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조여 오는 올가미(3)
미얀마 카친 반군 측에 보낼 2차 오더 물품의 항공 이송 날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미 3주 전에 국적 항공사 한곳과 전세기 계약을 합리적으로 마친 상황이어서 통관 절차가 끝나면 그대로 옮겨 싣기만 하면 된다.
지태는 오전 사장단 회의 직후 곧바로 후안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동안 몇 차례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현지 사정이 바뀌었다는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못 믿어서가 아니라 되도록 내부에서부터 입단속을 하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후안은 물품의 운송을 아직도 선박으로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지태는 후안에게 전세기가 만달레이 공항에 도착하기 이틀 전 미얀마로 넘어가라고 했다.
그곳에서 김영철 등과 만나서 운송 과정에 대해 미리 논의를 하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물론 그 이전에 김영철에게는 아론을 시켜 자세한 일정과 운송 루트 등을 통고케 할 생각이었다.
점심 식사 후여서 그런지 몸이 노곤한 느낌이었다.
지태는 집무 책상에 앉아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때였다.
똑똑똑.
대표실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
지태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으며 짧게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고개부터 들이민 것은 박찬익 팀장이었다.
“어서 오세요.”
“별로 바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박찬익 팀장이 농담처럼 건넨 인사에 지태가 픽 웃었다.
말투며 행동거지가 너무도 많이 바뀐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형님, 둘이 있을 땐 편하게 하시래도 그러신다.”
“자꾸 길을 들여야죠. 그래야 공적인 자리에서도 실수를 안 합니다.”
“어이쿠!”
지태가 풀썩 웃고는 집무 책상을 돌아서 나왔다.
“앉으세요.”
“예.”
그러나 대답하며 응접 소파에 앉는 박찬익 팀장의 표정이 돌연 어두워졌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지태가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자 박찬익 팀장이 쓰게 웃었다.
“다모아 매장에 참여하고 있는 몇몇 업체들이 갑자기 계약을 취소하자고 나오네요.”
“왜요? 우리한테 무슨 불만이나 서운한 게 있답니까?”
“모르겠어요. 하나같이 이유에 대해선 말을 안 해요. 그냥 일방적으로 취소하겠다고만 합니다. 계약 위반에 따른 위약금은 자기네가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면서…….”
“몇 군데인데요?”
“현재까지 열네 곳입니다.”
“갑자기 그런다……?”
지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박찬익 팀장이 미처 못다 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래서 현재 다모아에 참여하고 있는 전 업체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봤어요.”
“……!”
“그랬더니 그 열네 곳 외에도 열 곳 남짓한 곳에서 동일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누군가 태클을 걸어오는 게 맞네요. 귀가 엷은 업체들만 골라서 작업을 하는 거 같은데, 맞죠?”
박찬익 팀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태를 똑바로 보는 눈빛이 상황을 아주 정확히 보았다는 말이었다.
“이놈의 전쟁이 언제까지 지속되려고…….”
지태가 쓰게 웃었다.
자신이 일으키는 사업마다 방해를 해오는 자가 누구겠는가.
이번에도 퍼뜩 떠오른 인물은 바로 임경남이었다.
그런 악연을 알지 못하는 박찬익 팀장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누구 짚이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시기하는 사람이겠죠. 우리가 잘되는 게 배 아파서 두 눈 뜨고 못 보는 사람!”
지태는 굳이 임경남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았다.
자신과 임경남 사이의 사적인 감정과 원한을 박찬익 팀장이 알아봤자 별로 득이 될 게 없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취소 의사를 밝혀왔거나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많은 업체들이 빠져나가게 되면 매장 운영이 어려울 정돕니까?”
“뭐 그 정도까지 타격을 입을 정도는 아닌데 구색을 갖춰야 하는 품목 면에서는 좀 그렇습니다.”
“팀장님이 더욱 애써 주세요. 새로 끌어들일 업체나 욕심나는 상품들은 없는지 개발에도 좀 더 신경을 많이 써주시고.”
“물론이지요. 신경 쓰이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팀장님. 아니, 이제 며칠 후면 다모아 대표이사로 영전하실 분인데 미리 사장님이라고 하죠.”
“어이쿠, 이거 참! 아무 생각 없이 끌려와서 뜻하지 않게 분에 넘치는 감투까지 쓰게 됐습니다.”
“원망하는 건 아니죠?”
“원망이라뇨. 오히려 내 오랜 방랑벽을 없애주었다고 감사를 드려야 할 판인데.”
박찬익 팀장의 개구쟁이 같은 웃음에 지태가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 * *
한눈에도 럭셔리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건물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어둠을 밀어내는 너무 요란하지 않은 조명 빛이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최상류층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멤버십 텐프로 살롱이었다.
차에서 내린 오한표 실장이 생각 없이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때 옆에서 물기 촉촉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실장님!”
오한표 실장이 돌아보니 투피스 정장 차림의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밝게 웃고 있었다.
실장을 보좌하는 열 명쯤 되는 새끼 마담들 중 한 명인데 오한표 실장도 낯이 많이 익은 여자였다.
임경남이 손님 접대를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몇 번 그 자리에 배석한 적이 있는 것이다.
“오랜만이군. 우리 사장님은?”
“기다리고 계세요. 바로 모실게요.”
새끼 마담이 앞장을 섰고, 오한표 실장이 안내를 받으며 그 뒤를 따랐다.
“어서 와요, 오 실장.”
안내받아 들어간 VVIP룸의 상석에서 아가씨를 옆에 끼고 앉아있던 임경남이 손짓으로 반겼다.
누군가를 접대하는 자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오한표 실장이 반 타원형으로 된 소파 중간쯤에 자리를 잡자 임경남은 좀 더 가까이 오라며 이번엔 고갯짓을 했다.
“혼자 계셨습니까?”
“그래요. 나 혼잡니다. 오늘 이 자리의 주빈은 바로 오 실장이니까.”
“옛?”
“뭘 그리 놀라시나. 내가 그동안 얼마나 못되게 굴었습니까. 그래서 위로 차원에서 모신 겁니다.”
헐! 살다보니 이런 골 때리는 날도 다 있네.
오한표 실장은 속으로 픽 웃었지만, 겉으로는 황송해 죽겠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어이쿠,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두 사람의 나이나 직위, 그딴 계급장 다 떼고 편하게 한잔하십시다.”
임경남이 사람 좋은 얼굴로 호탕하게 웃으며 술병을 들어 오한표 실장에게 한 잔 가득 따라주었다.
고급 양주 한 병이 금세 바닥을 보일 즈음 임경남이 문득 흘리는 말처럼 물었다.
“몇 군데나 넘어왔습니까?”
“……?”
뜬금없는 물음에 하마터면 되물을 뻔했던 오한표 실장은 금방 그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아, 다모아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거기. 몇 놈이나 넘어온 겁니까?”
“생각보다 많진 않습니다. 다모아하고의 계약 조건이 워낙 좋아서인지 회유와 협박이 잘 먹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오한표 실장은 말을 하다 말고 끊었다.
불콰해진 임경남의 얼굴이 심하게 실룩거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로하는 차원에서 부른 자리라고 여긴 까닭인지 임경남은 곧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 근육을 풀었다.
“보다 더 매서운 채찍과 아주 달콤해 미칠 것 같은 당근을 제시해서 잘 구슬려 봐요. 난 무조건 오 실장만 믿고 있을 테니.”
믿긴 개뿔.
입에 침이나 발라라, 이 새꺄.
오한표 실장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속으로는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바로 그때였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슈트 안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눈치 없이 울렸다.
식겁했다.
이것을 꼬투리 삼아 또 무슨 불똥이 떨어질까.
오한표 실장은 룸에 들어오기 전 미리 모드를 진동으로 해두지 않은 자신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죄송합니다. 진동으로 해둔다는 것이…….”
어라?
그런데 임경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괜찮아요. 어서 받아 봐요. 이 시간에 전화가 올 정도면 아무래도 급한 용무인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아마도 제 집사람일 겁니…….”
거듭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스마트폰을 꺼내들던 오한표 실장이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내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예, 오한푭니다. 옛, 뭐라고? 응, 응! 좀 더 상세히 말해 봐요. 응, 응…….”
어떤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오한표 실장은 잠시 임경남의 존재를 잊은 듯 보였다.
그렇게 약 오 분 정도를 통화하던 오한표 실장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통화를 마친 후에도 임경남을 의식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조금 전의 대화를 되뇌는 듯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임경남이 물었다.
“뭐, 안 좋은 소식이라도……?”
“옛? 아, 죄송합니다.”
뒤늦게 현실을 자각한 오한표 실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관세청에 있는 부경 장학생 출신인데 제가 지시를 해둔 게 있었습니다. 미얀마 관련해서 그 어떤 소소한 것이라도 있으면 즉각 연락을 달라고 말입니다.”
“아, 그니까!”
잡설은 빼고 본론만 말하라는 듯 임경남이 재촉했다.
“낼모레 미얀마로 떠나는 전세기가 있다고 합니다, 사장님.”
“한지태 그 새끼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럼 어딘데?”
“DD상사에서 띄우는 전세기라고 했습니다.”
“DD?”
임경남이 처음 듣는 업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지태가 세운 페이퍼컴퍼니였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것은 오한표 실장도 마찬가지여서 이 자리에서 당장 답을 주기는 어려웠다.
“곧 알아보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벌떡 박차고 나갈 듯하자 임경남이 인상을 썼다.
“이 시간에 무슨! 오늘은 그냥 술이나 들어요. 내일 출근해서 알아보는 방향으로 하시고.”
“예에.”
오한표 실장이 마지못해 대답은 했지만, 이런 분위기로 어디 술맛이나 나겠는가.
그랬다.
임경남의 표정이나 분위기는 벌써 딴 세상에 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파트너 아가씨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그의 오른손은 그녀의 가슴을 본능적으로 주무르고 있었다.
* * *
지태는 모처럼 어머니를 모시고 외식을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음을 사과했다.
“얘, 그런 말하지 마. 난 말이야 요즘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야. 세상에 이보다도 더 멋진 아들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난 세상에서 우리 아들이 제일 멋져.”
정신없는 일상에 몸은 비록 고달팠지만 어머니의 이 한마디가 산삼 열 뿌리보다도 더 힘이 되었다.
그리고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어머니의 표정에서 지태는 보람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간단한 티타임까지 함께한 지태는 제 방으로 들어왔다.
띠리리리릿, 띠리리리릿.
침대에 누워 노트북을 배 위에 올려놓고 이것저것을 살펴보던 그때, 한쪽에 놓아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후안이었다.
지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얀마에 도착한 후안과는 세 시간 전에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었다.
낼모레 물품을 실은 전세기가 날아갈 것이어서 지태의 전화를 받자마자 후안은 미얀마로 곧장 넘어간 것이다.
내일 아론과 김영철을 만나기로 돼있어서 오늘은 그리 급한 용무가 없을 거였다.
그런데 다시 연락이 온 것이다.
지태는 일단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어, 후안!”
-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 드린 건 아닙니까?
“아니야, 괜찮아. 여긴 아직 밤 11시도 안 됐어.”
미얀마와는 2시간 30분의 시차가 난다.
만달레이는 현재 저녁 8시를 조금 넘겼을 시간이었다.
“왜, 혼자 있기가 적적해?”
지태가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평소라면 원래 무뚝뚝하긴 해도 어설프게나마 농담으로 응수를 해주던 후안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분위기도 그렇고 대답도 시원찮은 방향으로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