원이었다.

그래서 불알친구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세무조사도 잘 해결됐고?”

오랜만에 만나는 거여서 강성원은 궁금한 것도 참 많았다.

“잘 마무리됐어. 오히려 사과까지 받았다. 조사국 과장한테서.”

“뭐어, 걔네가 너한테 사과를 해? 햐, 이거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일단 술부터 한잔하고.”

지태는 소주병을 들어 강성원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바로 병을 건네받은 강성원이 지태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쨍.

건배 후에 술잔을 단숨에 털어버린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괜히 웃었다.

지태는 오랜만에 만난 강성원이 반가웠고, 강성원은 지태의 근심거리가 사라졌다는 점이 좋아서였을 것이다.

“참, 저번에 돈두 녀석이 난리를 쳤을 땐 어디 있었던 거냐?”

강성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며칠 전 통화했을 때 지태는 자세한 이야기를 피하며 대충 얼버무렸었다.

이번에도 지태는 쓴웃음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형사의 촉도 촉이지만, 근 20년 가까이 지태를 곁에서 지켜본 강성원이었다.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강성원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지태가 마침내 떫은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주변을 먼저 휘 훑었다.

“사실은 국정원에 끌려갔다 왔다.”

“뭐, 뭐어?”

강성원이 정신이 번쩍 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국…… 정원에서 너를 왜?”

엉겁결에 큰소리로 물으려다가 주변을 의식하고는 가만히 속삭여 묻는 강성원이다.

“말하자면 아주 길다.”

지태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될지 아주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김영철을 만나게 된 계기, 국정원과의 공조 등에 대해 설명을 해주기엔 횟집은 적당한 곳이 아니라고 봤다.

그래서 지태는 서둘러 술자리를 끝내고 조용한 곳으로 옮겼다.

돈두파에서 직영하는 룸살롱 중 한 곳이었다.

횟집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고, 이돈두와도 몇 번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어 낯선 곳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긴 했지만.

룸에 들어앉은 지 몇 분 되지도 않아서 이돈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룸살롱의 관리실장이 이돈두에게 전화를 넣은 듯했다.

- 야, 인마! 내 나와바리에 왔으면 나를 부르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비겁하게 배신 때릴 거야?

이돈두는 매우 섭섭하다며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처럼 굴었다.

“성원이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곳을 찾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너한테 연락하면 괜히 영업에 지장이나 줄 거 아니냐.”

- 지랄한다. 너 거기서 딱 기다려.

“야, 잠깐! 나중에 따로 한잔해. 오늘은 성원이하고 단둘이서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 음… 그래?

지태가 너무도 진지하게 나오니 무턱대고 우길 수 없다고 본 모양이다.

이돈두는 금세 마음을 접는 듯했다.

그러나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

- 좋아. 대신 술값은 내가 낸다. 너하고 성원이한테 내가 한잔 사는 걸로. 알았지?

그것까지 거절한다면 겨우 돌려놓았던 이돈두의 고집이 다시 시작될 거다.

지태는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후 술이 세팅될 때까지 지태와 강성원은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제 더는 방해받을 상황이 없다고 판단한 지태가 그제야 미얀마에서 김영철을 만나게 된 계기부터 설명해 나갔다.

“……그니까 결국 따지고 보면 이 일련의 사태가 다 임경남 그놈 때문이야. 최초에 원인을 제공했으니까.”

약 1시간 가까이 지속되던 지태의 설명이 이윽고 끝났다.

강성원이 지태의 말끝에 맞장구를 쳐줬다.

“그 새끼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사이코패스야. 집착이 아주 접착제이다. 강력 본드보다 더 질긴 새끼!”

지태는 쓰게 입술 끝을 비틀다 말고 목이 타는 듯 생수를 온더록스 잔에 가득 따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나저나 국정원에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면 아주 골치 아픈데. 시발, 이제 앞으로 끄덕만 하면 불러다가 족쳐댈 거 아니냐.”

“당장은 범법자가 아니라 애국자 버전으로 대접해 준다잖아. 큭!”

“새꺄, 이게 지금 웃을 일이냐. 하이고, 속도 좋은 새끼.”

“그럼 우냐? 그리고 혹시 알아? 이게 오히려 내겐 전화위복이 될지.”

“전화위복은 니미!”

강성원은 술병을 들어 자신의 스트레이트 잔을 채웠다.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다 말고 그가 문득 정색했다.

“참, 이야기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긴 한다만, 얼마 전에 강창근이한테서 연락이 왔었다.”

“누구?”

“타워파 대가리.”

“그놈 잠수 타서 요즘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며?”

“지금도 짱 박혀 있는 모양이야. 대검에서 계속 파고드니까.”

강성원의 설명에 지태가 끄덕였다.

이돈두에게 듣기로는 타워파는 현재 조직이 거의 와해되기 직전이라고 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검 조직범죄과에서 들쑤셔대는 상황이니 그들이 어찌 배겨날까.

“근데 갑자기 왜 연락이 온 건데?”

“기왕 이리된 마당에 저 혼자 죽진 않겠다 이거지, 뭐.”

“그럼 다 털어놓겠대? 임경남 패거리의 불법행위까지 다?”

“아직 거기까진 접근하지 못했어. 일단 간만 보는 거 같더라. 나더러 외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 있겠냐고 몇 번을 재차 확인하더라.”

“그래서?”

“그래서는 뭐! 당연히 그럴 거라고 했지. 그랬더니 조금만 여유를 달래. 결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음.”

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우려의 표정도 살짝 스쳐 갔다.

“조심해. 다른 놈들도 아니고 임경남과 그 패거리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니까.”

“너나 잘해, 인마. 국정원 같은 데에 질질 끌려가지나 말고.”

“새끼가!”

지태가 머쓱한 듯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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