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잠깐 보실까요?(1)
“그나저나 다행입니다. 이렇게 무사히 다녀오신 것만 해도 천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우리 모두의 가슴을 열어보면 아마도 새까맣게 타 있을 겁니다. 허허.”
이동구 사장이 가슴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지태는 속으로 꽤나 가슴을 졸였을 여러 사장단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목례를 올렸다.
미얀마 출장에 대한 지태의 설명이 끝나자 각 사의 대표들이 시급한 현안들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지태는 꼼꼼하게 메모를 해가며 각 사의 현안들을 정리해갔다.
“지금 당장 답을 드릴 순 없겠습니다. 저도 나름 신중히 검토를 하고 고민해 볼 테니 여러분들도 보다 좋은 방향으로 결론이 날 수 있게 힘써주십시오.”
어느새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고, 회의는 파장 분위기였다.
그때 이동구 사장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곧 결심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지태가 묻자 이동구 사장은 시선을 피하는 대신 사장단을 죽 돌아보았다.
“여러분들도 전부 인정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한지태 대표님을 너무 혹사시키고 있다고.”
지태는 영문을 몰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사장단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동구 사장이 꺼내든 알쏭달쏭한 서두의 뜻을 모두는 짐작하고 있다는 모습들이었다.
어쩌면 그들끼리 암묵적으로 합의를 도출해낸 결과물을 이동구 사장이 대신 총대를 메고 터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의 한스는 한지태 대표께서 처음 기업을 일으켰을 당시의 구멍가게가 아닙니다. 홀딩스를 포함해 네 개의 계열 회사를 거느리게 됐단 말입니다. 비록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이 모든 짐을 한지태 대표 혼자 짊어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방임이고 욕심이라고 사료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 이동구 사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지태가 복잡한 시선으로 이동구 사장을 불렀다.
그러자 이동구 사장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자, 여러분들의 의향은 어떻습니까?”
이동구 사장은 거듭 사장단들의 의견을 재촉했다.
* * *
지태가 사장단 회의를 마치고 홀딩스 대표실로 향하자 조현민이 뒤따라 들어왔다.
“요즘 다들 회사 일은 안 하시고 나 몰래 쓸데없는 모의만 하고 계셨던 거요?”
“쓸데없다니, 이 친구야! 다 그럴만한 당위성이 있으니까 건의를 하는 것이지.”
“아직 완전히 체계도 안 잡혔는데 그런 말씀들을 하니까 그렇죠. 회장이란 타이틀이 지금 당장 중요한 것도 아니고…….”
지태는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이동구 사장님 말씀이 맞아. 처음 구멍가게로 시작했던 한스무역 때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어. 이제 너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덩치가 너무 커졌단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조현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어서 지태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여하튼 사장단의 의견을 받아줘. 조만간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할 테니까 그때 홀딩스 대표이사 겸 그룹회장으로 취임하는 거다. 알았지?”
“이미 다 결정을 내려놓고는 무슨…….”
지태가 투덜거렸지만, 조현민은 픽 웃었다.
그도 이미 마음속엔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그룹, 그룹으로 전환이라.’
지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겉으로 드러낸 것과는 달리 뭔가 모를 벅찬 감동이 자꾸만 밀려들고 있었지만, 또 그만큼 부담스러웠다.
알 수 없는 무게감, 내가 과연 앞으로도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 하는 작은 두려움.
조현민은 지태가 품고 있는 부담감의 무게를 짐작한다는 듯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처음 나를 찾아와 함께 사고를 쳐보자고 조금은 엉뚱하고도 무모한 제안을 했을 때부터 나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어. 곧바로 널 믿었지. 네놈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거든. 독한 기운을 품고 있는 저 눈빛이라면 적어도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없겠구나, 뭔가 이뤄내도 크게 이뤄낼 수 있겠구나, 하는 의지와 가능성을 봤지.”
“……!”
“지금까지 해온 대로만 하면 실패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젠 나뿐만이 아니라 여러 지원군들이 생겼잖아. 다들 하나같이 정예들이야. 그건 너도 알잖아.”
지태가 소리 없이 웃으며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형님. 처음부터 나를 믿어준 형님이야 더 이상 말해 뭐 할까.”
“자아식!”
조현민이 환하게 웃었다.
“참, 이 대목에서 나도 제안을 하나 해야겠네요. 아까는 다들 너무 진지하게 나오고, 나 또한 워낙 경황이 없어서 말하지 못한 부분인데…….”
“뭔데? 설마 내 심장 떨리게 만들 제안은 아니지?”
“내가 뭐 날마다 사고나 치는 그런 사람인가?”
지태가 피식 웃더니 곧 정색하며 조현민을 바라보았다.
“내 부담감, 무게감을 덜어주려는 여러 임원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어요. 근데 나만 무게감을 덜어내면 끝날 일이 아닙니다. 회사의 덩치가 커지는 만큼 임원들의 어깨도 덩달아 무거워지고 있어요.”
이번엔 조현민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하지 않겠다는 뜻일 거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경력 사원들을 좀 더 보충하십시다. 임원급도 몇 명 더 보충하고.”
“당장 어디서?”
“그건 각 사의 임원진들, 그리고 간부급들한테 맡겨보시죠. 생판 모르는 경력직을 이력서와 면접만으로 블라인드 채용하는 것보다 이미 검증되었을 그들 각자의 인맥을 활용하자는 겁니다.”
“하긴 그럴 수도……. 주위에 능력은 있는데 안타깝게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몇 명씩은 존재할 테니까.”
“그리고 대기업 등에서 명퇴를 당하고 나온 사람들을 수배해 보세요. 그들을 영입하십시다.”
“올까,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명퇴하고 뒤로 나자빠졌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나름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들이야. 더구나 연봉을 맞춰주는 것도 우리로서는 조금 부담스러운 측면도 있고.”
“프라이드를 내세우는 사람들이라면 처음부터 당연히 배제해야죠. 그런 사람들은 우리한테 필요 없습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들이란 바로 그런 분들이죠.”
“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 추진해 볼게.”
조현민이 단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 * *
한 달 뒤 임시 주주총회가 소집됐고, 발의된 몇 가지 안건에 대해 의결했다.
그 자리에서 지태는 홀딩스 대표이사 겸 그룹회장으로 추대되었고, 한스 다모아의 대표이사로 박찬익을 선임하는 요식을 갖췄다.
날이 날이니만큼 유성락 부회장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고문이기에 앞서 홀딩스에 5%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로서의 자격도 갖추고 있는 그였다.
“한 사장, 아니지. 이젠 회장이라고 불러야겠군.”
지태는 주총을 마치고 유성락 부회장과 나란히 식사 자리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예약해 놓은 식당은 회사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였지만, 유성락 부회장은 운동 삼아 걷자며 지태에게 도보를 고집했다.
머쓱한 듯 지태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럼 회장님께선 저희 한스의 왕회장님이 되십니다.”
“허울뿐인 그런 것은 자네나 많이 가져.”
“그게 맘에 안 드신다면 직접 경영에 참여를 하시던가요. 아직 제 몸에 맞지도 않는 이 옷, 과감히 벗어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강도야? 자네가 애써 일군 회사를 강탈해가게?”
유성락 부회장은 유쾌한 듯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문득 웃음을 거두며 정색했다.
“자네, 혹시 의류 쪽엔 관심이 없나?”
“예?”
지태가 되물었다.
대로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소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워낙 뜻하지 않은 물음을 던져 와서 일단 그런 식으로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유성락 부회장의 후속 설명을 더 들어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의류 쪽 말이야. 그거에 대해선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어.”
“워낙 갑작스러운 물음이셔서…….”
“하긴 그렇지? 내가 아닌 밤중에 봉창을 두들겨댔으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가 궁금하긴 합니다.”
“언더웨어를 전문으로 하는 ‘멋진 사람들’이라는 패션회사가 있어. 혹시 들어 봤나?”
“아, 그럼요.”
어디 알다 뿐인가.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구멍가게 수준에서 이제는 엄연히 중견기업으로 급성장한 언더웨어 전문 기업이었다.
지태가 말을 이었다.
“그들만의 독특한 패션 언더웨어의 세계를 구축한 걸로 유명하죠. 특히 속옷 패션을 중시하는 젊은 층에게 인기가 많은 회사가 아닙니까.”
“그랬지…. 음, 그랬어. 한데 지금은 아냐. 많이 흔들려. 아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봐야 돼, 현재는!”
“……?”
“경영 악화의 계기가 된 것은 지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때부터였어. 욕심을 내서 거기에 많은 부분을 투자했는데 갑작스럽게 폐쇄를 결정해버리니 몽땅 다 날아가 버린 거지. 그걸 만회하려고 다른 몇몇 곳에 무리한 투자를 했다가 다 실패를 본 모양이야. 자산 대비 부채가 너무 커. 거의 빈껍데기란 얘기지.”
“헛, 흐음!”
지태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런 빈껍데기뿐인 회사를 두고 관심이 있느냐고 물어 온 유성락 부회장을 약간은 원망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봐야 한다.
유성락 부회장이 돌아보더니 픽 웃었다.
“아무리 빈껍데기라지만 메이커 자체와 브랜드는 살아있지 않은가. 그 가치만 해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데, 난!”
“글쎄요…….”
지태가 시원찮은 반응을 보이자 유성락 부회장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털었다.
“사업을 하고 경영을 책임지는 사람들은 때론 도박사처럼 굴어야 되는 법이야. 현재 내 눈앞에 보이는 돈은 다른 사람들 눈에도 다 보이는 법이지. 그건 메리트가 없어. 설령 내 것으로 취했다 쳐도 남는 이문 또한 별로 없을 테고.”
“예, 맞는 말씀이시긴 합니다.”
“눈앞의 재무제표만 보면 안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인드를 가져야 해. 그래야 좀 더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는 거지. 내가 보기엔 멋진 사람들이라는 브랜드는 매력적이야. 그리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자네에게 이처럼 자신 있게 흘리는 것일세.”
지태가 고개를 돌려 유성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하기는 허튼소리나 늘어놓는 사람은 아니다.
오랜 경륜과 전문 경영인의 마인드로 여러 상황을 고려해본 후에 권하고 있는 거다.
“심사숙고해보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결심이 굳혀지면 말하게. 자금은 얼마 투입하지 않아도 될 거야. 채권단을 잘 설득하면 부채 상환도 얼마든지 유예 가능할 거고. 아니다, 회생 기미만 보인다 치면 더 투자할 수도 있겠군. 그들도 회사가 문을 닫는 걸 결코 원치 않을 테니까 말이야. 만약 결심이 선다면 내가 그들과의 사이에서 중재자가 되어주지.”
“예, 회장님. 좋은 쪽으로 고려해보겠습니다.”
지태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결의를 보여주었다.
유성락 부회장이 흐뭇하게 웃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가 저만치에 보였다.
지태가 그윽한 미소로 오른손을 펼쳐 예약 장소를 가리켰다.
* * *
- 얘, 지은아! 네 남친 너무 멋지다. 완전 내 이상형!
오랜만에 걸려온 오도희의 전화였다.
지은은 귀에서 폰을 잠시 떼어내며 괜히 눈을 흘겼다.
바쁘다는 핑계로 요즘 연락도 뜸하다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웬 흰소리나 늘어놓고 있는가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