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불길한 그림자(2)
“대검에서까지 움직였다면 놈들이 꼬리를 잘라내려고 작심을 했다는 거다. 야, 성두야!”
“예, 회장님!”
“우리 애들 전부 잠수 타게 해라. 곧 쓰나미가 몰려올 거다. 무차별 학살 말이야.”
“회장님, 이대로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그럴 순 없지. 하지만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볼 일이다. 그다음에 되치기를 하든, 아니면 끌어안고 다 같이 자폭할 것인가를 고민해 봐야겠지.”
막다른 골목에 몰린다면 결코 그 자신만 혼자서 죽진 않겠다는 소리였다.
“양재동 패거리들하고 연관된 거라면 뭐든 수집해 놔라. 참 그리고 광수대 그 형사 말이다. 그 친구하고도 은밀히 접촉을 하든, 아니면 소스만 던져주든 네 선에서 적당히 알아서 해봐.”
“어느 선까지 말입니까, 회장님.”
“놈들이 식겁해서 나한테 다시 손을 내밀 만큼만!”
“알겠습니다, 회장님. 모든 라인을 총 가동하겠습니다.”
강창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 이 사이로 분노를 내뱉었다.
“이 새끼들! 그동안 밑구녕 몇 번 닦아줬더니 나를 알기를 완전히 물렁물렁한 두부로 봤어.”
“정 안되면 제 목을 걸고서라도 그 새끼들 전부 다 목줄을 다 따놓겠습니다.”
유성두의 다짐에 강창근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뒤돌아보면서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렸다.
“뭐든 좋겠지…….”
* * *
대표집무실이다.
지태는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순조롭고 안정적이었다.
추진하는 사업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었고, 더불어 한스의 규모는 하루가 다르게 그 덩치를 키워가며 호기를 맞고 있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어떤 불길함이 언제부터인가 계속 머릿속을 휘저어댔다.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가.’
지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가슴에 담은 채 답답한 한숨을 후- 하고 털어냈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돌아보았다.
저녁 7시 5분.
정시 퇴근을 원칙으로 내세운 한스였다.
상사의 눈치를 보는 시스템이 아닌 까닭에 직원들은 이미 다 사무실을 빠져나갔을 터였다.
오늘 저녁엔 잡혀있는 스케줄도 없었다.
모처럼 시간이 남아도는 날이었지만, 지태는 오히려 더 큰 적적함을 느꼈다.
지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오늘이었다.
지태는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책상으로 돌아와 슈트를 집어 들었다.
이돈두나 불러 술이나 한잔할까 하는데 이심전심이었을까.
때마침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지금 어디야?
“퇴근하려고.”
- 선약은?
“없어. 외로운 영혼이다, 오늘만큼은!”
지태의 너스레에 이돈두가 흐흐 웃었다.
- 그럼 잘됐네. 외로운 영혼끼리 술 한잔할까?
“그러지, 뭐.”
지태는 내심 바라던 바였지만 마치 선심을 쓰듯 말을 내던졌다.
이돈두는 약속 장소를 불러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이제 막 슈트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는데 다시 벨이 울렸다.
스마트폰을 살피는 지태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은 에릭이었다.
무심결에 시간을 확인했다.
케냐의 나이로비와는 여섯 시간의 시차가 있다.
지금 그곳은 오후 1시가 조금 넘었을 시각이니 점심 무렵일 거다.
지태가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던졌다.
“이야, 에릭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죠?”
- 나야 늘 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서운한데요, 미스터 한!
“뭐가요?”
- 매번 전화를 내가 먼저 하지 않습니까.
“우리 사이가 손해니 뭐니 계산 따질 사이입니까. 그럼 나야말로 서운한데요?”
- 하하. 이런 식으로 되치기를 해대시나.
모처럼의 통화여서 안부 인사가 길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에릭이 정색을 했는데 이제 전화를 걸어온 목적을 밝히려는 것 같았다.
- 한!
에릭이 목소리를 깔며 제법 진지하게 나오자 지태가 귀를 더욱 쫑긋 세우며 긴장했다.
“예, 말씀하세요.”
- 저번에 미얀마에 비상이 걸렸던 거, 한의 작품이 맞죠?
케냐 정보부의 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라서 미얀마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를 리 없을 거다.
더구나 지태가 오더를 가지고 미얀마로 날아갔던 기간과 겹치는 것이니 그 비상사태의 원인 제공자가 지태라는 것도 벌써 눈치를 챘을 것이고.
“좀 그렇게 됐습니다. 누군가의 허위 제보를 믿고 우릴 작정하고 죽이려 덤비는데 어쩔 도리가 있습니까. 살기 위해선…….”
- 예에. 전후 사정을 따져 보니까 나 같았어도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근데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전후 사정이나 되물을 에릭이 아니고……. 뭡니까?”
- 혹시 요즘 탕 마이하고 연락을 취해본 적 있습니까?
에릭은 되묻는 지태의 질문에 동문서답으로 되받아쳐왔다.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지태는 일단 대답을 해주었다.
“미얀마를 빠져나온 이후론 아직요……. 근데 무슨 일 있는 겁니까?”
- 아무래도 미스터 한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그것하고 상관이 있는 듯합니다. 미얀마 군부 쪽에서 내부를 손질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내부 손질이라니?”
- 어디서 소스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정보 라인을 몽땅 다 뒤지고 있다는 첩보예요. 그 범위가 좁혀져 탕 마이가 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탕 마이가 전해준 겁니까?”
- 그건 아니고 다른 라인에서 건너온 소식입니다. 탕 마이가 개인적으로 교분이 두터운 사람들을 통해서 망명을 타진한다는 소문도 돌고 있어요.
지태의 무거운 신음 소리가 들리자 에릭은 잠시 말을 끊었다.
한숨 돌릴 여유를 주려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현지에 있는 사람에게 확인을 좀 해봐야겠군요.”
- 나도 전해들은 것이라서 세밀한 것은 잘 몰라요. 개인적으로 알아볼 라인이 있다면 그게 나을 듯합니다.
지태는 다시금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머리를 짓누르던 불안감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이 이어지자 에릭이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 그나저나, 한!
“예.”
- 여기가 어딘지 압니까?
‘거기가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케냐의 나이로비겠지.’
지태가 속으로 쓴웃음을 내뱉을 때 에릭이 답을 던져왔다.
- 여기 미스터 기의 사무실 앞입니다.
“아, 그래요?”
- 점심시간도 됐고 해서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미스터 기를 본 지가 좀 오래됐기도 해서.
“그럼 옆에 있겠네요?”
- 바꿔드릴까?
그걸 말이라고.
지태가 피식 웃는 것으로 바꿔달라는 말을 대신했다.
- 어, 지태야. 아니지, 죄송! 한 회장님!
기민성의 활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 무겁게 내려앉던 기분이 그로 인해 조금은 펴지는 것 같았다.
“까분다! 넌 어떻게 된 것이 업무 외엔 전화를 안 하냐? 죽고 싶으세요?”
- 급이 맞아야 아무 때나 전활 하지. 넌 회장님, 난 사원이잖아. 비록 한스의 정식 직원은 아직 아니지만……. 크크.
“어휴, 이 자식 정말!”
- 하하. 그건 그렇고 다모아 매장이 벌써 대박 조짐을 보인다며?
기민성이 화제를 돌렸다.
“그거야 사업을 구상하기 전부터 이미 예상을 했던 건데, 뭐.”
- 인마,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어. 사람이 겸손할 줄도 알아야지.
“너하고 내가 겸손 따질 사이냐. 그리고 없는 이야길 만들어낸 것도 아닌데, 뭐…….”
- 참, 나! 얘가 내 입을 완전히 꿰매버리시네.
지태의 농담에 기민성은 잠시 혀를 차는 시늉을 했지만, 이내 정색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그리고 좀 성급한 감이 없진 않지만…….
“아, 뭔데 뜸을 들여?”
지태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 성질머리하곤! 내 말은 이참에 다모아의 해외 매장도 고려를 해보라는 얘기야!
기민성이 덩달아 소리를 내질렀다.
장난스럽게 악다구니를 쓴 것이지만 지태는 그 말을 허투루 흘려듣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자신의 생각을 바로 밝히지는 않았다.
기민성의 부연 설명이 곧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물었다.
“서둘러야 할 이유라도 있어?”
- 이제 한스전자도 브랜드를 내걸고 본격적으로 론칭에 들어갔잖아. 이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가자는 거지, 내 말은.
“분위기라니?”
역시나 이번에도 앞질러가지는 않았다.
물론 기민성이 무슨 뜻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짚이는 바가 아예 없진 않았다.
- 한스전자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내수용으로만 돌릴 것은 아니잖아. 소형 가전이라는 게 한계도 있고.
“그렇긴 하지.”
- 그니까 내 말은…….
기민성의 말이 이어졌다.
한스전자의 자체 브랜드로 론칭을 했으니 이제는 외부로 눈을 돌리자는 말이었다.
즉 수출을 염두에 두라는 말인데, 소형 가전은 품목별로 판로를 넓히자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물량을 내보내는 단위도 적을 테니 생산품목 전체를 하나로 모아 대규모로 내보낼 방법을 찾자는 거다.
그 대안으로 다모아 해외 매장을 개설하라는 게 기민성의 제안이었다.
수출과 더불어 해외 매장에서 직영 판매를 함으로써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여가자는 말이다.
“괜찮네.”
지태가 망설임 없이 곧 긍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기민성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그 점에 대해선 자신 역시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대답을 줌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다.
이후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를 화제 삼아 대화를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집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면서 지태는 다시금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에릭이 전해준 탕 마이에 대한 소문이 영 신경이 쓰였다.
아론에게 얼른 확인부터 해보고 싶었다.
통화가 이루어졌지만, 아론은 정신이 좀 없는 듯 보였다.
허둥대는 태도를 보이더니 나중에 자신이 따로 연락을 주겠다면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쩝.”
기분이 영 찜찜했다.
지태는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신 후 띵 소리를 내며 멈춰서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 *
“예전부터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지. 먹고 노는 날건달!”
지태가 손을 닦던 물수건을 테이블 아래로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이돈두는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긁었다.
“야! 건달이라고 해서 늘 한가한 직업인 줄 아냐? 나름 졸라 바쁘고 신경 쓸 것도 많아.”
“건달씩이나 되는 놈이 이거 봐. 삐치는 건 딱 초딩 여자애 수준이라니깐.”
“햐, 이거 천하의 이돈두가 오늘 제대로 가오 떨어지네.”
지태가 이돈두의 너스레에 웃음기를 입가에 그렸다.
참치 횟집이다.
편안한 공간이 좋아서 셰프가 눈앞에서 참치 살을 썰어주는 홀의 바(Bar) 대신 별실을 택해 들어왔다.
이돈두가 이곳의 오랜 단골이고 또한 그의 신분을 알기에 별실에 앉았다고 해서 참치의 귀하고 맛난 부위를 빼먹지는 않았다.
셰프는 언제나처럼 금가루를 뿌린 눈물주를 먼저 서비스로 내왔다.
지태가 눈물주가 담긴 잔을 한입에 비운 후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제대로 사람다운 일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
뜬금없는 소리에 이돈두가 회 한 점을 집으려다가 빤히 쳐다보았다.
“미얀마에서 가능성을 봤어.”
“그니까, 뭐?”
앞뒤 자르고 툭 던져오는 지태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이돈두는 퉁명스럽게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