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실종(3)
아침 7시 30분.
각 사의 사장단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모두 출근을 마쳤다.
지태를 대신해 조현민이 전원 비상소집을 내린 까닭이었다.
소회의실에 모인 그들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침울했다.
뜻하지 않은 불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색들이 역력한 채 지태를 주목하고 있었다.
지태는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듯 아주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현실에 놓여있습니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요.”
“햐, 미치겠네. 그 돈이 어떤 돈이라고.”
이동구 사장이 뜨거운 울화를 담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조하듯 모두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지태가 그런 이동구 사장을 비롯해 여러 사장단의 인사들을 흘깃 쳐다보았다.
지금의 사태를 바라보는 자신과 그들의 시각차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괴한들이 빼앗아간 거액의 달러와 앞으로 치러야할 인질 석방 보석금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반면 자신은 후안의 안위에 맞춰져있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후안의 안위보다는 회사가 입게 될 손실금에 더욱 큰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은 당연할 테니까.
“아무래도 내가 미얀마에 날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어떤 상황인지 파악되지도 않은 마당에 무턱대고 넘어가시겠다는 겁니까? 그건 너무 무모…….”
“이미 결심을 끝낸 사항입니다.”
지태가 조현민의 우려를 끊어내며 자신의 뜻을 확고하게 밝혔다.
“마냥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일단 넘어가 현지의 사정을 살펴보고 그곳에서 답을 구하려 합니다. 그동안 우리 한스는 비상 체제로 돌입합니다. 내가 없는 동안엔 조현민 사장께서 총지휘를 해주세요.”
일단 생각을 굳힌 사항에 대해선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지태였다.
누구보다 그런 지태의 성정을 잘 아는 조현민이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일에 딴죽을 걸어 초조해하고 있는 그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이곳은 걱정하지 마세요.”
“예, 고맙…….”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 찰나 진동으로 전환해둔 지태의 스마트폰이 급하게 떨어댔다.
발신자를 살펴보니 김영철이었다.
지태는 사장단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한산한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가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김영철!”
- 소식 들었디?
김영철은 다짜고짜 물어왔다.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을 지태가 모르고 있을 리 없다는 듯 말이다.
“놈들이 보내온 동영상을 봤어.”
그 대답에 김영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 거이네?
“……!”
이번에는 지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김영철에겐 동영상을 보내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그리 물어온 것일 테지만 지태는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의 부하 네 명이 이미 사살당한 상황이어서 그렇다.
- 우리 아새끼들이래 죄다 죽인 거이네?
“그건 아냐. 후안하고 자네 부하 중 한 명은 아직…….”
- ……!
김영철이 잠시 침묵했다.
억지로 분노를 삼키고 있는 듯했다.
- 우리 아새끼들을 넷이나 죽였다 이거디?
“……!”
- 할 수 없디, 뭐. 그게 전사로 태어난 자들의 운명이 아니갔어. 일 없어야! 한데 동무는 언제쯤 넘어올 거이네?
김영철은 애써 태연한 척했다.
속이야 분노로 활활 타들어가고 있겠지만 되도록 밖으로 표출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지태는 묵직하게 대답을 주었다.
“오늘이라도 당장!”
- 그럼 예전 그 루트로 넘어오라. 내래 루이리에 미리 가서 동무래 기다리고 있갔어.
저번에 귀국할 당시 이용했던 중국 루트를 통해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그래. 가장 빠른 비행기를 알아볼게. 그런데 너무 막연하지 않아? 아무런 단서도 없이 어딜 뒤지고 다닌단 말이야.”
지태가 짙은 안개 속을 걷는 심정으로 웅얼거렸다.
그러자 김영철이 뭔가 희망적인 암시를 던져주었다.
- 지금 상세한 말은 해줄 수 없지만, 방법은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네 걱정하디 말라.
“……?”
- 암튼 최대한 빨리 넘어오라.
뭔가 확실히 단서가 있는 모양이었다.
전화상으로 자신의 모습이 보일 리는 없겠지만, 지태는 기대감에 젖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리에 도착하는 대로 연락하지.”
- 기래, 기러라우. 나도 동무와 얼추 시간을 맞출 수 있갔구만. 내래 지금 만달레이에 와있는데 곧 샨 주의 무세 지역으로 넘어갈 거이야.
“그럼 거기서 보자고.”
지태는 전화를 끊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오전의 싱그러운 태양이 어느새 빌딩 숲 사이를 뚫고 들어와 고개를 번쩍 쳐들고 있었다.
세상은 이렇듯 밝은 태양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지만, 지태의 마음은 먹구름이 가득한 채 곧 소낙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기세였다.
지태는 입술을 깨물며 서둘러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각 사의 사장단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해둔 다음 서둘러 공항으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 * *
임경남은 마른 입맛을 다셨다.
요즘 들어 자꾸만 침이 마르고 오한에 걸린 것처럼 몸이 오슬오슬 떨려왔다.
그러고 보니 얼굴색도 전보다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고단한 업무에 치여 이렇게 된 거라고 착각하겠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임경남은 집무 의자에 걸어놓은 슈트의 안주머니에서 접혀져 있는 은박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알약 하나를 꺼내 입안에 털어놓고 물을 마셨다.
코카인이나 필로폰보다 몇 배는 더 강하다는 알약 형태로 된 신종 마약이었다.
오전 9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임경남은 의자에 등을 깊이 묻은 채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약 기운이 서서히 전신에 퍼져나가는 것을 음미하려는 것이다.
바로 그때 분위기를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임경남이 눈을 감은 채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예!”
짜증이 섞인 음성을 감지했음인가 사장실의 문을 여는 움직임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발자국 소리까지 죽이며 조심스럽게 다가온 걸음걸이가 집무 책상 앞에 멈췄지만, 그때까지도 임경남은 감고 있던 눈을 뜨지 않았다.
다만 짜증을 억누르며 용건을 묻는 태도로 볼 때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을 이미 알고 있다는 투였다.
“뭡니까?”
오한표 실장이 자세를 바로 하며 겨우 대답했다.
“보, 보고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스르르.
그제야 살며시 눈을 뜬 임경남이 오한표 실장을 흘깃 쳐다보았다.
고개를 한번 까닥해 보이는 것으로 어서 보고를 해보라는 사인을 보냈다.
“한지태 건입니다, 사장님.”
“뭔데?”
“DD무역의 이름으로 미얀마에 날아간 오더가 한지태의 것이 확실한 듯합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방금 전 한지태의 이름으로 중국행 항공기 예매가 확인되었습니다. 지난번 귀국할 때와 같은 루트를 이용해 미얀마로 들어가려는 것 같습니다.”
“음.”
임경남이 묵은 신음 소리를 냈다.
어젯밤 늦게, 그리고 지난 새벽에 임경남은 이지원의 오피스텔에서 세 차례에 걸쳐 오한표 실장의 보고를 받았었다.
공교롭게도 처음 두 번의 경우엔 이지원과 뜨거운 정사를 나눌 때였다.
하지만 방해를 받았음에도 임경남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워낙 미얀마의 오더 건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있던 터라 이해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보고 때에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끝내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치나 쪽으로 이동 중이던 물품 수송 행렬의 꼬리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는 보고였다.
부경그룹 지사원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를 밟아갔는데 뜻하지 않은 차량 접촉사고를 내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는 거였다.
얼른 돈 몇 푼을 던져주고 합의를 보려 했지만, 건장한 체격의 두 사내는 한사코 합의 대신 차량의 즉각적인 수리를 요구했다고 했다.
나중에야 그들 두 사람이 수송 행렬의 경호를 맡은 인원들이라는 것을 알아챘지만 그때는 이미 수송 행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난 후라는 보고였었다.
“한지태 그 새끼가 미얀마에 넘어간다는 건 필시 그쪽에서 뭔가 안 좋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증거 아니겠소?”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더가 잘 마무리되었다면 놈이 미얀마로 굳이 넘어갈 필요가 없겠지요.”
“자세히 좀 알아봐요.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라인을 총동원해서라도. 그리고…….”
생각해 보니 돌연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임경남은 말을 끊고는 입바람을 머리 위로 훅 불어댄 후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새벽에 보고를 할 때처럼 그런 헛소리나 늘어놓았다간 전부 다 소환해서 모가지를 날려버린다, 그러시고! 알았소?”
“예, 예!”
오한표 실장은 고개가 바닥에 닿을 것처럼 깊이 숙여보이고는 서둘러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에이, 빌어먹을 인간들!”
임경남은 괜히 문 쪽을 향해 눈을 흘기고는 퍼뜩 두 눈을 감았다.
열을 내서 그런지 아까 입안에 털어 넣었던 약 기운이 훅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러자 머리는 허공으로 붕 뜬 기분이었고, 반면에 몸 전체는 나른히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 * *
지태는 충칭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충칭공항에서 내린 지태는 곧 쿤밍공항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탔다.
운이 좋아서인지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쿤밍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탄 지태는 루이리로 이동 중에 김영철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는 두 시간 전에 무세에 도착했다면서 현재 루이리로 넘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지태는 좀 더 속도를 올리라며 택시 기사를 재촉했다.
“이거 상황이 아주 개같이 됐어.”
루이리에 도착해 마침내 조우한 김영철이 지태를 보자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을 찾았다는 건 뭐였는데?”
지태가 쓴맛을 다시면서 물었다.
“기건 일단 국경을 넘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디.”
김영철이 바쁘게 앞장서 갔고, 지태가 빤히 바라보다가 그 뒤를 곧바로 따랐다.
* * *
임경남은 부경물산 부근에 위치한 호텔 레스토랑의 별실에 있었다.
벌써 오후 3시가 가까워오는 시각이다.
늦은 점심이나 먹으려고 업무 시간임에도 레스토랑 별실에 앉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지태와 관련한 보고를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한가히 식사를 즐길 여유도 없었지만, 이렇듯 일부러 시간을 낸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바로 돈과 관련된 일이었다.
임경남은 앞에 앉아있는 중년 사내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러자 중년 사내는 이 자리에 불러준 것만으로도 그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자동으로 조아렸다.
“김 사장, 내 말 잘 알아들었지요?”
“아, 그럼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 머릿속에 새겨두었습니다.”
“그동안 지켜봤어요. 우리 부경물산의 오더를 실망시키지 않고 잘 진행하더군요. 나도 꽤나 만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래서 오늘 특별히 로컬 부분에 대해 신경을 쓴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잘하겠습니다.”
중년 사내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임경남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