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76화 (176/272)

176화. 기대 이상으로(1)

임경남은 여자의 몸에서 떨어졌다.

지태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나보낸 유미라 이후 요즘 거금을 들여 스폰을 해주고 있는 여자다.

한창 섹시 콘셉트를 무기로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신인 여배우 이지원.

어느 날 우연히 이동하는 차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검색하다가 이지원의 기사를 보고는 첫눈에 꽂혀 곧바로 작업에 들어간 임경남이었다.

신인에겐 그야말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부경건설 전속 아파트 광고 모델을 제안하면서부터 그녀에 대한 공략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후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스타로의 수직 상승을 꿈꾸던 이지원의 욕망과 결이 딱 맞아떨어진 결과라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은밀히 살림까지 차린 지가 벌써 2개월이 넘었다.

이러한 사실은 양재동 멤버들에게조차 비밀에 붙여두었다.

여럿이 어울려 노는 것이라면 모르되 개인 프라이버시까지 그들과 공유할 마음이 없기에.

같이 뒤섞여 논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엄연히 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오만함의 발로일 거다.

“좋았어요?”

이지원은 정사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좋긴 한데, 머리가 무겁다.”

“왜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임경남이 은연중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네 역할만 충실히 하면 돼. 내가 정해둔 한계선을 넘지 마. 그러다가 만약 내 눈 밖에 벗어난다면 그 후유증이 어떠한가는 너도 잘 알 거야.”

비록 고저가 없는 말투였지만 소름 끼치도록 싸늘하게 들렸다.

숫제 협박이나 다름없어서 이지원은 순간 몸을 움츠리며 경직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임경남은 천장을 똑바로 보고 누우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경물산 대표실에서 하루 종일 대기 상태로 있다가 갑갑증이 나고 불쑥 화가 치밀어서 잠시 외출한 거다.

지금도 부경물산 회의실에는 오한표 비서실장을 비롯해 주요 임원들이 머리를 맞댄 채 미얀마에서 시시각각 들어오는 보고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터였다.

“이 개새끼! 지금 어디에 짱 박혀 있는 거야.”

임경남은 입바람을 허공으로 훅 날리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그러다가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놔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곧 목록에서 최근에 통화했던 전화번호 하나를 택한 다음 통화버튼을 눌렀다.

- 예, 사장님!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오한표 실장은 금세 전화를 받았다.

“새로 들어온 보고 없습니까?”

- 죄송합니다, 아직…….

미얀마에서 보고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 마치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오한표 실장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얀마 전역에 긴급 수배령이 떨어졌는데, 그렇담 이 새끼는 대체 어디로 튀었다는 말이오?”

- 다시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사장님. 뭐든 새로운 소식을 내놓으라고 매섭게 다그치겠습니다.

임경남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는 쓴맛을 다시며 스마트폰을 협탁 위로 내던졌다.

“후우!”

그의 갈라진 입술을 뚫고 울화가 치민 짜증스런 한숨이 맵게 흘러나왔다.

임상만 회장은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지금 단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지태가 미얀마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당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동원해 놈에 대한 허위 소스를 주며 미얀마 당국을 부추겼지만, 아직 지태의 행방조차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병신 같은 새끼들!”

임경남의 입에서 다시금 욕설이 흘러나오자 이지원은 괜스레 또 몸을 움츠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 * *

김영철은 국경 검문소에 들어가 안면이 있는 세관원 하나를 데리고 나왔는데, 한눈에도 돈을 밝히게 생긴 전형적인 중국인이었다.

볼록 튀어나온 그의 뱃살은 뇌물이 덕지덕지 발라져 생긴 부산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태는 입국 스탬프를 찍는 뇌물로 미화 500달러를 썼다.

이미 밤이 깊어 이 시간에 차량을 렌트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기를 쓰고 이동하려면 안 될 것도 없었지만, 지태는 루이리 시내에서 그냥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무엇보다 피곤했고 이제는 한시름을 놓은 상태라서 바삐 서둘 이유도 없는 까닭이었다.

지태는 시내 호텔을 찾아 들어가 체크인했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 더구나 반국가단체로 명시된 북한 인사와 함께 방을 쓴다는 것은 안 될 말이다.

그래서 지태는 굳이 객실을 두 개 빌렸다.

하기야 김영철과 접촉하고 나중에 손발을 맞추기로 합의까지 한 마당이니 이미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잘못을 저지르긴 했다만.

국가보안법 제8조 1항에는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돼 있는 것이다.

‘내가 뭐 간첩질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지태가 샤워할 생각도 안 하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이 기막힌 상황을 곱씹으며 쓴맛을 다실 때였다.

똑똑.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방문을 노크할 사람이 김영철 말고 누가 있겠는가.

지태는 방문객의 신원도 확인하지 않고 곧장 문을 따주었다.

“내래 누군 줄 알고 함부로 문을 따주네?”

“강도라면 무서워할 사람으로 보였냐, 내가?”

지태가 퉁명하게 대꾸하자 김영철은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픽 하고 웃었다.

맞는 말인 것이다.

걸어 다니는 북조선 최고의 전사라는 자신조차도 가볍게 쓰러뜨린 지태였다.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잠이나 자지 뭐 하러 왔어?”

“그리 지르보디(노려보지) 말라. 이제 우린 호상 간에 손발도 맞춰야 하디 않간. 그렇담 냉랭하게 지내디 말고 좀 더 가찹게 지내보자는 의미로 찾아온 거이야.”

“너하고 난 원수야, 인마! 만일 이 사실을 우리 정부에서 알게 되면 귀국 즉시 난 곧바로 이거야, 이거. 양손에 은팔찌를 차게 된다고!”

지태는 수갑을 찬 모양을 해보이며 투덜거렸다.

김영철이 피식 웃더니 지태를 무시하고는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창가 쪽 티테이블에 털썩 주저앉더니 지태를 쳐다보았다.

“동무래 가진 돈 많지? 냉장고에서 술 몇 병 꺼내서 갲고 오라.”

“얼씨구!”

지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면서도 고분고분 말은 잘 듣는다.

맥주 몇 병을 가져와 티테이블에 내려놓은 지태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태 동무, 사업 수완이 아주 좋은가 보더구만.”

병뚜껑을 따서 단숨에 입안으로 반쯤 털어 넣은 김영철이 맥주병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흘리듯이 던져왔다.

“무슨 소리야?”

“내래 좀 알아봤디. 창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회사를 세 개씩이나 늘렸더구만, 기래.”

“내 뒷조사까지 했냐?”

“뒷조사랄 것도 없어야! 키보드 몇 번 두들기다 보면 다 나오는걸, 뭐.”

괜히 글로벌 시대라고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지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맥주병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맘에 들었어, 지태 동무! 기래서 기런 거이야. 동무래 어떤 사람인가 좀 더 알고 싶어서 말이디.”

“……!”

“내래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일깨워준 게 바로 동무거든. 사실 난 그동안 공화국 최고의 전사라고 으스대던 측면이 좀 많았어야! 기런데 고거이 동무로 인해 깨져버렸다 이거디. 그럼에도 내래 동무가 맘에 든다 이거야. 나한테 있어 강함은 곧 우상이디. 아, 물론 경애하는 우리 영도자 동지만큼은 아니지만!”

단둘이 있어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김영철은 얼른 후렴구를 덧붙였다.

김영철이 북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북한의 사상과 체제에 깊이 세뇌된 인간이라는 점을 잠시 깜빡할 뻔했는데 이 한마디로서 다시 각인시켜주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젖혀두더라도 자신을 좋게 봐주고 마음에 든다는 데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지태가 약간은 겸연쩍은 미소를 날리는데 김영철이 은근하게 말을 이었다.

“기래서 말인데 혼자 심심할 것 같으면 내래 쿤밍(昆明)공항까지 동행해 줄까?”

“거기까지!”

“……?”

“친한 척하는 것은 딱 거기까지만 하라고!”

지태가 개구쟁이처럼 짓궂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악의가 담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김영철 역시 장난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렸다.

“거 드럽게 비싸게 구는구만, 기래.”

둘은 마주 보며 씩 웃었다.

그러다가 반쯤 남은 맥주병을 건배하듯 서로 부딪쳤다.

* * *

루이리에서 윈난(雲南)의 성도(省都)인 쿤밍까지 가장 빠르게 이동하는 방법은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루이리에는 공항이 없었다.

그래서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하려면 일단 루이리에서 약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망스(芒市) 현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오전 9시쯤 호텔을 나선 지태는 김영철과 헤어졌다.

김영철은 국경 검문소를 넘어 곧바로 미얀마의 무세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아론을 통해 연락하지.”

지태가 손을 내밀었다.

김영철이 그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아론이라는 동무래 믿을 수는 있갔나? 사람이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아?”

“첫눈에만 그리 보일 뿐이야. 볼수록 진국이라는 걸 곧 알게 될 거다.”

“뭐 지태 동무가 기렇담 기런 거지, 뭐. 또 보자우.”

지태는 망스 현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대절했다.

정상 운임은 중국 화폐로 300위안이었으나 지태는 통 크게 100달러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300위안의 두 배가 넘는 돈이라서 택시 기사는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좋아했다.

망스 현에서 쿤밍공항까지는 약 1시간 정도 소요됐다.

그곳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는 자정 무렵인 23시 55분에 있었다.

비행 소요 시간이 약 4시간 남짓 걸린다고 하니 한국에 떨어지게 되면 새벽 시간일 거다.

비행기가 출발하려면 앞으로 서너 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지태는 갈증 난 목을 축이고 휴식도 취할 겸 공항 내 카페를 찾아들어갔다.

* * *

“이런 도깨비 같은 친구가 다 있나!”

한스무역 대표실에 불쑥 나타난 지태를 보고 조현민이 외친 첫마디는 그랬다.

지태는 새벽녘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곧장 회사로 출근했다.

아침 7시 무렵이어서 아직 출근한 직원은 없었다.

텅 빈 홀딩스 사무실에서 커피 한잔으로 피곤한 몸을 달래다가 조현민의 출근 시간에 맞춰 한스무역 사무실로 찾아간 거다.

“반가우면 한번 안아주던가. 먼 길 다녀온 사람한테 그게 뭐요?”

“얼씨구!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넌 어떻게 된 게 외국만 나갔다 하면 깜깜무소식이냐. 전화 한 통 날려주면 어디 손가락이라도 부러져?”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이런 말 몰라요?”

“이번 미얀마 오더가 어디 느긋하게 지켜만 볼 상황이었냐. 내 속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나저나 별일은 없었고?”

그제야 조현민은 지태를 요모조모 살피는 시늉을 했다.

“별일이 있었으면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겠어요?”

“좀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도 하던데, 괜찮아? 너하고 상관없는 일이었어?”

조현민은 재차 확인을 해왔다.

지태가 의미가 담긴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것이 불길하게 여겨졌다.

“뭐야, 그 소문의 근원이 너였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아무래도 임경남의 농간인 듯도 싶고.”

“허, 이것 참!”

조현민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는 듯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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