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정찰총국 중좌, 김영철(2)
힘들게 운반한 오더 물품을 200여대의 중고 SUV와 군용 트럭으로 옮겨 싣고 라이자 반군 사령부로 돌아온 것은 밤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후안과 필리핀 용병들, 그리고 윤학수와 친위대원들은 미치나 시내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사령부에는 아론과 이돈두만 동행했는데, 나오칸 대령은 이돈두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다.
검증되지도 않은 인물을 반군 사령부에 들인다는 것이 왠지 께름칙하다는 이유였다.
지태는 이돈두가 자신에게 둘도 없는 절친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동행해도 피해 입힐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나오칸 대령을 설득했다.
나오칸 대령은 별도의 안내가 있을 때까지 그들을 영빈관에서 쉬도록 했다.
“내가 생각했던 반군들하고는 완전히 다른데?”
영빈관을 둘러보며 이돈두가 헛웃음을 삼켰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반군들처럼 깊은 산속에 대충 지어놓은 오두막 같은 모습을 상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태가 픽 웃으며 물었다.
“아니, 뭐 그렇다는 얘기야. 일반 정규군이나 별반 다를 게 없잖아.”
이돈두의 대답에 지태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연방정부군과 서로 총구를 맞대고는 하나 경우에 따라선 반군이 장악한 지역의 전기를 그들에게 제공해주고 별도의 세금까지 받아낸다는 사실을 이돈두에게 말해준다면 그는 아마도 기절초풍할 것이다.
하지만 지태는 굳이 그런 것까지 부연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다.
이돈두가 특별히 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그가 반군의 실상을 많이 알고 있어도 별로 좋을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태는 이돈두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였으면 했다.
행여 일이 잘못될 경우 그 피해가 이돈두에게 전가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으니까.
“굳이 사령부로 불러들였으면 각하를 만나게 해주던가. 젠장!”
따분하고 답답한 듯 아론이 투덜거렸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러겠죠. 기다려보십시다. 그리고 아론은 거래 수수료도 아직 못 받았잖습니까. 뭐가 그리 조급해서…….”
지태가 털털하게 웃으며 아론을 달랬다.
“사정이 있으면 그냥 푹 쉬고 내일 보자고 하던가. 안 그렇습니까, 한?”
“피곤하면 잠깐 눈 좀 붙여요.”
지태가 소파에 드러눕는 시늉을 해보이며 미소를 지어줄 때였다.
영빈관의 현관문이 열리고 나오칸 대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하께서 지금 바로 보자십니다. 나오시죠.”
“좀 쉴까 했더니 이제야 부르시네.”
아론이 괜히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나오칸 대령이 껄껄 웃었다.
“아론 씨는 그냥 푹 쉬셔도 됩니다. 각하께선 미스터 한만 부르셨거든.”
“이런!”
“나 혼자 말입니까?”
아론의 투덜거림과 지태의 반문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예, 그렇습니다. 미스터 한과 따로 하실 말씀이 계시다고…….”
투덜거리는 아론을 무시한 채 지태는 이돈두를 돌아보았다.
이돈두는 나오칸 대령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지태에게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나 혼자만 보고 싶다는데?”
“그래서 아론이 저 지랄하는 건가? 다녀와. 난 상관 말고.”
지태가 입술 끝으로만 웃어주었다.
나오칸 대령을 따라 밖으로 나온 지태는 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령부 내 심야의 경비 상태는 철통같았다.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담장을 따라 길게 경계를 서고 있었으며, 사방 네 군데의 높은 건물 위에서는 대공포가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있었다.
“자, 이쪽으로!”
나오칸 대령이 방향을 우측으로 틀더니 손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지난번 1차 방문 때 와본 곳이어서 눈에 익숙한 길이었지만, 지태는 그가 무안할까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길의 끄트머리에 쿤모 소장의 집무실이 있다.
불이 환하게 밝혀진 집무실 입구에는 앞에 총 자세의 경비병 둘이 보였다.
나오칸 대령이 다가오자 그들은 자세를 바로 하며 경례를 붙여왔다.
건성으로 인사를 받아준 나오칸 대령이 입구에 멈춰 서서 지태가 바짝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지태는 짐짓 걸음을 늦추며 한눈을 팔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양팔에 가득 안길 만큼 굵은 고목 아래에서 웬 수상한 그림자들이 어른거린 까닭이었다.
그들도 지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행색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북한 군사고문단.
지난번 1차 방문 때 라와 양 신병 훈련소에서 얼핏 보았던 바로 그들이었다.
지태가 이제는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똑바로 쳐다보자 그들 중 한 명이 검지와 중지만을 이용해 장난스럽게 경례를 해보였다.
어둠 속이지만 하얗게 드러낸 치아가 똑똑히 보였다.
지태는 떫게 입맛을 다셨다.
“미스터 한, 일단 들어가십시다.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나오칸 대령이 손짓을 하며 어서 다가오기를 재촉했다.
지태는 몸을 틀었다.
하지만 걸어오는 동안에도 고개는 사내들을 향해 있었다.
“아, 어서 와, 미스터 한!”
부사령관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있던 쿤모 소장이 한 손을 어깨 높이로 치켜들면서 반겼다.
지태는 자세를 바로 한 채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리 와서 앉지.”
쿤모 소장은 자신의 왼편 소파를 가리켰다.
오른편 소파에는 낯선 사내 한 명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지태가 살짝 인상을 구기며 낯선 사내와 쿤모 소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낯선 사내가 조금 전 밖에서 보았던 의문의 사내들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지태는 일단 쿤모 소장의 권유대로 왼편 소파에 앉았다.
“누굽니까, 이 친구는?
앉자마자 지태가 쿤모 소장을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벌써 눈치챘을 텐데, 안 그래?”
“그니까요. 왜 이 친구와 제가 한자리에 있는 겁니까?”
“거, 보기보담 드럽게 까칠하구만, 기래.”
지태가 되묻고 쿤모 소장이 그저 웃음기 띤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일 때 낯선 사내가 까칠한 어투로 불쑥 끼어들었다.
북한 특유의 말투였다.
“우리가 얼싸안고 반길 사이는 아니지. 우린 휴전 상태의 적대적 관계가 아닌가. 내 말이 틀렸어?”
그러자 낯선 사내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거다.
지태는 쓰디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의 시선은 무시한 채 쿤모 소장을 돌아보았다.
다시금 어깨를 으쓱해 보인 쿤모 소장이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했음을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이 친구가 자넬 한번 봤으면 해서 말이지. 다른 이유는 없어.”
“그렇담 얼굴을 봤으니 됐군요. 각하는 내일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먼 길에 피로가 너무 쌓여서…….”
“한민족끼리 낯짝 좀 마주하고 인사나 나누자는 의미야. 거 너무 비싸게 굴디 말라.”
“이 빨갱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지?”
지태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매섭게 째렸다.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아챌 것 같은 기세임에도 사내는 피식 웃었다.
“난 한 선생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어, 야. 그저 머나먼 타국에서 한 핏줄을 가진 동포를 만나 반가워서 기러는 거이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서로 반길 처지는 아니라고 했잖아. 이렇게 얼굴 맞댈 사이도 아니고.”
분위기가 살벌하게 돌아가자 쿤모 소장이 얼른 중재에 나섰다.
자신이 이 자리를 주선했으니 일단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보는 게 순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 진정들 하시게. 이러면 내가 무안해져 버리잖나.”
쿤모 소장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태가 쩝 소리가 나도록 떫게 입맛을 다시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자네들이 서로 반길 처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렇게 만났잖은가. 가벼운 인사라도 나누시게.”
쿤모 소장의 권유에 사내가 먼저 반응을 보이며 씩 웃었다.
“내래 조선 인민민주공화국 호위사령부 대외협력국 중좌 김영철이라고 하네.”
처음부터 서로가 막말로 나온 상태여서 김영철은 제 소개를 하며 편하게 말을 놓았다.
상대가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혀왔으니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응수를 해주어야 했다.
“한스무역 대표 한지태!”
지태는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자신에 대한 신상은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는 듯 김영철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손을 내밀었다.
거기에 응할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지태가 단칼에 무시해버리자 이번엔 김영철이 떫은 입맛을 다시며 손을 거두어갔다.
“그나저나 무슨 꿍꿍이야? 왜 쿤모 소장 각하한테 선을 댔어? 나한테 뭐라도 뜯어먹을 것이 없을까 간을 보는 거라면 이렇게 대답해주지. 꿈! 깨!”
“허! 리거야 원!”
한국말로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를 눈치로 알아먹은 쿤모 소장이 헛기침을 해댔다.
“미스터 한! 김 중좌가 자네에게 원하는 것은 단지 이거 하나네. 우리 측에 협조하고 있는 북조선 군사고문단들의 존재를 밖에 알리지 말라는 것! 근데 혹시 KCIA에 벌써 알린 건 아니지?”
“한국 속담에 긁어 부스럼이란 말이 있습니다. 괜히 불려 다니며 시달리게 될 일을 제가 왜 굳이 만들겠습니까?”
“하하. 그건 잘했네. 자네도 알다시피 이 친구들이 요즘 국제적으로 아주 골치 아픈 처지에 놓여 있거든. 아, 물론 이 친구들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이 사실이 밖으로 새 나간다면 아주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할 테지.”
북한이 핵개발과 실험 및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등으로 인해 유엔 제재를 받고 있는 현실을 언급한 거였다.
북한은 현재 유엔 결의에 따라 수출입은 물론 인력 송출까지 막혀 있는 상황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 또한 일부러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특히 저처럼 비즈니스맨들은 사업과 하등 관계가 없는 일에 얽히는 걸 극도로 싫어하거든요. 그런 점은 걱정 마십시오, 각하!”
“음, 좋아!”
쿤모 소장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영철이 한국말로 다시 끼어들었다.
“부사령관 선생의 말씀에 하나만 더 추가하고 싶구만, 기래.”
“추가?”
“추가라기보다는 거래라고 정정하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게 왠지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지태가 날카로운 눈매로 쏘아보았는데 김영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다음 오더부터는 우리가 자네의 경호를 대신하디. 한 선생은 그에 대한 합당한 수수료만 우리에게 주면 되는 거이고.”
“뭐, 뭐가 어쩌고 어째?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릴! 내가 왜?”
“길티 않갔다면 쿤모 소장이 차기 오더를 안 줄 테니까. 기게 차기 거래 조건이 될 거이야.”
김영철이 쿤모 소장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한국말로 나눈 대화였고, 김영철이 자신을 고갯짓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쿤모 소장은 못 본 척 딴청을 피워댔다.
사전에 무슨 합의가 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지태가 그 사실을 쿤모 소장에게 확인받고자 했다.
“각하! 이 친구하고 무슨 합의 같은 게 있었습니까?”
그제야 쿤모 소장은 지태를 겸연쩍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우린 정부군에 비해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게 많아. 보유하고 있는 무기는 물론 병사들의 전투력 면에서도 비교할 바가 못 되지. 그래서 군사고문단의 역할이 우리에겐 아주 절실했어. 말하자면 기브앤드테이크! 그런 차원으로 이해해줬음 하네, 미스터 한!”
‘허!’
지태는 기가 찼다.
하지만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 대뜸 반박을 해서는 안 되었다.
더 이상 오버하며 쿤모 소장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자칫 반군과의 차기 거래가 어려워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반군과의 거래를 포기하기엔 그 규모가 너무도 컸다.
그 천문학적인 액수를 포기할 만큼 지태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조건 말랑말랑하게 물러선다는 게 지태는 자존심이 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