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실종(4)
부경물산 앞으로 떨어진 오더를 중년 사내의 중소 무역업체는 로컬로 내려 받아 대행하는 중이었다.
이런 일은 실무진에게 명령을 내리고 일임해도 될 아주 소소한 사안이었다.
굳이 대 부경물산의 사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나설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은밀한 자리를 마련한 것은 임경남의 흉중에 다른 뜻이 있어서였다.
바로 오더 대행 수수료를 부풀려 높게 책정한 다음 그 차액을 되돌려 받으려는 것이었다.
“김 사장 같은 중소 규모의 업체와 달리 우리 부경 같은 거대 글로벌 기업을 경영하다보면 암암리에 돈 들어갈 데가 아주 많아요. 그거 아시죠?”
“무, 물론이죠.”
“정치하는 새끼들, 철밥통 공무원 새끼들, 그리고 사회 전반에서 기생하고 있는 기타 여러 새끼들까지. 이것들의 뒷구멍을 틀어막아놓지 않으면 아주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 만들어두는 겁니다. 대기업의 비자금은 대개가 그런 용도라고 보면 돼요.”
임경남은 아주 골치 아파 죽겠다는 듯 고개를 씁쓸하게 내저었다.
그러더니 문득 사람 좋은 얼굴로 씩 웃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나오는 바람에 마음이 아주 불안하군요. 내가 없으면 우리 물산은 잘 돌아가지가 않아서…….”
그만 돌아가 보라는 이야기다.
눈치껏 말귀를 알아들은 중년 사내가 서둘러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바쁘신 시간을 할애해주셔서 뭐라 감사 말씀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중년 사내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는 별실을 빠져나갔다.
임경남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실무진에게 맡겨도 될 일을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 만큼 임경남은 지금 돈이 몹시 궁한 처지였다.
지태 때문에 무리하게 쏟아 부은 자금도 그러하거니와 이래저래 투자 손실에 따른 부분을 땜빵 하느라 분식 회계까지 손을 댄 상태였다.
그것을 그룹 경영지원실에서 냄새를 맡았고, 현재 은밀하게 내사 진행 중이어서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상태였다.
거기에 요사이 머리를 얹어준 여배우 이지원에게 퍼붓는 돈은 또 어떠한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그것만 해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 고민들이 어느 정도는 해소될 기미가 보이니 임경남이 웃을 여유라도 갖는 것이다.
로컬로 내려주는 오더 한 건당 적어도 30억의 비자금을 손에 쥘 수 있을 터였다.
이렇듯 만만한 몇 군데의 업체 사장들을 만나 딜을 하게 된다면 우선 숨통은 트일 듯했다.
임경남이 다시금 흐뭇한 미소를 입술에 걸고 있을 때, 별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 소리의 주인공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한표 실장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에 그는 곧 들어오라는 대답을 주었다.
“뭐 새로운 소식이라도……?”
자신이 별실을 나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중국 쪽에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본 결과 한지태가 쿤밍공항까지 날아갔다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벌써?”
“운이 좋게도 비행기가 바로바로 연결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럼 루이리를 통해 미얀마로 넘어간 거요?”
“저, 그게…….”
“아직 안 넘어갔다는 겁니까?”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넘어갔는지 아닌지는.”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게?”
임경남이 참다못해 버럭 소리쳤다.
“루이리 국경 검문소를 통과했다는 흔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럼 루이리에서 하루 머무는 건 아냐?”
“그건 좀 더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장님.”
“햐, 이 새끼, 이거!”
임경남은 입술 끝을 한쪽으로 비틀어 올리며 허공에 대고 헛웃음을 토해냈다.
* * *
지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도 없고 녹음마저 짙어서 보통 사람들의 경우엔 몇 번을 와봤어도 어디가 어딘지 구분을 잘 못할 테지만, 최봉준의 빙의로 인해 감각이 남달라진 지태에게는 한번 와본 길은 절대 잊어먹지 않았다.
이곳은 지난번 미얀마에서 김영철과 함께 넘어온 루트였다.
다만 그때와는 지나쳐온 방향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여긴 지난번 루트에서 좀 벗어난 것 같은데?”
“눈썰미가 대단하구만, 기래. 맞아, 옆길로 조금 우회했디. 환한 대낮인데 지난번과 똑같은 방법으로 철조망을 넘을 순 없디 않갔어?”
김영철이 지태의 눈썰미에 적당한 감탄사를 담아 설명해주었다.
“조금만 더 가면 초소가 하나 나올 긴데 두 놈이 경계를 서고 있을 거이야. 우리 둘이 하나씩 처리하고 그리 넘어가자우.”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면.’
지태는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정말 말을 안 해줄 거야?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놈들을 찾아내겠다는 건데?”
김영철은 국경을 넘어가면서 말해주겠다고 길을 서둘렀지만, 지금껏 그 방법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쉬이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자 지태가 이번엔 좀 더 압박하듯 목소리에 힘을 주어 물었다.
흘깃 돌아보며 길게 숨을 내뱉은 김영철이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디, 경호팀 외에 따로 두 명을 더 붙였놨었드랬디.”
서로가 서로를 감시케 만드는 그 옛날 5호감시제 같은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것이 현재 대화의 본질은 아니어서 지태는 말을 아꼈다.
지태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아 김영철은 쓰게 웃었다.
“감시 차원은 아니고 혹시라도 이번 같은 일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함이었디.”
지금 그런 설명이나 듣자는 게 아니다.
지태가 어서 진도를 나가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근데 기습을 당했을 때는 워낙 대비 없이 당한 거라서 걔들이 개입할 여지도 없었다더구만, 기래. 그놈들의 숫자도 50명은 넘어서 어차피 개입해봤자 개죽음이나 당하고 말았겠디.”
“그래서 몰래 놈들의 뒤를 밟은 거다?”
“나 같아도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거이야.”
“그래서 현재 놈들이 있는 곳은?”
“샨 주의 몽마(Mong Ma)! 무세에서 약 15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디.”
“몽마…….”
지태가 되뇌듯 중얼거릴 때 김영철이 옆구리를 살짝 찔러왔다.
“우리가 국경 철책을 넘을 곳은 바로 저기야.”
지태는 김영철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약 칠십 미터 전방에 작은 경비 초소 하나가 보였다.
나뭇가지 등을 이용해 나름 위장을 한다고 꾸며놓긴 했는데 한눈에 봐도 엉성하기만 했다.
“죽이디는 말라. 굳이 문제를 만들어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네, 알간?”
“너나 잘하세요.”
여러 명을 동시에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한 명씩이었다.
그까짓 것쯤은 일도 아니어서 지태는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초소 근처까지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초소 안에서 중국말로 수다를 떠는 경비병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야가 확 트인 환한 대낮이어서 그런지 그들의 경계는 느슨했고 일견 한가롭기까지 했다.
초소에 바짝 접근한 지태와 김영철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구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갈라서며 벽돌 벽에 몸을 갖다 붙였다.
지태와 눈짓을 주고받은 김영철이 바닥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초소 안으로 던져 넣었다.
순간 경비병들은 뜻하지 않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대화를 멈췄다.
그러다가 두 명 중 한 명이 무슨 일인가 하고 초소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를 노려 김영철이 놈의 모가지를 득달같이 낚아챘고, 지태는 안으로 급하게 뛰어들며 나머지 한 녀석의 모가지를 팔로써 강하게 감았다.
이른바 초크 기술이었다.
잠시 거칠게 바동대던 녀석은 곧 정신을 잃고 전신을 축 늘어뜨렸다.
지태가 녀석을 바닥에 눕혀놓고 밖으로 나오자 김영철은 간단한 식사라는 듯 양손을 털고 있었다.
“어서 넘어가자우.”
김영철이 철조망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 * *
무세 시내 외곽에 도착하자 다섯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두 명은 지태도 낯이 익었다.
카친 반군 사령부에서 마주쳤던 군사고문단원들이었다.
“이쪽 세 동무는 양곤에서 데려온 기야. 뭐 얼싸안고 반가움을 표시할 처지도 아니니까네 그쯤만 알아두라.”
김영철이 나머지 세 사람을 그런 식으로 소개했다.
“기나저나 뱃속에 그지 새끼들이 들어있는지 출출하구만, 기래. 시간 좀 있을 때 뭐라도 먹어두자우.”
그렇게 말하는 김영철을 지태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지금 배고픈 것이 대수냐는 눈빛이었다.
“거, 뭐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디 않았네. 뱃속이 든든해야 쫄디 않고 싸우디 않갔어?”
“허!”
지태가 급기야 혀를 찼다.
“비웃디 말라. 시간이 어정쩡해서 그래야. 환한 대낮에 쳐들어가서 뭐 하겠나. 드러내놓고 총알밥 먹을 일 있네?”
생각해보니 그랬다.
김영철은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놈들의 아지트로 들이칠 생각인 모양이었다.
지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일단 먹자, 먹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댔다.”
사실 그 자신도 배가 고팠다.
후안의 납치 소식을 들은 지난 새벽부터 워낙 경황이 없기도 했거니와 그 여파로 입맛도 잃은 까닭에 아침과 점심까지 모두 건너뛰고 말았던 것이다.
지태와 김영철 등은 근처의 식당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지태와 모두는 여러 종류의 음식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 각자 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며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오후 6시.
김영철이 자신의 부하들을 불러 세웠다.
“자, 이제 슬슬 움직여보자우.”
그의 목소리는 저만치 나무 아래에 혼자 떨어져있던 지태에게도 크게 들렸다.
지태가 다가오면서 물었다.
“무기는?”
“무세로 오는 길에 반군 사령부에 들렀다 왔디. 물론 쿤모 선생한테 지금의 상황도 설명해줬고 말이디.”
쿤모 소장에게 상황 설명을 해준 것은 차라리 잘되었다.
그는 지금껏 지태를 오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왜 아직까지 자신의 해외 계좌에 돈이 안 들어왔는지 강한 의구심을 품고 말이다.
아니, 어쩌면 지태에 대한 처리 방안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었을 공산이 컸다.
배신자를 처리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게 무엇이겠는가.
그건 한국으로 암살단을 보낸다거나 그에 버금가는 보복을 꾀하는 일일 것이다.
지태는 잠깐 그런 웃기지도 않는 상상을 하다가 쓴웃음을 뱉은 후 김영철에게 물었다.
“그래서 충분히 챙겨왔어?”
“병력을 지원해 주갔다는 걸 내래 굳이 말렸어.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건 내래 체질에 안 맞거든. 무기와 실탄이나 넉넉히 챙겨주라 그랬디, 뭐.”
김영철은 말을 마친 뒤 한쪽에 주차된 중고 SUV로 앞서 걸어갔다.
그러고는 차량의 뒷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활짝 열린 그 안에는 AK- 47 소총과 권총들, 그리고 수류탄과 심지어 휴대용 대전차 유탄발사기인 RPG- 7까지 가득 쌓여있었다.
“이거는 가급적 쓰지 않는 거이 좋갔디? 요란하게 한판 붙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디.”
김영철이 RPG- 7을 콕콕 찍어대며 씩 웃었다.
물론이다.
가급적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을 것이다.
후안을 납치한 괴한들의 숫자가 50여 명이라고 했다.
그에 반해 자신들은 겨우 7명밖엔 안 되는 인원이므로 정면 승부에서는 어쩌면 벅찰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쪽이 아무리 일당백의 전사들이라 해도 그만큼 후안을 구해내는 시간은 지체될 공산이 컸다.
아니, 그 과정에서 자칫 후안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가급적 정면 돌파 대신 은밀히 침투한 다음 후안을 안전하게 구해내고 볼 일이었다.
“자, 이제 출발하지.”
김영철이 지태를 향해 고갯짓을 하며 재촉했다.
지태는 서둘러 뒷좌석으로 오르고 있는 김영철에게 잠시 눈길을 주다가 결의를 다지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