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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96화 (196/272)

196화. 잠깐 보실까요?(4)

지태가 SUV의 뒷좌석에 올라타자 대가리로 보이는 사내와 그의 부하 직원 하나가 그를 가운데에 두고 양옆으로 앉았다.

마치 형사들이 범죄자를 연행하는 그림이다.

“자, 일단 이걸로 눈을 가리십시다.”

대가리가 검은 안대를 내밀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지태는 안대를 받아 눈을 가렸다.

그 이후로 세 사내는 재봉틀로 입을 꿰맨 듯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지태는 머릿속마저 암흑으로 뒤덮인 느낌이었다.

이들이 누군지, 그리고 어디로 데려가는지 이동하는 내내 온갖 상상을 동원해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애써 떠올린 그림마저 먹물을 끼얹은 듯 곧 지워졌고, 그 후로는 도무지 어떤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 위로 최봉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당장 어떻게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일세. 시내를 달리고 있구먼, 그래.

‘시내요?’

- 이제는 한강이 내다보이는 도로로 접어들었어.

최봉준은 내비게이션처럼 SUV가 움직이는 대로 지태에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윽고 어느 시점에서 계속 조잘대던 최봉준의 전음이 머릿속에서 뚝 끊겼다.

그와 동시에 차가 멈춰 섰다.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지태의 왼쪽에 앉아있던 사내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안대로 눈을 가린 지태의 손을 잡아 차에서 잘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열다섯쯤 세었을 때 걸음이 멈춰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올라가는 속도로 보아 이들의 목적지는 3층인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몇 걸음 더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우뚝 멈췄다.

그제야 양팔을 붙들고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지태의 안대를 벗겨주었다.

어둠 속에 감금당했던 두 눈이 밝은 조명 빛에 적응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문 앞에 붙여진 아크릴 간판의 글씨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한강실업]

이곳이 말로만 듣던 국정원의 위장 회사인 모양이었다.

띠띠띠띡.

디지털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자 곧 문이 열렸다.

대략 30여 평쯤 되는 사무실이다.

겉으로 보기엔 일반 사무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업무를 보던 예닐곱 명의 남녀들이 안으로 들어선 지태를 흘깃 쳐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이내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갔다.

지태를 데리고 끌고 온 사내들의 대가리가 그의 한쪽 팔을 잡아끌며 사무실을 가로질러 갔다.

벽면 옆에 세워진 책장 앞이었다.

책장 뒤편으로 손을 넣어 어떤 비밀장치를 누르자 책장이 스르르 옆으로 밀려났다.

그 안에 또 하나의 철문이 있었는데 사내가 다시 한 번 디지털 도어록의 비밀숫자를 눌러 문을 열었다.

“자, 들어갑시다.”

지태는 사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오호라! 이분이 그 유명하신 한지태라는 양반이로구만?”

흡사 영화 속에서나 보았음 직한 취조실 같은 분위기의 내부였다.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원형 탁자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중년 사내가 그런 식으로 알은체를 해왔다.

적잖은 냉소를 담은 말투였다.

첫눈에도 결코 가볍지 않은 외모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사내.

사내가 지금껏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지태에게로 다가왔다.

“한 사장, 아니지. 이젠 한 회장인가. 난 한강실업 사장 김성욱이오. 암튼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앉으십시다.”

김성욱은 턱짓으로 원탁 테이블의 의자를 가리켰다.

지태가 즉각 움직이지 않자 이곳으로 안내했던 대가리가 거칠게 어깨를 밀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예전부터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무서운 권세를 가진 국정원이 아닌가.

비록 지금은 그 옛날의 영화를 전부 다 누리지 못하는 형편이 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살벌하다는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지태는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김성욱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김성욱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새겨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는 지태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곧바로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지태의 모든 것을 그동안 샅샅이 훑었다는 뉘앙스를 흘렸다.

앞으로 묻는 말에 허튼소리 말고 대답을 똑바로 하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젊은 사람이 아주 대단하셔. 요즘 흔히 말하는 흙수저 중에 흙수저가 그 짧은 시간에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온 것을 보면 말이지.”

김성욱은 숫제 반말로 나왔다.

그러나 지태는 개의치 않았다.

반말이든, 반에 반말이든 간에 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행간을 읽는 데만 주의를 기울였다.

“아버지가 비관 자살하셨더구먼. 그땐 돈이 없어서 그런 선택을 하셨겠지?”

순간 지태의 표정이 달라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건드려도 상관없지만, 아버지만은 안 되었다.

벌떡.

지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봐! 뭣 땜에 나를 이곳으로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건드려야 할 것과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안 되는 게 있어. 당신은 지금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을 건드렸어!”

지태가 눈에 넣을 듯 김성욱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한쪽에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던 사내가 다가와 지태의 양어깨를 잡아 찍어 누르듯이 앉히려고 했다.

“앉아, 이 새끼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좆같은 따까리는 저리 비켜, 이 새끼야!”

지태가 벌레 털어내듯 사내의 손을 뿌리쳤다.

그 바람에 몇 걸음 뒤로 밀려나자 사내는 악에 받쳐 다시 달려들었다.

“아니, 이 개새끼가!”

사내는 분을 참지 못하고 급기야 지태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쉬익.

빠각.

꽈당.

그러나 정작 뒤로 나자빠진 것은 사내였다.

시선은 김성욱에게 두고 있었지만, 뻗어오는 사내의 주먹을 본능적으로 흘려보내며 백스핀 엘보를 그의 턱에 꽂아버린 거다.

가뜩이나 분노를 꾹 누르고 있던 지태였다.

그것이 끝내 폭발해버린 것이니 얼마나 강했겠는가.

사내는 좀처럼 일어날 줄을 몰랐다.

김성욱이 그 모양을 보더니 쓰게 웃었다.

“과연! 과연 한지태야, 아주 대단해!”

지태가 그를 노려보았다.

“다음에 나를 다시 부르려거든 정당한 사유를 대던가, 아니면 법적 절차를 밟아.”

지태가 싸늘하게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드르륵, 철컥.

그때 등 뒤에서 권총의 슬라이드를 후퇴 전진시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앉아!”

“싫다면?”

“허, 이거야 원!”

지태의 단호한 태도에 김성욱은 끝내 혀를 내둘렀다.

그러더니 곧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자네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사과하지. 미안하네. 그러니까 일단 앉아.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넘치고 넘쳐, 이 친구야!”

지태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두어 번 더 들숨을 마시는 것으로 부글부글 끓어대는 가슴속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다시 김성욱의 앞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제야 엘보를 맞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가 겨우 꿈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 * *

후안은 거실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밤 10시가 가까워져 오는 시간.

지태가 저녁 겸 술 한잔하자고 연락해온 것은 7시 무렵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깜깜무소식이다.

후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몸짓 발짓으로 후안과 대화를 나누며 그의 무료함을 달래주던 친위대원이 앉은 채 졸고 있었다.

후안은 그윽한 아빠 미소로 소파 등받이에 있던 점퍼를 집어 친위대원의 가슴께를 덮어주었다.

이곳은 돈두파 간부급들만을 위한 전용 숙소로 월세가 꽤나 비싼 오피스텔이었다.

지금은 후안을 위해 이곳을 비워둔 상태였다.

후안이 다시 스마트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때였다.

띠리릭.

디지털 도어록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여 지태가 온 것은 아닌가 하는 반가운 마음에 후안은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을 보자 후안은 쓰게 웃었다.

윤학수인 거다.

“왜 그래. 그거 영 떨떠름한 표정인데? 내가 와서 실망한 거야?”

윤학수가 후안의 위아래를 훑으며 농담을 던져왔다.

무슨 말인지 100% 알아듣진 못하지만 대충 눈치로 이해한 후안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짧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보스 때문에.”

“지태 형님? 여기로 컴온하기로 하셨어?”

윤학수가 말도 안 되는 영어와 몸짓을 섞어서 되물었다.

이제는 보디랭귀지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할 만큼 윤학수와는 더없이 가까워진 후안이었다.

후안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담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타임에?”

“세븐!”

세븐이라는 단어도 못 알아들을 만큼 완전히 무식한 윤학수는 아니지만, 후안은 친절하게도 손가락으로 숫자를 만들어 보였다.

윤학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님께서 그러실 분이 아닌데? 급한 일이 생겼으면 미리 연락이라도 주셨을 텐데…….”

그러다가 후안에게 외출 준비를 하라는 듯 옷을 입어 보이는 동작을 해보였다.

“돈두 보스, 밑에서 기다리셔. 너랑 해브 어 드링크 하자셔! 너 좋아하는 소주 말이야.”

“오, 쏘주!”

후안은 소주라는 말에 귀가 솔깃한지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가 이내 찜찜한 표정으로 변했다.

연락이 없는 지태가 염려되는 거다.

“일단 내려가자, 후안! 돈두 보스 많이 기다리시니까. 내려가서 마이 보스께 전화를 해보라고 할게.”

윤학수가 후안의 근심을 덜어주려는 듯 다시 또 열심히 손짓, 발짓을 써가며 말을 덧붙였다.

* * *

지태와의 소모적인 기 싸움은 포기한 듯했다.

김성욱은 그간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지태를 추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태는 입을 꾹 다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묵비권이라기보다는 이들이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최대한 파악해 보려는 눈치였다.

지태가 부인하지 못할 만큼의 수많은 자료와 정보들을 수집해놓았다는 자신감의 발로였을까.

김성욱도 무리하게 다그치려는 기색이 아니었다.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졌던 사내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더는 지태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김성욱이 밖으로 내보낸 듯했다.

“이 정도 했으면 이제 뭔가 한마디쯤 내뱉을 때도 되지 않았나? 계속 부인할 텐가?”

“부인하고 말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김 사…… 큭!”

지태가 김성욱에게 사장이라는 호칭을 붙이려다가 코웃음을 쳤다.

위장 회사인 한강실업의 직위를 대려니 왠지 어색해 웃음이 나오는 거다.

김성욱이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픽 웃었다.

“국정원의 대북관련 부서가 3차장 산하라는 건 잘 알 테니 굳이 다시 설명하진 않겠네. 나는 대북관련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부서의 부국장이야. 김 사장이라고 부르기가 뭐하다면 앞으로 부국장이라는 호칭을 써줘.”

“그러죠. 여하튼 부국장님도 알다시피 나는 사업갑니다. 한스라는 기업을 운영하는 CEO이기도 하고. 그 말인즉슨 돈이 되는 건 그게 뭐든 물불 안 가린다, 이 말입니다.”

지태는 잠시 말을 끊고는 종이컵에 담긴 물로 입술을 적시고는 내려놓았다.

“그래요. 국정원에서 이미 파악했듯이 나는 미얀마 정부와 대척점에 서 있는 반군들과 거래를 했습니다. 그건 부인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나라에 해를 끼친 역적질이나 매국적인 일을 벌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난 오히려 외화벌이로 우리 경제에 도움을 줬어요. 한데 이런 사람을 굳이 범죄자 취급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점에 대해선 굳이 따질 필요가 없겠지. 자네 말마따나 그건 뭐 불법으로 몰아갈 만한 게 아니니까. 한데 본질이 틀렸어, 본질이! 우린 지금 그걸 따지려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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