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81화 (181/272)

181화. 불길한 그림자(3)

지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페이스대로 말을 이어갔다.

“너희 애들 실력이면 아마 최강 소리를 들을 거다.”

“아이, 씨. 그니까 뭐가?”

“언젠가 네가 그랬잖아. 이제 슬슬 음지에서 나와 양지를 지향하겠다고. 하지만 밑에 애들 먹고살 문제 때문에 아직은 망설여진다고 말이지.”

“그랬지.”

지태가 너무도 진지하게 나오는 터라 이돈두는 이제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이렇듯 정색하고 나오는 것을 보면 무슨 중요한 제안 같은 것이 곧 튀어나올 듯했다.

“일을 만들어주자는 얘기야. 너희들 주특기를 그대로 살릴 수 있는 그런 일!”

“그게 뭔데?”

“경호보안업체!”

“보디가드 같은 거?”

이돈두가 되묻자 지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건달이 보디가드라…….”

장난처럼 던져온 제안이 아니기 때문에 이돈두 역시 그것을 농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태의 제안이 제법 그럴싸하다는 표정이기도 했고.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니까 진지하게 한번 고려해봐.”

“그래. 그거 꽤 괜찮은 생각이다.”

이돈두가 지태의 제안을 되새기며 술잔을 들었다.

그때였다.

띠리리리릿, 띠리리리릿.

바닥에 내려놓은 지태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아론이었다.

“아론!”

-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미스터 한.

“난 괜찮아요. 근데 거기에 무슨 바쁜 일이라도……?”

지태가 이유를 물으면서 스마트폰을 좀 더 가까이 귀에 댔다.

아론은 한 템포 쉬었다가 답을 주었다.

- 여기 현지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고 있어요.

“가령 어떤?”

에릭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아론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미 감은 잡았k.

하지만 지태는 굳이 앞서 나가지 않았다.

우선 시치미를 뗀 채 아론의 설명부터 듣기로 했다.

- 미스터 한이 출국한 직후부터 군부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어요.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던 미스터 한이 사라지자 내부로 시선을 돌린 모양새예요. 동조자를 색출해서 군 내부의 분노를 일단 그쪽으로 돌려놓자는 속셈이겠죠. 시간도 벌 겸해서 말이지…….

“그래서 아론은 탕 마이 씨와 연락을 취해보려 했겠군요. 그가 무사한지 아닌지.”

- 아니, 미스터 한이 그걸 어떻게……?

“몰랐습니까? 나도 미얀마 쪽에 나름 레이더망이 있어요. 오늘에야 그것을 들었고.”

- 아, 그렇군요.

아론은 낮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론! 당분간은 몸을 사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적어도 탕 마이와 다시 연락이 닿기 전까지라도.”

- 나도 그럴 생각입니다. 이곳 상황이 좀 더 파악되는 대로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다음에 전화를 할 때는 이 번호 말고 다른 전화번호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지금껏 보아왔던 아론의 모습이 아니었다.

덜렁대며 가볍게 처신하던 것과는 달리 아주 신중한 모습이었다.

“그래요. 또 통화하십시다.”

지태는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이돈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어로 대화를 나눈 것이어서 통화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지태의 표정이 무거운 것을 보고 그렇게 유추했다.

“미얀마 쪽 현지 사정이 많이 안 좋은가봐.”

지태는 조금 전 아론과 나누었던 통화 내용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들려주었다.

다 듣고 난 이돈두가 심각하게 바라보자 지태가 픽 웃었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에 오늘을 낭비하진 말자. 일단 달리자고. 자, 건배!”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하자 이돈두가 흘깃 지태의 표정을 살피다가 잔을 부딪쳐왔다.

* * *

임경남은 부경물산 대표집무실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강만우 검사였다.

현직 대검 강력부장으로 차관급 대우를 받는 검사장급.

부경그룹 법무팀의 팀장인 오태석 전무가 임경남에게 연결해준 검찰 쪽 후배였다.

“부장님, 공무에 바쁠 텐데 내가 너무 자주 연락을 드리는 건 아닌지…….”

- 아이쿠,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절대 아닙니다. 언제든 편안하게 전화 주십쇼.

임경남은 재계 서열 세 손가락에 드는 부경그룹의 차기 후계자였다.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려고 애를 써도 될까 말까 한 인물이 먼저 손을 내밀어왔으니 그저 감지덕지할 상황이다.

“근데 내가 의뢰한 일은 잘돼가고 있습니까?”

- 아, 그 조폭 새끼들 말씀이시죠. 걱정 마십시오. 조직범죄과로 넘겨서 철저히 뒤를 캐라고 지시했으니까 조만간 만족하실 결과가 나올 겁니다.

“아, 그래요?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못미더워서가 아니라 조바심에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임경남이 뭔가 부연 설명을 내뱉으려는데, 강만우 강력부장이 미리 감을 잡고서는 그의 말을 잘랐다.

청탁하는 임경남의 불편한 심기를 미리 헤아려주고자 하는 배려 차원이었다.

-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잘 압니다.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헛험.

임경남이 눈치 빠른 그의 배려에 헛기침으로 화답했다.

“언제 시간 한번 잡으십시다. 식사라도 하시게.”

- 불러만 주십시오. 대표님이 부르신다면 제가 만약 대통령과 선약이 잡혔더라도 냉큼 취소하고 달려가겠습니다.

이 정도면 아부의 달인이요, 처세술에 도가 텄다고 봐야한다.

임경남이 스스로 꼬리를 마는 강만우의 행동에 지극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때였다.

똑똑똑.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곧 문이 열리고 오한표 실장이 머리부터 들이밀며 목례를 해왔다.

아까 미얀마와 관련해서 뭔가 보고할 것이 있다더니 아마도 그 용무 때문에 온 듯하다.

임경남이 턱짓으로 비어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그래, 보고할 것이 있다는 게 뭡니까?”

임경남은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물었다.

오한표 실장은 재촉하는 그에게 방금 미얀마 현지 지사원들을 통해 들어온 따끈따끈한 정보들을 쏟아냈다.

물론 그 모두가 미얀마 지사의 직원들이 수집한 정보들은 아니었다.

부경그룹 차원에서 미얀마 군부 내에 심어둔 조력자들과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써서 알아낸 정보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임경남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른거렸다.

“음! 근데 탕 마이라는 놈에게 혐의를 두는 이유는 뭐요?”

“그놈의 형이 부패 혐의로 몇 년 전에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내심 군부에 불만과 분노가 많이 쌓여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정보부 내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고?”

“맞습니다, 사장님.”

임경남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길게 콧숨을 내쉬었다.

“그렇담 말이 좀 되는군. 그래서 반군 측에 정보를 팔아먹으면서 다른 한편 한지태를 그쪽에 연결해줬을 가능성도 높다는 말이지요?”

“제 생각에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암튼 여러 갈래로 압박해 들어가고 있으니 조만간 한지태의 목줄을 쥘 만한 뭔가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 정보부 새끼가 벌써 눈치를 채고 잠수를 탔다면서 무슨 수로 조만간이라는 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만족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던 임경남의 얼굴이 다시 찡그려졌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놈이라고 속으로 욕을 내뱉은 오한표 실장이 애써 태연한 모습으로 대답을 주었다.

“공개 수배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얀마 정보부와 군부에서 은밀히 수배 지시를 내려놨습니다. 그러니 꼬리를 잡는 일은 그야말로 시간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두고 볼 일이고.”

“참, 한지태가 거래한 바이어가 아론이라는 놈입니다. 만달레이에 본사를 둔 AR컴퍼니의 대표이고요.”

처음 나온 이야기였다.

임경남이 두 눈을 치켜뜨며 관심을 보였다.

“AR컴퍼니?”

“탕 마이가 연결해준 바이어로 의심이 가는 친굽니다. 지난번 1차 오더 물량이 그쪽을 통해 흘러갔습니다. 시트웨에 있는 지사에서 직접 받은 걸로 이미 확인된 사항이고 말입니다.”

부경물산 지사원 두 명이 지태의 오더 물품을 뒤쫓다가 그곳에서 납치를 당했었다.

이제야 그림이 명확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임경남이 낮은 신음 소리를 흘렸다.

“음!”

“탕 마이가 그 아론이라는 놈과 연결이 돼있다는 것까지는 미얀마 정보부에서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우리만 알고 있는 고급 정보라고 할 수 있죠.”

“말이 돼? 우리가 돈 주고 얻은 정보를 그쪽이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오.”

“모를 겁니다, 사장님.”

“왜?”

“정보부에서는 우리처럼 많은 돈을 쓰지 않으니까요. 정보 사냥꾼들은 오로지 돈만 보고 움직입니다, 사장님.”

납득이 가는 말이다.

임경남이 쓰게 입맛을 다신 후 물었다.

“그럼 쉬운 길을 택하지 왜 굳이 어렵게 간 거요? 우리가 취한 정보를 그쪽 정보부에 흘렸으면 바로 끝을 봤을 텐데!”

“아시다시피 그쪽이 워낙 부패한 곳이 아닙니까. 탕 마이의 라인이 어디까지 연결이 돼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서 말입니다. 만약 정보를 흘렸다가 자칫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거래가 한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다음번엔 확실히 뒤쫓아 조져버리겠습니다, 사장님!”

합리적인 판단 같아서 임경남은 오한표 실장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크게 한번 끄덕여주었다.

“그건 오 실장이 알아서 잘 관리하도록 해요. 뭐든 확실히!”

“물론입니다, 사장님.”

오한표 실장이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보였다.

* * *

- Fuck, Fuck, Fuck!

생소한 번호로 전화를 걸어온 아론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욕부터 내뱉었다.

몹시 흥분된 목소리였는데, 그 욕을 자신에게 쏟아내는 게 아니어서 지태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아론이 이제 조금은 진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거칠던 숨소리가 차츰 잦아들더니 이윽고 아론이 입을 열었다.

- 미안합니다, 미스터 한!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 탕 마이가 쫓기고 있어요. 아무래도 들통이 난 것 같습니다.

미루어 짐작한다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뭔가 확신을 갖고 내뱉는 말이었다.

지태는 후- 하고 날숨을 뱉었다.

저번에 에릭과 통화할 때 어느 정도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며 잘 비켜갈 것을 기대했지만, 아론의 태도로 보아 그런 희망은 이미 사라진 것 같았다.

거기에 기름을 끼얹는 아론의 발언이 바로 이어졌다.

- 그리고 또 있습니다. 부경그룹에서 나와 탕 마이, 그리고 미스터 한과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는 눈치예요.

흠칫.

지태는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디에서 나온 정봅니까? 혹 정보부에서……?”

- 그랬다면 벌써 나를 잡아들였겠죠. 정보 판매상입니다.

“정보 판매상?”

- 돈에 미친 비열한 새끼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주 은인 같은 놈이라고나 할까. 암튼 부경 측에 팔아먹은 정보를 나한테도 역으로 흘린 겁니다. 나 또한 놈들한테는 놓칠 수 없는 큰 돈줄이니까.

“그런 놈들이라면 정보부에도 흘렸을 거 아닙니까.”

- 놈들이 미쳤습니까? 돈이 안 되는 일엔 절대 발을 담그지 않는 놈들이에요.

“그럼 다행이지만……. 그나저나 부경에서 알아차렸다면 이번 2차 오더는 어렵게 됐군요. 부경 측이 모든 것을 알아차렸는데도 정보부에 알리지 않은 걸 보면 무슨 꿍꿍이가 있어요. 차기 거래 때 확실한 물증을 잡아서 넘기려는 수작인지도 모르고.”

-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나도 만달레이를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해 왔습니다.

“어디에?”

지태가 숨도 쉬지 않고 되묻자 아론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이내 지태를 믿는다는 듯 대답했다.

- 하긴 미스터 한과는 같은 배를 탄 사인데 뭘 숨기고 말겠습니까. 난 지금 샨 주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전에 쿤사가 장악했던 지역?”

- 그렇게 첩첩산중까지는 아니고……. 암튼 그 정도만 알고 있으세요.

아론은 더 자세한 위치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지태는 다시금 크게 콧숨을 내뱉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