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정찰총국 중좌, 김영철(1)
지태는 복부 총상을 입은 용병의 수술이 끝나자 이동 준비를 서둘렀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지만, 검문소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마음 편히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앰뷸런스를 대절해 수술을 마친 용병과 부상당한 인원들을 태워 일단 주도인 미치나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지태는 미치나의 병원에서 그들이 치료를 받는 동안 반군 측에 오더 물건을 넘길 생각이었다.
카친 주 경계를 넘어서자 도로는 대체적으로 산악이 아닌 평지에 건설돼 있었다.
그러나 미치나까지 약 60마일을 남겨둔 지점부터는 다시 산악 지대가 시작되었다.
지태는 산악 지대에 접어들기 전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어제 점심 이후로 아직 식사다운 식사도 하지 못한 처지라서 제대로 된 요깃거리부터 찾아야 했다.
마침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은 곳에는 제법 큰 식당들이 몰려있었다.
많은 인원들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가 없어 지태는 인근 식당 3곳을 통째로 빌렸다.
지태와 팀장급들은 야외에 있는 목조 테이블에서 따로 밥상을 받았다.
검문소의 장교와 경비 병력들을 처리하고 돌아온 후안의 뒤늦은 보고를 듣기 위함이었다.
이른 아침 햇살이 비칠 무렵 낸시앙 시내 병원에서 다시 합류한 후안과는 경황이 없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잘 처리하고 왔다는 간단한 보고만 받았을 뿐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 후안은 작업 내용을 비교적 꼼꼼히 설명해줬다.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지태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역시 듬직한 후안이었다.
마지막 뒤처리 부분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여서 결국 엄지까지 척 들어보였다.
“그 와중에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했어?”
“뭔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적들도 아니고 미얀마 연방정부군들을 몰살시킨 사건입니다. 한바탕 난리가 나고 전국적으로 계엄에 준하는 비상이 걸릴 것이 뻔한데, 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게 뭐라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했어. 지금쯤 전국에 더 큰 비상이 내려졌겠지만, 후안 덕분에 우린 잠시나마 시간을 벌 수 있겠다.”
“정말로 로힝야 구원군의 소행이라고 믿어줄까요?”
아론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글쎄요. 하지만 그 이전에 시트웨에서 폭탄 테러가 두 건이나 터졌으니까 혹 모르죠. 그들의 소행으로 믿어줄지도.”
“그럼 오죽 좋겠습니까만…….”
아론은 약간의 불안감을 담은 시선으로 지태를 쳐다보았다.
“식사나 마저 하죠.”
지태가 안심시키려는 듯 포근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론이 내려놓았던 포크를 다시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띠리리리릿, 띠리리리릿.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그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한 아론이 짐짓 찡그렸다.
쿤모 소장의 참모장인 나오칸 대령이었다.
“예, 아론입니다.”
-지금 어디요?
“카친 주 경계를 넘었습니다. 미치나까지는 약 60마일 정도 남았습니다만…….”
-근데 혹시 그거 당신들 작품이오?
대뜸 물어오는 바람에 아론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그가 말한 의미를 알아들었다.
그래도 일단은 시치미를 뚝 뗐다.
“그거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뭘 말씀하시는 거요?”
-정말 이럴 겁니까?
“아니, 뭘?”
-마우 뉴 검문소에서 오늘 새벽에 일어난 대규모 학살 말이오!
“……!”
아론이 입맛을 쩝 다셨다.
그의 침묵이 긍정의 대답인 것을 확신한 나오칸 대령이 혀를 찼다.
-이거야, 원! 그나저나 대단들 하시오. 수송 경호요원들을 도대체 몇 명이나 데리고 왔기에 그 많은 병력들을 한꺼번에 몰살시켰단 말입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길목을 막아놓고 우릴 죽이려 하는데 살기 위해선 어쩝니까.”
-자세한 것은 나중에 차차 듣기로 하고 일단은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오칸 대령은 수송 행렬이 라이자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다.
지금은 전국에 비상이 걸려서 라이자로 곧장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거다.
미치나 인근에서 어둠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으면 자신들이 약속된 장소로 오겠다는 것이다.
후안이 로힝야족의 소행으로 꾸미긴 했지만 그 효과가 얼마나 갈지는 아직 모른다.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고 조사에 들어가다 보면 가장 먼저 타깃이 되는 것은 카친 반군인 KIA일 것이다.
지태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아론은 지태의 승낙이 떨어지자 나오칸 대령의 말에 따르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오히려 잘되었어요.”
지태가 후식으로 나온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그러잖아도 미치나에 도착하면 내가 먼저 그런 식으로 요청할 생각이었어요. 반군 측에 사람을 보내달라고.”
아론이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자 지태가 식사를 마치고 나와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트럭 기사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론이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아!’하고 내뱉었다.
“하긴 그러네요. 비상시국이 아니더라도 반군 측에서는 저들에게 자신들의 작전 지역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을 겁니다.”
“근데 믿을 만한 사람들입니까, 저 친구들?”
“나는 저들을 못 믿어도 저 친구들은 나를 믿을 겁니다.”
아론이 의미가 철철 넘치는 웃음을 지어보이자 지태가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쯤은 대충 눈치로 알고 있거든요. 주둥이를 잘못 놀리면 어찌 된다는 것을 잘 알 테니 걱정 말라는 얘깁니다.”
자신은 쿤사의 숨겨놓은 아들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인즉슨 자신의 뒤에는 정부군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거대 마약 조직이 있으니 보복이 두려워서라도 입을 가벼이 놀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거다.
“하긴 저들은 우리 물건의 종착지가 카친 주정부라고 알고 있을 테니 그건 걱정할 바가 안 돼요. 한데 문제는 연방정부군들을 몰살시킨 일입니다.”
“그건 특히 더 입을 못 열어요.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간 우리와 한패로 몰려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제 무덤을 파겠습니까?”
“그렇다면야 뭐…….”
아직 의심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지태는 일단 아론의 장담을 믿어보기로 했다.
* * *
웬만하면 혹시 모를 검문을 피해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우리나라처럼 시골 구석구석까지 촘촘한 도로망이 뻗어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다보면 어느 곳에서든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강물은 차량 이동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수상 교통이 오히려 더 발달된 이 나라에서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찾는 일은 참으로 어려웠다.
대부분 도시를 끼고 있는 곳이 아니라면 다리를 구경하는 일은 아주 요원한 형편이었다.
카친의 주도인 미치나의 경우에도 그랬다.
도시를 휘감고 도는 아리와디 강을 차로 건널 수 있는 대교는 딱 한 개뿐이었다.
지태는 일부러 시간을 지체했다가 어둠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수송 행렬을 이끌고 그 하나뿐인 다리를 건넜다.
다행히 미얀마 연방정부가 걸어놓은 비상경계령의 여파는 아직 미치나까지 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검문이 강화되었다던가, 그에 준하는 어떤 긴장감이 흐르는 모습은 아니었다.
지태가 이끄는 수송 행렬은 미치나 시내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위치한 다리를 건너 다시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오칸 대령과 만나기로 약속한 와이마우라는 곳으로 이동하기 위함이었다.
와이마우는 미치나와는 아리와디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형국이었는데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도시였다.
소박하긴 해도 나름 운치가 있어 보이는 곳.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나오칸 대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가벼운 무장을 한 대규모 병력들이 질서정연하게 모여 있었다.
“어서 오시오, 미스터 한!”
나오칸 대령이 차에서 내려 다가오는 지태에게 악수를 청했다.
“약속된 기일보다 좀 늦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람 사는 일이 어디 시간표대로 정확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이만하기가 참으로 다행입니다.”
나오칸 대령은 사람을 다시 봐야겠다는 듯 지태의 면모를 새삼스럽게 훑으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지태의 뒤쪽을 살폈는데 아마도 그가 이끌고 온 필리핀 용병들과 이돈두의 친위대들을 훑어보는 것 같았다.
“저 인원이 전붑니까?”
제 눈에는 고작 열댓 명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네 명이 빠진 숫잡니다. 셋이 총상을 입었는데 미치나 시내 병원에 있어요. 한 명은 그들을 보살피는 보호자로 붙여놨고.”
“아우, 그래도…….”
그럼에도 대단하다는 식으로 나오칸 대령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가잉 군 사령부의 정예라 할 수 있는 경비대 대원 50여 명을 몰살시켰다.
자신들로서는 가히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전과(戰果)를 올린 것이다.
대충 수인사를 마친 나오칸 대령이 이제는 서둘렀다.
“자, 물건부터 옮겨 실으십시다.”
지태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저 많은 물량을 겨우 군용 트럭 몇 대로 가져가시려고요?”
중고 SUV를 운전해 갈 병력 200명 외에 군용 트럭은 약 20여 대 정도밖에는 안되어서 하는 말이었다.
지태의 물음에 나오칸 대령이 픽 웃었다.
“미스터 한, 저 200대의 SUV를 그냥 놀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하기는 그랬다.
대형 포장을 뜯고 그 안에 든 물품들을 작은 단위로 쪼개어 SUV에 옮겨 실으면 될 것이다.
미처 생각을 못했다는 듯 지태가 머쓱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정색하며 나오칸 대령을 쳐다보았다.
“그전에 계산부터 하는 게 옳지 않습니까?”
오더물품 대금 중 1천만 달러는 이미 선불로 받았으니 나머지 대금 8백만 달러만 받아내면 된다.
그런데 물품을 이곳에서 넘기게 되면 굳이 라이자 반군 사령부까지 들어갈 일이 없는 것이다.
혹시라도 물건을 넘겨받았다고 반군 측에서 다른 불순한 생각을 품을 수도 있고 말이다.
지태의 그런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나오칸 대령이 쓰게 웃었다.
“우릴 못 믿는 겁니까?”
“이게 믿고 안 믿는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기왕이면 계산을 정확하고 깔끔하게 하자는 의미지.”
“아무래도 첫 거래다 보니까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알겠습니다, 미스터 한의 요구대로 해주겠소. 그러잖아도 부사령관 각하께서 각별히 배려를 해주시더군요. 사실은 잔금을 가져왔소!”
지태가 어떻게 나오는지 의중을 한번 떠보려는 의도였던 것 같았다.
그리되니 정작 염치가 없어지는 쪽은 지태였다.
당연히 받을 돈을 받아내는 것인데도 괜히 껄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오칸 대령이 가볍게 미소 짓고는 지태를 정색하며 쳐다보았다.
“각하께서 미스터 한과 함께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계신 건가…?”
쿤모 소장의 초대를 대놓고 거부할 수는 없어서 지태는 약간 머뭇거리듯 되물었다.
“글쎄요. 각하의 깊은 뜻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다음 오더 건 때문인 듯합니다.”
그거야 귀가 솔깃할 소리였다.
지태는 그제야 은근히 긴장했던 표정을 풀며 밝은 목소리로 답을 주었다.
“누구의 명이신데 안 가겠습니까. 당연히 찾아뵈어야지요.”
지태는 나오칸 대령이 부하들을 시켜 물건을 옮기는 사이 저만치에 서있던 후안을 손짓으로 불렀다.
“예, 보스!”
“나는 나오칸 대령을 따라 사령부에 들어가 봐야 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잔금을 후안이 좀 맡아줘야겠어.”
지태의 말이 끝나자 후안은 흠칫 놀라는 얼굴이었다.
자그마치 8백만 달러, 환화로 환산하면 86억 원이 넘는 돈이다.
그것을 자신에게 선뜻 맡기겠다니 놀랄 수밖에.
“보스!”
“알아! 하지만 믿어서 하는 부탁이야.”
“하, 보스!”
후안이 말을 잇지 못하고 연신 지태만 불러댔다.
“부탁 좀 할게. 오늘 밤은 아무 생각 없이 호텔에서 쉬고 내일 날이 밝으면 한스그룹 법인계좌로 입금 처리해주도록 하고.”
“염려 마십시오, 보스. 확실하게 작업하겠습니다.”
“고마워, 후안!”
지태는 그윽한 미소로 후안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