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오월동주(1)
제법 살기까지 어려서 정통으로 맞았다면 최하 식물인간이 되고도 남음 직했다.
그러나 지태는 특유의 놀라운 감각을 갖고 있다.
거기에 최봉준이 내비게이션 역할까지 해주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본능보다 빠르게 전해주는 최봉준의 조언을 바탕으로 지태는 두 사내의 발차기를 어렵지 않게 흘려보낼 수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반격도 이루어졌다.
스르륵.
빠각.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는 동작 그대로 왼편의 사내부터 팔꿈치를 날려 턱관절을 부숴버린 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오른편 사내에게 다가섰다.
짓궂게도 지태는 그에게 좀 더 많은 애정(?)을 쏟아 부었다.
엄지를 곧추세워 급소만을 정확히 골라 찍어댔다.
쩌억, 쩍.
콰작, 뻐억. 퍽, 퍽, 퍽.
관자놀이, 견정혈, 염천, 극천혈 등을 차례로 얻어맞은 사내는 마치 태질당한 개구리처럼 땅바닥을 뒹굴었다.
관자놀이를 타격당한 순간 이미 정신 줄을 놓은 듯 보였지만, 발동이 제대로 걸린 지태의 몸짓은 관성의 제2 법칙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살인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어서 지태는 온 힘을 쏟아 붓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사내는 한동안 침대에 누워 옴짝달싹하지 못할 것이다.
지태가 이제 고개를 들어 김영철을 바라보았다.
다음은 네 차례라는 듯 검지를 까닥여 보이자 김영철이 근육을 푸는 듯 목을 한 차례 크게 휘돌렸다.
* * *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말하길 쿤모 소장은 지금 집무실에 없다고 했다.
건물 뒤쪽 공터로 갔다는 말에 이돈두와 아론은 영빈관 경비병의 안내를 받으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적당히 환하게 밝힌 조명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초대받지 않은 자리여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던 이돈두의 얼굴에 돌연 분노가 서렸다.
“저, 저런 개새끼들!”
북한 군사고문단 일원 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지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격정에 휩싸인 이돈두를 아론이 급히 말렸다.
“Just a moment! Lee, Relax!”
“왜, 왜 말려? 저 시발 놈들이 우리 지태를 다구리 털려는 거 안 보여?”
이돈두가 아론의 손을 뿌리치며 거칠게 날뛰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소통 자체가 어렵기만 했다.
답답한 아론이 말보다는 손짓으로 지태를 가리켰다.
“뭐, 뭘 보라고?”
흥분에 못 이겨 따지면서도 유심히 지태를 살피던 이돈두는 그제야 아론이 하려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긴장하고 있는 세 명보다 지태의 표정은 한결 여유로웠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공터에서의 결투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싸움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유로움이 온 얼굴에 넘쳐흘렀던 지태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제야 이돈두가 아론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지태, 저 친구가 바로 내 베스트 프렌드야! 내 말 알아듣겠냐?”
한국어를 모르니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베스트 프렌드라는 말과 이돈두의 분위기로 눈치껏 알아들은 아론이 엄지 척을 해보였다.
그사이 한쪽에 서있던 김영철이 천천히 지태의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이돈두와 아론은 다시 긴장했다.
김영철이 바닥을 뒹굴고 있는 세 사내의 보스로 보였고, 그들과는 달리 포스 또한 예사롭지가 않아서였다.
* * *
“허접한 남조선의 날라리 놀새는 아니었던 모양이구만, 기래.”
어느새 지태의 세 걸음 앞으로 다가온 김영철이 입술 끝만 살짝 비틀며 웃었다.
“그놈의 정이 뭐라고 그나마 같은 동포라서 살살 맛만 보여준 거다. 근데 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실컷 얻어터져야 정신을 차릴 놈 같다, 넌!”
지태가 조소로 응수했다.
“내 주먹은 이 동무들하곤 차원이 다를 거이야. 각오하라.”
“고려해보지.”
“그럼 시작하디.”
말을 마친 김영철이 먼저 바닥을 쓸 듯 갈지자걸음으로 다가왔다.
스르럭, 스르럭.
그 빠르기가 이전의 고문단 사내들과는 사뭇 달랐다.
얼핏 택견의 동작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다만 부드러움을 배제한 것이 제대로 각이 잡힌 모습이었다.
어느새 지태 곁으로 바짝 다가선 김영철은 오른쪽 손날을 병 모가지 날리듯 후리며 늑골 쪽을 공략해왔다.
지태는 오른발에 중심을 두고 왼쪽으로 몸을 틀어 그의 공격을 피해갔다.
그러자 뒤늦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김영철의 짧은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엽!”
왼쪽으로 비스듬히 돌아간 지태의 겨드랑이를 노린 제2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김영철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지태가 한 템포 빨리 허리를 반으로 접듯 굽히면서 김영철의 손끝을 흘려보냈기 때문이었다.
잠깐의 여유를 가지려고 지태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빈말은 아니었군. 대가리라 그런지 아까 그놈들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동무래 나한테 감동 먹은 거이네?”
“이래서 어린놈들은 잠시라도 추켜세우면 안 된다니까. 버릇 나빠져, 역시나!”
“거 아새끼래 드럽게 말이 많구만, 기래.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내 주먹맛을 보여주갔어.”
“눼에, 눼! 그러든지 말든지!”
숨을 고르듯 잠시 신경전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다시 맞붙었다.
지태도 이번에는 방어에만 치중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제 실력을 다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어른이 어린애와 놀아주듯 톡톡 건드리며 적당히 약을 올리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것이 김영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에 이까지 악물었는데 그 안에서 진한 살기가 느껴졌다.
김영철의 화를 돋우어 이성을 잃게 만들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나가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태가 한 손을 치켜들어 보이는 것으로 짧은 사과를 대신했다.
“더 이상은 나를 욕보이지 말라!”
사과를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김영철은 살기 띠었던 표정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며 목소리를 깔았다.
그렇지만 왠지 그 말속에는 조금 전과는 달리 자신감이 결여돼있는 것처럼 들렸다.
욕보이지 말라고 한 것 자체가 지태의 실력이 자신보다는 한 수 위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지태가 다시 한번 사과의 의미로 양 주먹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보였다.
사실 김영철의 격투 실력은 가히 놀라웠다.
만일 자신의 몸속에 둥지를 튼 최봉준의 조력이 없다면 이처럼 여유를 부릴 시간은 차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최봉준이란 어드밴티지 없이 순수 실력만으로 김영철과 맞선다면 이 결투에서 자신은 결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김영철의 실력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가히 북한의 정예 특수부대원들의 수장다웠다.
지태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제부턴 진짜 남자답게 한번 붙어보자고!”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는지 김영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빛에서 다시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다.
김영철이 지태의 오른쪽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떼어갔다.
빈틈을 노리며 언제라도 공격 가능한 자세로 약 서너 걸음을 돌던 그가 불현듯 몸을 날렸다.
그러더니 전신에 힘을 실어 로켓포처럼 빠르게 주먹을 뻗어왔다.
파팟.
따악.
이미 대비하고 있던 지태는 주저 없이 김영철의 주먹을 팔목으로 걷어냈다.
그럼에도 워낙 힘을 실은 주먹이어서 그 충격의 여파는 거셌다.
맞부딪친 팔목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을 느낄 짬도 없었다.
김영철의 양손은 강력 엔진을 장착한 것처럼 쉼 없이 지태에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근접전이어서 지태 역시 해군특수전전단 시절 익힌 근접격투술로 응수했다.
타탁, 타타타탁.
빠악, 빡. 타앗, 탓.
두 사람은 곧 목인장을 앞에 두고 쿵푸 수련을 하듯 서로의 손 공격을 빠르게 걷어냈고, 때론 상대의 빈틈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은 지루함의 두꺼운 벽을 먼저 깬 것은 지태였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각오로 오른손의 힘을 풀었다.
그 틈을 노려 김영철의 왼쪽 엘보 공격이 들어와 지태의 오른쪽 턱을 강타했다.
빠각.
지태는 순간 머릿속에서 밤하늘의 별똥별들이 몽땅 다 쏟아져 내리는 경험을 맛보았다.
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지태는 일부러 치명타를 맞은 것처럼 살짝 비틀거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김영철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강력한 레프트훅을 날려 왔다.
푸슝.
지태는 이 순간을 노렸다.
기다리고 있던 김영철의 안면이 마침내 활짝 열린 것이다.
승기를 잡았다고 방심한 측면도 컸다.
레프트훅을 날린 후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뻗으려고 가드를 내린 것이 김영철의 실수였다.
지태가 허리를 굽혀 레프트훅을 흘려보낸 뒤 곧바로 파고들며 김영철의 턱을 힘껏 쳐올렸다.
빠악.
딸깍.
곧이어 턱뼈가 이완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되었다.
비록 살상이 목적은 아니라 해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깊이 각인시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이 대결을 끝낼 시간이 되기도 했고 말이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김영철을 뒤따라가며 지태는 명치 쪽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쩌억.
제대로 맞은 모양이다.
턱에 맞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연이어 명치를 파고든 공격은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김영철이 끝내 견디지를 못하고 땅바닥에 스르르 무릎을 꿇었다.
* * *
‘허, 이거야 원!’
김영철은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공화국 내 최고의 전사라고 늘 칭송만 받았던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놀새처럼 생긴 남조선의 사업가한테 패해서 이렇듯 누워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패한 정도가 아니다.
아주 개망신을 당한 케이스였다.
‘햐, 리거이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구만, 기래.’
김영철이 낮은 한숨을 허공에 내뿜었다.
아버지 김호상 상장은 최고 존엄의 경호와 수도 평양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호위사령부의 사령관이다.
예전엔 호위총국이라 불렸지만 현재는 호위사령부로 명칭이 바뀐 북한 최고의 정예부대 말이다.
이 정도의 배경이라면 북한판 금수저라 할 수 있어서 자신은 악착같이 굴지 않아도 되었다.
자연스럽게 권력의 최상부로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돼 있으니까.
그럼에도 김영철은 제힘으로 지금의 아버지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공화국 내에서 가장 인정받는 전사로 거듭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인민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태권도와 격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조금 성장한 후에는 강건 종합군사학교를 최고의 성적으로 수료하여 남들은 소위로 임관할 때 그 자신은 중위로 임관하는 특혜를 입었다.
김영철은 그 후 북한군 최고의 특수부대로 자원해 들어갔다.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훈련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최고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윽고 김일성 군사종합대학을 수석으로 수료하고 특진에 특진을 거듭하여 아직 서른다섯 젊은 나이였지만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한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인가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았다.
똑똑.
김영철이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쉴 때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어디인가?
반군 측에서 내어준 군사고문단 전용 숙소는 분명 아니었다.
인테리어가 화려하고 침대며 침구류 등이 고급인 것을 보면 고위 간부의 침실 같았다.
김영철이 노크 소리에 대꾸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들어서는 사내를 보는 순간 김영철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