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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73화 (173/272)

173화. 오월동주(2)

노크를 하고 들어선 이는 바로 지태였다.

김영철이 매서운 시선으로 지태를 노려보았다.

“날 놀리려고 찾아온 거이네?”

“보자마자 인상부터 쓸 정도면 이제 다 회복이 된 것 같군.”

지태가 픽 웃으며 다가와 침대 옆에 놓인 보조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깐 내래 방심했던 거이야. 네까짓 놈한테 당할 내가 아니야.”

“그렇다고 해두지. 그럼 나중에 몸이 회복되거든 다시 한 번 제대로 붙는 걸로!”

지태가 미소 띤 얼굴로 천천히 고갯짓을 했다.

끄응.

김영철은 그의 태도가 마뜩잖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시선을 회피했다.

그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지태의 말이 곧바로 이어졌다.

“몸부터 회복해! 그래야 내가 하는 일을 맡아줄 거 아니냐.”

움찔.

김영철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지태를 쳐다보았다.

“이건 네가 먼저 제안한 거야. 이제 와서 딴청 피우는 건 아니지?”

“기거이 무슨 소리네? 기러니까니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이야?”

김영철이 아직 의심이 채 가시지 않은 시선으로 되물었다.

“비싼 밥 먹고 헛소리를 내뱉을 만큼 내가 한가하지 않거든!”

지태가 사람 좋은 얼굴로 씩 웃어주었다.

* * *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임경남은 아버지 임상만 회장의 부름을 받았다.

본사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임경남은 왜 아버지가 자신을 불렀는지에 대해 곰곰이 따져봤다.

공적인 업무, 공식 석상 외에는 사적으로 거의 찾는 일이 없던 임상만 회장이 최근에 자주 부르거나 연락을 해오는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지태의 동향에 관련된 보고.

그런데 놈에 관한 사항이라면 어제 이미 두 차례 보고를 드렸었다.

그 두 번의 보고는 내용이 모두 똑같았다.

지태의 향방이 묘연하다는 것, 오더 물품을 어디로 가져간 것인지 도무지 파악이 안 된다는 것.

물론 짐작되는 바는 있었다.

자신이 오한표 비서실장을 시켜 미얀마 현지에 있는 지사원들에게 명령을 내린 게 있다.

라카인 주는 물론 사가잉 구와 만달레이 구 등 카친 주를 제외한 중북부 지역에 거대한 양의 밀수품 운반이 있을 것이라는 허위 정보를 흘리라고 말이다.

그것이 먹혔던지 마침내 소식이 전해져 왔다.

사가잉 구와 카친 주의 경계인 마우 뉴라는 지역의 검문소 부근에서 엄청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그 보고를 접하는 순간 지태의 운명은 이제 끝났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사가잉 군사령부 최강의 부대라는 경비대대 병력 50여 명이 전부 다 몰살을 당했다는 거다.

비록 증거는 없다 해도 그것이 지태의 소행이라는 것을 임경남은 확신했다.

언젠가 필리핀으로 오더를 수행하러 갔을 때에도 쏟아지는 총탄 속을 뚫고 살아남은 놈이라서 그 확신에 대한 무게감은 더욱 가중되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는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차마 임상만 회장에게는 보고하지 못했다.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까닭에서였다.

임상만 회장은 자신에게 이르기를 ‘한지태, 그놈이 미얀마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그저 멀리에서 지켜만 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임상만 회장의 그 명령을 어겼고 스스로 오버한 측면이 컸다.

이번 기회에 지태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싶은 개인적인 원한이 더해진 결과라고 봐야 옳다.

임경남이 왠지 모를 불안한 기운을 느껴갈 즈음 수행 기사는 본사 현관 앞에 차를 세웠다.

어느새 임상만 회장과 조우할 시간이 바짝 다가왔다.

임경남은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는데 그 손바닥 안은 벌써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 * *

“뭐? 그 북한 놈들한테 경비를 맡기겠다고?”

이돈두가 황당하다는 듯 지태를 쳐다보았다.

점심 식사 후 아론은 쿤모 소장과 사적인 면담을 갖겠다며 나간 뒤로 아직 영빈관에 돌아오지 않았다.

둘뿐인 거실에서 지태와 이돈두는 후식으로 차를 마시고 있던 참이다.

그리고 지태가 김영철을 찾아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말에 이돈두가 저리 놀라고 있었다.

“다음부턴 나 안 따라올 거냐?”

“웬 동문서답? 빨갱이 새끼들한테 기어이 경비를 맡길 거냐고 묻는데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

“쟤들이 경비를 맡게 되면 너도 편하잖아. 같은 말을 쓰니까 적어도 소통이 안 돼서 허둥댈 일도 없을 테고.”

“니미, 영어 못하는 내 약점을 갖고 늘어지기는!”

이돈두가 후렴구는 잘 알아듣지 못할 낮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지태가 픽 웃고는 곧바로 정색했다.

“방금 그 말은 농담이고. 사실은 저놈들이 여기 반군 측에 군사고문단으로 온 지가 꽤 됐어. 우리보다 이 나라의 실정에 더 밝고, 위급할 때 임기응변에도 능할 거란 얘기야.”

“……!”

“특히 저놈들 대가리인 김영철 같은 경우엔 지금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는 거고.”

“그게 뭔데?”

“미얀마 연방정부의 정식 군사고문단 자격으로 와 있거든. 현재 양곤 쪽에서 땅굴 전문가들을 이끌고 있어.”

“그런데 이쪽 반군과도 거래를 하고 있다?”

이돈두의 물음에 지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발 놈들, 돈 버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암튼 빨갱이들이 꼼수 부리는 대가리는 졸라리 잘 돌아간다니까.”

지태가 피식 웃어주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여하튼 중요한 건 김영철이 미얀마 정부의 돌아가는 사정에 밝다는 점이야. 군사적으로 협조하는 측면이 크니까 낮은 등급의 정보 같은 것은 서로 공유할 측면이 크다는 얘기지.”

그제야 이돈두는 지태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북한 새끼들이라고 하니까 어쩐지……. 그리고 만약 이 사실을 국정원 같은 데서 알아차리면 우린 어떻게 돼? 국가보안법인가 뭔가 하는 걸로 걸려 들어가는 거 아냐?”

이돈두의 우려에 지태는 쓴웃음이 나왔다.

지극히 당연한 말인 까닭에.

“그쪽으로 정보가 새 나가지 않게 조심해야겠지.”

그때였다.

영빈관의 현관문이 열리며 아론이 들어섰다.

“한! 쿤모 소장이 잠깐 보자고 합디다.”

“나 혼자 말입니까?”

지태가 약간 의아함을 담아 묻자 아론이 가벼운 미소를 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철 같은 케이스로 다시 미스터 한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차기 오더에 관한 얘기겠지.”

그렇다면 더없이 반가운 이야기다.

지태가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듯 이제는 아론을 보며 미소로 화답했다.

* * *

영빈관을 나설 때 가졌던 기대와는 달리 쿤모 소장의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 지태는 방 안에 흐르고 있는 이상한 공기를 느꼈다.

쿤모 소장은 웃으며 반겼지만, 그 웃음 또한 왠지 어색해보였다.

집무실엔 김영철이 먼저 와 있었고 쿤모 소장과 마주 앉아있었다.

“어서 오시게, 한!”

쿤모 소장은 김영철의 앞자리를 손짓으로 권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자리에 앉자마자 지태가 물었다.

밀고 당기는 일은 지태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쿤모 소장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리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저기 그게 말이지……. 분위기가 좀 안 좋게 흐르고 있어.”

무슨 분위기가 어떻게 안 좋기에 이러는가 싶어서 지태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답답했지만 그의 부연 설명이 뒤따를 줄 믿고 꾹 참고 있는데 김영철이 쿤모 소장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미얀마 연방정부에서 동무래 들여온 오더 물품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는 첩보야.”

“그 말인즉슨 마우 뉴에서 벌인 일을 미얀마 정부에서 알아차렸단 얘기야?”

“확실한 것은 나도 잘 모르갔고, 여하튼 미얀마 정보부에 누군가 제보를 한 거 같아. 동무래 물건을 개지고 시트웨를 떠나 사가잉 구를 거쳐 카친 주로 넘어간 것 같다고 말이디.”

김영철의 부연 설명에 지태는 신음성을 흘렸다.

만일 그 첩보가 사실이라면 그 배후엔 분명 임경남이 있을 것이라는 게 지태의 생각이었다.

“와 그라네? 뭐 짚이는 거라도 있네?”

“글쎄…….”

지태가 말꼬리를 흐리자 쿤모 소장이 끼어들었다.

“앞으로가 문제야. 우리 측 입장이 아주 곤란해졌어. 아, 물론 우리가 미얀마 정부한테 굳이 잘 보일 필요는 없지. 하지만 일부러 트러블을 일으켜서 거칠게 대립하는 모양새는 서로한테 피곤한 일이거든.”

지태로 인해 파생될지 모를 최악의 상황은 반갑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되면 차기 오더는 물 건너간 것인가.

지태는 심각한 표정으로 쿤모 소장을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들의 거래는……?”

“거래는 둘째 치고 이런 식이라면 미스터 한이 이 나라를 빠져나가는 일도 쉽지 않겠어.”

“하긴 그렇겠군요. 저를 타깃으로 삼아 추적하고 있다면 이미 전국에 지명수배가 내려져 있을 테니까. 근데 이 첩보는 탕 마이가 전해준 겁니까?”

반군 측에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탕 마이가 뒷주머니를 챙긴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 직설적으로 물었다.

“우린 탕 마이 그 친구의 첩보만을 백 퍼센트 신뢰하지 않아. 미얀마 정부에 심어둔 빨대가 비단 탕 마이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자세한 것은 말해줄 수 없지만 암튼 두 번, 세 번 검증한 사항이네.”

“그렇군요.”

지태가 끄덕이면서 김영철을 돌아보았다.

두 번, 세 번 검증했다는 쿤모 소장의 설명 속에 김영철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김영철은 굳이 부인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픽 웃었다.

“내래 나름 군부 내에 친분을 쌓고 있는 고위직이 몇 명 있디. 그 치들한테 전해 들었어.”

“그렇군.”

지태가 건성으로 끄덕여주고는 곧바로 쿤모 소장을 돌아보았다.

아직 자신의 질문에 답을 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래서 차기 오더가 어렵다는 말씀이십니까, 각하?”

“음. 그건 아니지.”

쿤모 소장이 머리를 내저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어렵게 맺은 인연인데 그래선 안 되지. 오더는 계속 진행할 거야. 다만…….”

쿤모 소장은 잠시 말을 끊으며 지태를 진중하게 쳐다보았다.

“다음번 오더부터는 미스터 한이 직접 날아오는 게 조금은 어렵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야. 자넨 이미 수배가 내려진 상태인데 입국하는 즉시 검거가 될 것이 아닌가. 설령 곧바로 체포를 하지 않는다 해도 연방정부에서 은밀히 물품의 이동 경로를 추적해 올 거야.”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만약 체포된다고 해도 곧바로 처벌을 받지는 않을 거였다.

하지만 심문 과정에서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쿤모 소장이 차선책을 제안했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다음번 오더는 미스터 한이 직접 날아오지 않았으면 하네. 대신 신뢰할 수 있는 대리인을 붙여두는 게 좋을 듯싶구먼.”

지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쿤모 소장의 뜻을 잘 이해했다는 듯 똑바로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알겠습니다,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께서도 보신 적이 있는 후안이라는 친구를 저를 대신해서 대리인으로 내세우도록 하죠.”

이번엔 쿤모 소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중고 SUV 말일세. 우리야 당장 꼭 필요한 것이라서 아쉽긴 하지만 운송 과정에 너무 위험성이 많아. 그것은 일단 뒤로 미뤄두는 쪽으로 하지.”

그 뒤로 쿤모 소장의 이런저런 제안과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모두 납득할 만한 수준의 것들이어서 지태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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