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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83화 (183/272)

183화. 조여 오는 올가미(1)

“예, 형님이 지금 머릿속에 떠올린 그곳이 맞아요. DD상사!”

“헐!”

조현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지만 부정적인 측면은 아니었다.

곧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햐, 선견지명이라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이거 제대로 한번 써먹겠는걸!”

DD상사는 돈두파가 운영하고 있는 대부업체, 즉 하나 파이낸스의 사무실 한구석을 빌려 설립해놓은 법인이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외부의 방해 공작을 대비함이었다.

물론 그 외부의 방해 공작이라는 게 100% 임경남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암튼 한스무역을 통한 정상적인 거래가 지장을 받거나 무산될 처지에 놓였을 때 써먹기 위함이었다.

하나 파이낸스의 여직원 명의를 빌려 설립해놓은 그야말로 페이퍼컴퍼니였다.

“아무리 정보 라인을 두루 갖춘 임경남이나 부경그룹이라 해도 전혀 감지하지 못할 겁니다.”

“당연하지. 그놈이 뭐 귀신이라도 되냐. 햐, 이거 정말 신의 한 수다. 정말이지 예술이야.”

조현민이 환하게 웃으며 엄지 척을 해보였다.

지태가 입으로만 웃어주고는 곧 정색하며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뭐가 또?”

“이번엔 인상 쓸 일이 아니에요, 형님.”

“나쁜 게 아니야? 그럼 좋은 거?”

“예, 좋은 거!”

“뭔데?”

“다름이 아니고 다모아 말입니다. 홀딩스에서 관리하던 걸 이참에 따로 독립시킵시다.”

“독립이라……. 하긴 관리 주체를 명확히 해서 나쁠 건 없지. 전문 경영인이 책임지고 운영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해.”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조현민이 망설임 없이 끄덕였다.

그러면서 덧붙여 물었다.

“대표이사로 누구 생각해둔 사람은 있어?”

“박찬익 팀장은 어때요?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잘하지 않아요?”

“박 팀장?”

되묻던 조현민이 털털하게 웃었다.

처음에 느꼈던 그의 인상이며 주워들었던 여러 가지 기행들에 얽힌 선입견 때문이었다.

“하긴 사람 많이 됐더라. 그 사람을 영입하기 전에 들었던 소문만 아니라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니까. 뭐, 그 사람이라면 나도 오케이! 능력이야 이미 검증된 바니까.”

“민성이가 아무나 소개해줬겠어요. 이런 놀라운 면모를 지녔으니까 나더러 기를 쓰고 잡으라고 했겠죠.”

“그래, 나도 인정한다니까!”

“근데 왜 그래요? 인정한다는 목소리에 왠지 질투가 섞여 있는데?”

“어허, 까분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경쾌한 웃음을 쏟아냈다.

고민스러웠던 부분이 한 껍질 벗겨지자 조금은 가뿐한 표정들이었다.

* * *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지역구 사무실로 돌아가던 오신환 의원에게 아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오지용의 목소리에 오신환 의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마트폰을 귀에 가까이 댔다.

“무슨 일이냐?”

- 지금 시간 있으세요?

“바쁠 건 없다만, 왜?”

오지용이 일가를 이루어 분가하지 않았으니 저녁에 귀가해서 보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보자는 식으로 묻는다는 것이 오신환 의원은 왠지 수상쩍기만 했다.

- 그냥 모처럼 아버지와 술 한 잔하고 싶어서요.

“술을? 강의는 다 마쳤고?”

- 예, 아버지. 퇴근하는 길입니다.

“음!”

묵직한 신음 소리를 내던 오신환 의원은 곧 오지용더러 지역구사무실 근처로 오도록 했다.

약 한 시간 뒤에 부자는 지역구사무실 근처 일식집에서 만났다.

오지용의 낯빛은 아까 전화 목소리보다 더 어둡고 무거워 보였다.

오신환 의원은 묵묵히 술병을 들어 아들의 잔을 채워주었다.

“자, 한 잔 들어라.”

잔을 권하자 양손으로 잔을 받쳐 든 오지용이 가볍게 부딪치고는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자, 이제 말해봐. 그냥 이 아비와 술 한잔하자고 청했을 리는 없고. 뭐냐, 무슨 일이야?”

“……!”

“어허, 무슨 일이냐니까 그런다.”

할 말이 잔뜩 어린 얼굴인데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머뭇거리는 오지용에게 오신환 의원은 아비의 따뜻한 정을 담아 물었다.

“자존심이 무지 상합니다, 아버지.”

“감히 금쪽같은 내 아들의 자존심을 누가 건드린 건데?”

“……!”

“설마 지은이냐? 며칠 전 만났을 때 너한테 뭐라고 안 좋은 소릴 했어?”

“비교를 당했습니다.”

“……?”

“어느 정도 레벨이 비슷하거나 저보다 나은 놈과 비교를 당했다면 이처럼 비참하지는 않을 겁니다. 근데…….”

오지용은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미는 듯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꽉 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놈인데?”

“한지태라는 놈입니다.”

“뭐, 한지태?”

오신환 의원이 흠칫 놀라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오지용의 눈빛도 따라서 변했다.

지태의 이름을 듣자 귀에 익은 듯 놀라는 아버지의 표정이 왠지 심상치 않아 보인 까닭이다.

“놈을 아세요?”

“얼마 전에 들었다. 작은 무역회사로 시작해 짧은 기간에 벌써 계열 회사를 세 개씩이나 이끌 만큼 꽤 전도유망한 사업가라고. 그리고…….”

오신환 의원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부경그룹, 아니 임경남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원수처럼 이를 갈고 있는 녀석이라는 것도.”

“그놈이 얼마 전까지 지은이의 남자 친구였습니다. 아니, 지금도 지은이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새끼죠.”

“대 부경그룹의 외동딸을 어디 넘볼 깜이라도 된다더냐, 그놈이?”

“그러니 제 자존심이 으깨진다는 겁니다. 정말 미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오지용은 온 얼굴 근육을 구기며 바닥이 꺼질 듯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오신환 의원은 이를 악문 채 아프게 쳐다보았다.

* * *

임경남이 집무 책상에 앉아 문서를 훑어보고 있다.

서류를 넘길 때마다 점점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부들부들 떨었다.

조금 전 오한표 실장이 들고 온 거였는데, 다모아 매장의 최근 동향이 담긴 보고서였다.

대형 가전을 위주로 하는 전문 매장도 아니고 소형 가전 몇 개 가져다가 얼마나 제대로 된 매출을 올리겠느냐며 조소를 퍼부었던 임경남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수준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거의 대박 수준이라고 봐야 옳았다.

임경남은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졌다.

흩뿌려진 문서들이 사방으로 날렸다.

오한표 실장이 급히 주우려하는데 임경남이 말리듯 그의 이름을 퉁명하게 불러댔다.

“이봐요, 오 실장!”

“예, 사장님.”

“이 허접한 곳에서 이렇게 대박을 치는 이유가 뭐요?”

“가, 가격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박리다매를 목적으로 아주 파격적인 가격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다모아 협력사 내지는 참여 업체는 몇이나 되고?”

“현재까지 참여 업체 250여 곳에 납품하는 제품 수가 약 500여 가지 정도 되는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끄응.”

임경남의 입술을 뚫고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박살을 내버려야겠는데…….”

“……!”

“그 엿 같은 매장을 엎어버릴 만한 좋은 수가 없겠느냐 말이야!”

막힌 속을 뚫어줄 만한 시원한 대꾸가 즉각 나오지 않자 임경남이 버럭 소리쳤다.

“저, 그것이……. 죄송합니다.”

자신이 무슨 제갈공명도 아니고 이 자리에서 당장 어떤 좋은 꾀를 만들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오한표 실장은 속으로는 절로 욕이 튀어나오면서도 겉으로는 몹시 죄송해 죽겠다는 듯 조아렸다.

“에잇, 썅!”

임경남은 이마 위로 입바람을 훅 불어제쳤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오한표 실장을 올려다보았다.

“오 실장!”

“옛? 아, 예!”

“참여하고 있는 업체들을 한번 접촉해 봐요. 우리가 힘으로 누르면 깨갱하고 먹힐 만한 곳들, 그리고 회유하면 대가리 숙이고 들어올 만한 곳들을 위주로.”

“아, 예! 그러자면 이쪽에서도 뭔가 당근을 제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까지 내가 손수 입에 떠 넣어줘야 해? 가령 우리 물산에서 수출을 대행해주겠다던가, 아니면 판로를 열어주겠다던가, 뭐든 방법을 찾아보란 말이오!”

“잘 알겠습니다.”

오한표 실장은 임경남의 입에서 또 무슨 벼락이 내려칠지를 몰라 서둘러 대답했다.

임경남은 그런 오한표 실장을 향해 더는 보기 싫다는 듯 턱짓을 해댔다.

오한표 실장이 뜨거운 물속에서 방금 건져낸 시래기처럼 축 늘어진 모습으로 사장실을 나갔다.

그때였다.

띠리리리릿, 띠리리리릿.

책상 위 노트북 옆에 놓아둔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시발, 누구야!”

짜증스럽게 스마트폰을 집어든 임경남은 순간 화들짝 놀랐다.

액정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은 임상만 회장이었다.

“예, 아버, 회장님!”

임경남은 엉겁결에 아버지라고 부르려다가 얼른 회장님으로 호칭을 바꿨다.

못마땅한 헛기침 뒤로 임상만 회장의 무뚝뚝하고도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당장 튀어와!

그뿐이었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임경남은 목을 조여 오는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 * *

“왔으면 올라오지, 왜?”

지태가 스마트폰에 대고 웃음기 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돈두의 전화였다.

회사 근처를 지나가는 길에 그냥 한번 연락을 한 거라고 핑계를 댔지만, 그건 아무래도 거짓말 같았다.

무슨 할 말이 있어 일부러 찾아온 듯했다.

- 건달이 왔다 갔다 하면 이미지 나빠지잖아.

“애들만 떼어놓고 다니면 널 건달로 볼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괜찮으니까 어서 올라와.”

- 알았다. 근데 첫 방문인데 두루마리휴지라도 사갈까?

“어디 집들이 왔냐? 그냥 올라와.”

이돈두는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흐헤헤 웃고는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돈두와 윤학수는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홀딩스 지태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어서 와!”

“아, 시발. 졸라 멋진데!”

지태가 웃는 낯꽃으로 반기자 이돈두는 대표실을 휘둘러보며 약간은 오버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발이 뭐냐, 시발이! 하여간 나잇값 못하고!”

지태가 픽 웃으며 손으로 응접 소파를 가리켰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어, 그래. 학수도 어서 와. 회사가 제법 그럴싸해 보이지?”

“멋지십니다, 형님.”

“고맙네! 자, 앉지.”

지태는 윤학수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지나가다가 들렸다는 건 아무래도 사기 같고. 진짜 어쩐 일이야?”

“티 많이 났냐?”

이돈두가 멋쩍게 웃었다.

“넌 건달이지 사기꾼이 아니잖아. 너무 발연기였어.”

“문득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해도 안 믿을래?”

“낯간지러운 소리 그만하고, 어서!”

지태는 미소를 담았지만, 이제 그만 용건을 말하라는 듯 단호하게 잘랐다.

그러자 장난기가 서려있던 이돈두의 표정이 금세 변했다.

정색하며 분위기를 잡는 폼이 어쩐지 수상해 보였다.

“사실은 몇 군데 돌아보고 왔다.”

“어딜?”

“타워파 나와바리.”

“……?”

지태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조직 간에 전쟁을 치를 것이 아니라면 라이벌 조직의 구역을 일부러 찾아가 얼씬거릴 이유가 없었다.

지태가 수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이돈두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아냐. 우리 애들한테 들은 바도 있고 해서 그냥 한 바퀴 돌아본 거다.”

지태는 이제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얼마 전부터 타워파 대가리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놈들이 관리하는 주요 업장에도 피라미들 몇몇만 남겨놓고는 감쪽같이 증발해버렸다는 거다. 간부급들 모두 다!”

“……!”

“럭키문에도 가봤더니 거기도 마찬가지더라고. 밑에서 일하는 애들의 움직임도 왠지 뒤숭숭한 분위기였고 말이지.”

“음!”

지태는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문득 강성원이 떠올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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