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불길한 그림자(4)
아직 2차 오더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부경 측에서 아론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면 AR컴퍼니를 통해 오더를 받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한다.
비록 신용장을 오픈해야 할 상황은 아니지만 오퍼도 없는 곳에 무턱대고 물건을 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제 아론 씨가 전면에 나서지 못하게 됐다는 얘긴데, 그럼 구매자도 없이 어떻게 물건을 보냅니까, 우리는?”
지태가 실질적인 고민을 먼저 털어놓았다.
그러자 이 와중에도 아론은 크게 웃었다.
- 내 주변과 지인들을 몽땅 털어도 먼지 한 점 나오지 않을 아주 깨끗한 대리인을 내세워야겠죠.
목소리를 보아 이미 그에 대한 대비를 해둔 것 같았다.
- 이럴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둔 페이퍼컴퍼니를 전면에 내세울 겁니다.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을 대표로 내세웠으니까 전혀 걱정할 것 없어요!
“그건 잘됐군요. 그렇담 나 역시 한스무역이 아닌 우리와 전혀 무관한 에이전시 한곳을 전면에 내세워야겠군요. 부경의 감시는 한국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진 않을 테니까.”
- 오케이. 바로 그겁니다, 한!
이제 아론의 목소리는 한결 밝아져 있었다.
탕 마이의 수배 때문에 한껏 흥분돼있던 좀 전과는 사뭇 달랐다.
반면에 지태의 마음은 점차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털어내려 하면 할수록 더욱 악착같이 엉겨오는 알 수 없는 불길한 그림자 때문이었다.
* * *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 뜻하지 않은 호출에 지은은 왠지 기분이 찜찜했다.
회장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갑자기 자신을 부른 임상만 회장의 의중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봤다.
그러나 해답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띠잉.
도착했다는 소리에 고개를 든 지은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비서실 직원들은 눈이 마주치는 순서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해왔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웨이브가 살짝 안으로 말려 들어간 긴 단발머리의 여비서가 웃음 근육을 총동원해 밝은 목소리를 냈다.
아직 여러 의구심에 마음이 무겁던 지은이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회장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
여비서가 노크를 하자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 임상만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여보내.
지은이 들어섰다.
집무 책상이 아닌 소파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임상만 회장이 고개만 살짝 들어 지은을 보고는 턱짓으로 이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
불렀으면 이렇다 저렇다 무슨 말이라도 할 것이지 자신을 꿰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지은이 헛기침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임상만 회장은 그녀와 비슷한 무게의 헛기침을 내뱉고는 무심한 척 툭 던져왔다.
“오늘 퇴근 후에 선약 있는 거 아니지?”
지은이 그런 임상만 회장을 감정과 어떤 표정 하나 없이 바라보았다.
보디가드라는 명목 아래 건장한 남자들 넷으로 하여금 밀착 감시케 해놓고 퇴근 후 선약 여부를 물어오다니.
지은의 입가에 조소가 살짝 걸리다가 사라졌다.
임상만 회장이 비로소 고개를 들어 지은을 쳐다보았다.
“없다면 가서 외출준비를 하고 있어라. 좀 있다가 나하고 갈 데가 있다.”
“어딜요?”
“저녁 식사 자리야. 만찬에 나오는 사람은 가서 보면 알 것이고.”
완전히 일방적이었다.
독재도 이런 독재가 또 있을까 싶다.
임상만 회장은 이제 더는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다시 서류에 눈을 돌렸다.
“허!”
지은은 짜증이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임상만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다시금 턱짓으로 그만 나가보라는 사인을 보냈다.
지은이 그런 임상만 회장을 잠시 쏘아보다가 이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에게 다짐한 바가 있고 목표가 있다.
지은은 그것에 도달할 때까지는 일단 아버지의 명에 무조건 따라줄 생각이었다.
그게 독재든 억압이든 일방적이든.
‘지태 씨! 어서 쑥쑥 커. 마음껏 힘을 키워서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건해져야 돼.’
지은은 이를 악물며 돌아섰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그제야 슬며시 고개를 치켜든 임상만 회장이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 * *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나올 때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었다.
지은은 약속 장소인 호텔 레스토랑에 나타난 인물들의 면면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그 주인공은 오신환 의원과 그의 아들인 오지용인 까닭이다.
임상만 회장은 이 자리가 최근에 서울 명문 사립대학의 조교수로 임용된 오지용을 축하해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지은은 알고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상 내세운 핑계일 뿐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임상만 회장과 오신환 의원은 주문한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둘이서만 따로 나눌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거였다.
“이거 괜히 또 내가 미안해지네. 오늘도 억지로 이끌려 나왔지?”
두 사람이 자리를 뜨고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먼저 입을 연 것은 오지용이었다.
지은이 쓰게 웃었다.
“아니! 자발적으로 나왔어.”
흠칫.
오지용은 생각지도 못한 지은의 반응에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 그거 진심이야?”
떨리는 목소리엔 어떤 흥분과 함께 기대감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러자 지은이 풀썩 웃었다.
“말한 그대로야. 아빠 말에 거부감 없이 내 발로 따라온 거야.”
오지용의 입술이 제 스스로도 조절이 안 될 만큼 떡 벌어졌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 그 말인즉슨……?”
“아니!”
단호했다.
웃음기를 띤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지은의 그 한마디는 한껏 달아오른 오지용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 것으로 충분했다.
오지용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게 무슨?”
“자발적으로 나오긴 했지만,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
“그니까 오해하지 마. 난 아빠와 영양가 없는 소모전으로 힘을 빼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적어도 지금 당장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면 나중엔 다시 붙어보겠다는 거야? 힘을 비축해서?”
“오빠 맘대로 생각해.”
“무엇을 위해서? 혹……?”
“그래. 오빠가 짐작하는 바로 그거야.”
‘이, 이런!’
오지용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것은 자존심에 상처를 낸 정도가 아니라 그 자신을 완전히 찢어발기는 것에 다름없었다.
“한지태, 그 새끼가 도대체 얼마나 잘난 놈이기에!”
오지용은 분노를 담은 벌게진 낯빛으로 지은을 쏘아보았다.
* * *
“지은 양이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임 회장님.”
오신환 의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박혀있다.
임상만 회장이 소리 없이 입술로만 웃었다.
“이제 철이 들어간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나이가 나이인 만큼.”
호텔을 나와 인근에 위치한 한정식 전문 식당이었다.
신선로에서는 탕이 끓고 있으며 각종 요리와 반찬들이 널따란 교자상에 가득 차려져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머잖아 진짜 사돈지간이 되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의 바람도 그리 간절한 것을요. 오 의원께서 청와대의 주인이 되는 날, 축하 선물로 그것을 떡하니 안겨드렸으면 합니다.”
임상만 회장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반면에 오신환 의원의 입가엔 어색한 미소가 흘렀다.
사돈이 될 시점을 자신이 청와대 주인이 되는 날로 못 박는다는 것은 만일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경우 지금의 약속을 철회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오신환 의원이 헛기침을 하며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텁텁한 입술을 적셨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임상만 회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참, 요즘 미얀마 쪽에서 부경물산 쪽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면서요?”
“……?”
“지사 직원 두 명이 라카인 주에서 납치도 당했고. 아, 거기가 얼마 전 국제적으로 논란이 됐던 로힝야족에 대한 인종 청소로 시끄럽던 곳 아닙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임상만 회장이 두 눈을 치켜떴다.
보고를 받고는 그 즉시 미얀마 당국은 물론 국내 언론에도 손을 써서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게 틀어막았던 것이다.
“하하. 모르셨습니까? 제가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공안부 검사였다는 것을요. 그리고 한때는 국정원에 파견 검사로 나갔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 그때는 물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이니까 안기부 시절입니다.”
“그럼 국정원에서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요즘 국정원은 댓글이나 달고 선거 개입이나 하는 게 고유 업무냐고 욕을 얻어먹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내 관할이지요. 해외 공작팀은 나름 열심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허, 이거 참!”
“부경물산이면 임경남 군이 관리하는 곳이지요? 암튼 부쩍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임상만 회장이 입술을 꾹 닫은 채 콧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 사람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뭔가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 훤히 알고 있는 듯 보여서 일단 숨을 고르자는 측면도 있었다.
그런 임상만의 생각을 읽은 듯 오신환 의원이 먼저 자신이 들고 있는 패를 까보였다.
“한지태라는 친구가 누굽니까? 혹시 부경물산의 라이벌 기업입니까?”
“라이벌은 무슨. 그런데 바쁘게 움직이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되묻는 임상만 회장을 오신환 의원이 빤히 쳐다보았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지를 파악하려는 눈빛이었다.
“허, 이거 보고를 못 받으셨나 보군요.”
포장된 표정이 아니라 진짜로 굳어져있는 임상만 회장의 모습에서 오신환 의원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매우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괜히 긁어 부스럼이나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 *
볕이 제법 따가웠다.
여름의 초입에 들기 직전인 5월 말이다.
도심의 정오를 뜨겁게 달구는 햇볕은 벌써부터 그늘을 찾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빌딩 옥상이었다.
조경 차원에서 옥상 한쪽에 화단을 꾸미고 나무 몇 그루를 심어 놨지만 그늘을 피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지태는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조현민을 옥상으로 불렀다.
답답한 사무실보다는 사방이 확 트인 공간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밥 먹은 거 소화도 안 되게 왜 갑자기 분위기는 잡고 그래?”
불러놓고는 아무 말도 없이 8, 90년대 홍콩 느와르의 주인공처럼 분위기만 잡고 있는 지태를 보며 조현민이 농담을 던졌다.
먼발치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지태가 돌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솔직히 네놈이 무게 잡고 있으면 난 괜히 불안한 마음부터 생겨!”
지태의 웃는 모습에 조현민은 의구심을 풀지 않고 말을 이었다.
“뭔데 그래?”
“미얀마 건 말입니다.”
“반군 측의 오더?”
조현민이 되묻자 지태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왜?”
“아무래도 로컬로 돌려야 할 것 같아요, 형님.”
“웬 뜬금없는 소리? 어렵게 따낸 것도 따낸 것이지만, 이게 어디 소문내면서 거래할 오더야?”
“그게 사실은 말입니다…….”
쓰게 입맛을 다신 후 지태는 미얀마의 현지 사정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설명을 듣고 난 조현민이 허공에 대고 혀를 찼다.
“허! 요 며칠 왠지 모르게 내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가슴이 괜히 콩닥콩닥 뛴다 했더니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그랬나 보네.”
“묘사가 죽이네, 우리 형님!”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방안은 있어?”
“그래서 로컬로 돌리자고 했잖아요.”
“그니까 어디로 로컬을 돌린단 말……. 혹시,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