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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95화 (195/272)

195화. 잠깐 보실까요?(3)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은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거짓은 아닌 듯했다.

지금 눈앞의 이 자연스러운 표정이 만일 연기라면 적어도 30년 이상 내공을 쌓은 연기자의 반열에 올라야 할 것이다.

“모르셨구나, 아빠!”

“그런 사소한 것까지 보고받을 만큼 내가 한가한 사람이야? 그리고 이놈아! 국세청이 어디 내가 손을 쓴다고 움직이는 곳이냐? 우리도 까딱 잘못하면 벌벌 기어야 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야.”

맞는 말이어서 지은은 할 말이 없었다.

조금 전 경영지원실의 직원들 사이에서 흘러 다니는 한스의 세무조사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는 순간 지은은 임상만 회장을 떠올렸었다.

이젠 하다하다 세무조사로 지태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생각이 들자 앞뒤 잴 것도 없이 곧장 튀어 올라온 거다.

“근데 넌 그 소식을 어디서 들은 거냐? 혹시 아직도 그놈하고 연락해?”

“연락은 무슨! 아버지가 붙여놓은 감시자들 때문에 내 하루를 몽땅 다 저당 잡혔는데.”

“그게 감시야? 신변 보호차원에서 경호원들을 붙여놓은 걸 가지고…….”

임상만 회장은 그렇게 뱉어놓고도 조금은 양심이 있는지 지은의 시선을 슬쩍 피해갔다.

“아니면 됐어요. 그만 나가볼게요.”

“헛험!”

임상만 회장은 헛기침으로 나가보라는 말을 대신했다.

지은이 문을 나가자 임상만 회장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혹시 경남이 녀석인가?”

임경남이 손을 쓴 것은 아닐까 의심하던 임상만 회장은 곧 쓰게 웃었다.

자신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기관을 임경남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긴 그럴만한 깜이라도 된다면야…….”

임상만 회장은 이내 쓴웃음을 뱉어냈다.

* * *

국세청에서 한스 홀딩스의 중요 서류며 직원들의 컴퓨터 하드디스크까지 몽땅 다 쓸어가는 바람에 회사 업무는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그렇게 특별 세무조사를 하겠다며 사무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지가 벌써 열흘 가까이 됐다.

직원들의 표정엔 침울함만이 가득했고, 회사 분위기는 가히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개자식이 그런 말도 안 되는 투서를 넣었지?”

조현민이 혼잣말처럼 분통을 터뜨렸지만 전부 다 들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곳은 회의실로써 각 사의 사장단들이 전부 모여 대책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다.

대책 회의라며 모여 앉긴 했지만, 한스에서 당장 손을 쓸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저 별 탈 없다는 특별 세무조사의 결과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수밖에.

그러니 모일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종일관 분통만 터뜨리는 것이 회의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현민의 과격한 혼잣말을 끝으로 모든 임원들의 분노를 가만히 다 듣고 있던 지태가 쓰게 웃었다.

“진정하세요, 조 사장님. 지난번 회의 때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한스는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불법을 저지른 적도 없고, 탈세를 꾀한 일도 없고……. 그러니까 저들이 아무리 구석구석 털어봤자 먼지 한 톨 안 나올 것이다, 이 말입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개인적으로 자행한 탈법, 불법적인 사실이 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물론 맨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사족이었고,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사장단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태가 말을 이었다.

“강철은 열을 높게 가할수록, 쇠망치로 세게 두들겨 맞을수록 더욱 단단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우선 나부터도 억울하고 분합니다. 하지만 마인드를 바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자위를 삼죠. 좀 더 강하게 거듭나라는 하늘의 뜻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우리 한 회장님은 정말 못 말리겠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긍정적 마인드라니.”

한스 다모아의 대표이사로 추대된 박찬익 사장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면에는 자신이 사람을 잘 본 것이 맞는다는 야릇한 자부심도 섞여 있었다.

지태가 박찬익 사장을 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을 회장으로 대접해 주겠다면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세요. 가령 다모아의 괄목할 만한 성장 같은 거.”

“기승전, 성과로군요. 알겠습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박찬익 사장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자신의 결의를 나타냈다.

“무역 쪽은 기존의 오더 관리와 함께 신규 오더 개척에도 더욱 정진해주시고요.”

“예!”

조현민은 서서히 회의실의 분위기가 반전되어가는 것을 의식한 듯 일부러 씩씩하면서도 큰소리로 대답했다.

“전자의 이동구 사장님도 부탁드립니다.”

“예, 회장님!”

이동구 사장 역시 젊은 사장들에게 지는 게 싫다는 듯 큰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지태는 양손으로 엄지 척을 해보이며 그에게 화답해주었다.

* * *

퇴근을 약 1시간 정도 앞둔 때였다.

지태는 유성락 부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특별 세무조사로 골치를 썩고 있을 지태를 위로하는 차원의 안부 전화라고 했지만, 비단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듯했다.

지난 임시주총 때 자신이 제안했던 언더웨어 전문회사 ‘멋진 사람들’의 인수 건에 대한 결심이 섰는지를 묻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을 좀처럼 꺼내지는 못했다.

지태가 그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회장님, 지금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 나야 상관없지만 자네가 시간을 낼 수 있나?

“회장씩이나 되어 가지고 제가 퇴근까지 직원들의 눈치를 봐야 되겠습니까?”

- 허허,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엔 먼저 올라간다더니…….

유성락 부회장은 애정을 담은 웃음을 흘리더니 곧 약속 장소를 불러주었다.

* * *

노란불에서 빨간불로 신호가 바뀌었다.

지태는 승용차를 천천히 멈춰 세웠다.

유성락 부회장과 만나기로 한 호텔은 약 20분 거리였지만, 도로는 이미 러시아워에 접어들고 있었다.

예의상 30분쯤 일찍 도착해 기다리려고 했으나 예정된 시간보다 10분 정도는 늦을 것 같다.

지태는 룸미러로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도 역시나 누군가 자신을 몰래 따라붙고 있었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것이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처음엔 의식하지도 못했는데 최봉준이 전음으로 알려와 뒤늦게 눈치를 채게 되었다.

그러니 저들이 언제부터 꼬리를 물었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누굴까.

지태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언제나처럼 생각을 더듬었다.

임경남이라고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곧 의심을 거뒀다.

그가 고용한 사람들이라면 분명 건달 나부랭이들이든가, 아니면 심부름센터의 용역들일 것이다.

그런데 간간이 살펴본 저들의 옷차림새와 분위기는 그런 부류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랬다.

저들은 기관원들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형사들인가?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형사들이 단정하고 반듯한 슈트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으니까.

또한 그들이 자신을 몰래 따라다닐 이유도 마땅히 없지 않은가.

생각할수록 이상한 노릇이라고 고개를 내젓는데 신호가 파란불로 뒤바뀌었다.

지태는 기어를 다시 전진에 놓고 차를 천천히 움직여 갔다.

* * *

유성락 부회장은 약속된 시간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각에 도착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지태에게 다시 위로하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주문한 커피가 놓였을 즈음에야 비로소 심중에 살짝 구겨놓았던 본심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어떤 쪽으로 결정을 내렸나?”

“그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제가 그 회사를 인수하게 되면 확실히 채권단으로부터 긴급 유동성 자금을 수혈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인수하기 전 선행되어야 할 게 있네. 경영 정상화를 위한 자구책 말이야. 자네가 기업을 회생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을 그들에게 먼저 심어주는 것이 우선이겠지.”

“예, 물론이죠. 알겠습니다. 그것만 보장된다면 저는 회장님을 믿고 모험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 친구 말하는 것 좀 보게. 그럼 내가 죽으라면 죽을 텐가?”

“시늉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지태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유성락 부회장이 그윽하게 따라 웃자 지태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 식사를 모시고 싶은데 혹시 선약이 있으십니까?”

“내가 비록 지금은 백수지만, 아직은 찾아주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선약이 있다는 말이다.

지태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자 유성락 부회장이 픽 웃었다.

“꼭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그리고 ‘멋진 사람들’이 정상 궤도에 올랐을 땐 두고두고 얻어먹을 걸세. 자네,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얼마든지요, 회장님.”

지태가 환하게 웃었다.

요즘 매일같이 소집하는 사장단 회의 때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경영을 총지휘하는 입장에서 무지 가슴이 무거웠었다.

그랬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외피를 감싸고 있던 가식들을 벗어던졌다.

스스로에게 용기와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서라도 짐짓 과장된 웃음을 쏟아내고 싶었다.

더구나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직후였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샘솟고 있는 뜨거운 설렘이 지태로 하여금 자극적인 웃음을 유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 * *

지태는 호텔 현관 앞에서 유성락 부회장을 배웅한 후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후안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는 며칠 후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그전에 모처럼 저녁이나 함께하고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돈두의 얼굴을 본 지도 꽤 된 것 같다.

후안을 맡겨놓고 이토록 무심했다니.

하긴 이돈두도 요즘 지태의 골치 아픈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이해는 할 것이다.

“그래, 모처럼 돈두하고도 한잔하지, 뭐.”

지태는 일단 후안을 만난 다음 이돈두에게 전화를 넣기로 마음먹었다.

주차된 승용차의 문을 열기 위해 스마트키를 꺼내 드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후다닥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여러 사람이었다.

지태는 왠지 싸한 느낌을 갖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사내들이다.

한 달 전부터 자신의 뒤를 몰래 밟아온 기관원처럼 보이던 사내들.

“뭐요, 당신들?”

지태는 어느새 자신을 포위한 세 명의 사내를 차례로 훑어가며 물었다.

그중 한 명이 약간은 조소가 섞인 미소를 흘리며 지태와 눈을 맞췄다.

“한지태 씨, 우리와 잠깐 같이 가십시다.”

“누군지 소속도 안 밝히고 대뜸 같이 가자고 하면 내가 순순히 따라가 줘야 되는 거요? 누구야, 당신들?”

지태가 눈을 부릅떴다.

여차 하면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러자 말을 걸어온 사내가 씩 웃더니 자신의 슈트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눈앞에 내밀었다.

“국정원?”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지태가 물었지만, 이제는 대꾸 대신 턱짓으로 자신들이 타고 온 SUV를 가리켰다.

무조건 올라타라는 강요였다.

“이봐요. 왜 이러는지 이유는 말해줘야 할 게 아뇨!”

“이유는 우리 회사에 들어가서 들으시고. 뭣들 해, 모셔!”

양복쟁이들의 대가리로 보이는 사내의 말이 떨어지자 두 사내가 달려들며 지태의 양팔을 붙들었다.

이쯤 되니 어쩔 수 없다.

지태는 일단 따라가 보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겠지 하는 심정으로 곧 반항 없이 사내들의 SUV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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