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진로 급선회(2)
아론의 기분을 눈치챈 듯 지태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들 중 누구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부경의 무서운 정보력을 조심하자는 겁니다. 한국의 재벌 기업들은 전 세계에 정보망들이 넘쳐납니다. 어지간한 나라의 정보부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그제야 아론의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이해한다는 듯 눈을 마주치며 고갯짓을 한 후 수정된 계획을 물었다.
“그럼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으시려고?”
“고속도로 대신 지방도를 이용하십시다. 도로 사정은 좀 더 불편하고 어렵겠지만.”
그러면서 지태가 지도를 펼쳤는데, 빨간 펜으로 표시되었던 부분 말고 파란 펜으로 새로 표시된 부분이 보였다.
아마 지난번 방문 때 차선책으로 생각해두었던 루트 같았다.
“이 방면으로 가게 되면 만달레이 시내를 거치지 않고 북쪽으로 좀 더 우회하게 되는데…?”
시간이 지체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예정된 시간에서 하루를 더 여유 있게 잡았잖습니까. 내 말대로 하십시다.”
오너가 그러자는데 뭐라 딴죽을 걸겠는가.
아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출발합시다. 팀장들은 가는 도중에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의심스러운 게 있다면 즉각 보고를 해주시고!”
아론은 그냥 무덤덤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고, 후안만 각이 잡힌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해왔다.
“예, 보스!”
* * *
메이크틸라를 출발한 수송 행렬은 북쪽으로 이어진 지방도를 따라 이동했다.
역시나 고속도로가 아니어서 가는 길은 협소하고 사정 또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중고차를 실은 트레일러나 짐을 가득 채운 대형 트럭들은 제 속력을 낼 수 없어 저속 운행을 해야만 한다.
고속도로든 지방도든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수송 행렬이 만달레이 부근에 이르렀을 때 탕 마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지태에게 전화를 걸기 전 아론과 먼저 통화를 했다고 했다.
- 진로를 바꾼 건 잘한 거 같습니다, 한!
“그 말씀은……?”
- 예. 만달레이 북쪽으로 검문이 강화되고 있다는 정봅니다. 아무래도 부경그룹에서 정부 측에 손을 쓴 거 같아요. 아님 경찰 쪽에 뇌물을 먹였든지.
탕 마이는 확신하듯 내뱉었다.
- 헬기가 뜬 건 보았죠?
“아까 낮에 탕 마이 씨 전화를 받고 얼마 있지 않아서 메이크틸라 상공에도 헬기가 나타났었습니다.”
- 둘러봤는데도 못 찾으니까 미스터 한이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확신하는 거 같아요. 남쪽으로 방향을 잡을 거라면 굳이 시트웨항으로 화물선을 대지는 않았을 테니까.
“목적지는 아직 모르는 거죠? 막연히 북쪽으로 향했을 거라고만 생각하는 거겠죠?”
-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달레이 시내를 넘어 북쪽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막아 놓은 거죠. 이번 거래가 정상적인 거라면 뇌물을 쓴다 해도 경찰들이 잘 안 움직입니다. 별 영양가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부경 측에서 꼼수를 쓴 거 같습니다. 지금 그 물건들이 전부 밀수품이라고!
지태는 하마터면 ‘개자식들!’이라는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루트를 변경하길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 아론한테 들었는데 사가잉 방면으로 빠지는 루트를 택했다면서요?
“좀 우회하더라도 그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그건 아주 잘한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다시 연락하죠.
탕 마이는 전화를 끊었다.
지태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이돈두가 통화 내용을 물었다.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자 그는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루트를 급변경한 지태의 판단을 제 딴엔 칭찬해주고 있는 것이다.
선두에서 수송단을 이끄는 아론을 따라 수송 행렬은 만달레이 시내에 이르기 전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만달레이 구와 사가잉 구를 가로지르는 이라와디 강에는 다리가 두 개 있는데 그들이 선택한 다리는 잉와(Inwa) 브리지였다.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만달레이 구와 사가잉 구를 잇는 만달레이- 쉐보 고속도로의 시작점인 야다나본 브리지가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쪽엔 경찰들의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에 잉와 대교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한 것이었다.
이라와디 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은 사가잉 구였다.
수송 행렬은 이라와디 강을 건너자마자 만달레이- 쉐보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했던 지방도를 달려오면서 피로에 지친 수송 행렬은 반듯한 도로를 달리면서 다시 힘을 얻는 듯했다.
시간은 이제 자정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 * *
새벽 2시.
임경남은 아직 부경 물산 대표실에 있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미얀마에서 날아오는 보고를 받으려는 것이다.
사장이 퇴근을 안 하니 비서실장 오한표는 물론이고 직원들도 비상대기 상태였다.
지금 미얀마는 밤 11시 30분을 넘겼을 시간이었다.
임경남이 소파에 몸을 묻은 채 한손에는 술잔을, 다른 한손으로는 턱을 괸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조는 것은 아니었다.
두 눈은 감고 있지만, 귀는 열어 둔 채 그 앞에서 전화 통화 중인 오한표 실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변동 사항이 있으면 즉각 보고하도록!”
오한표가 전화를 끊는 것과 동시에 임경남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오한표 실장은 순간 지은 죄도 없이 몸을 움찔했다.
“뭐랍니까?”
임경남이 약간 술기운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술기운인지 피곤에 절어서인지는 몰라도 바라보는 그의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느껴졌다.
“일단 북쪽지방의 구(Division)와 주(State)의 경계에 있는 검문소마다 정보를 흘렸다고 합니다.”
“밀수품을 수송하는 무리가 있다고 말이지?”
“예. 만약 발견하게 되면 이게 웬 떡이냐 할 겁니다. 정상적인 거래 물건이 아니라 밀수품이라니 먼저 보는 놈이 임자라고 환장하며 달려들 겁니다.”
“부정부패가 심한 나라일수록 공무원들을 조종하기는 쉽지. 떡밥만 뿌려 주면 저네들이 알아서 깔끔하게 설거지를 할 테니까.”
“맞습니다, 사장님. 걸려들기만 한다면 아마도 그놈은 오늘 밤 살아남긴 힘들 겁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릴 테니까요.”
오한표 실장이 아부의 달인처럼 임경남의 비위를 맞췄다.
‘그야 내심 바라던 바니까.’
임경남은 입술 끝을 비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드는 표정으로 변했다.
“근데 그 새끼들은 도대체 물건을 어디로 가져가고 있는 거야? 미얀마 중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는 만달레이 아니오? 거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인 거야?”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성급히 답변을 내놓지 말아야 한다.
괜히 어설픈 대답을 내놨다간 제 발등을 스스로 찍는 결과로 이어질 테니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것이지만 오한표 실장의 응수가 없자 임경남은 금세 시들해진 표정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들어 다시금 입술을 적셨다.
* * *
- 한!
선도차를 이끄는 아론의 목소리가 워키토키를 통해 흘러나왔다.
새벽 5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한 시간 전 있었던 잠깐의 휴식시간 동안 이돈두와 운전석을 바꾼 지태가 얼른 무전을 받았다.
“예, 아론!”
- 이제 곧 카친 주의 경계 도시에 이릅니다. 사가잉 구의 마지막 도시죠.
“아무래도 북쪽으로 갈수록 검문이 더 심하겠죠?”
- 이전에 비해 좀 심하긴 하겠지만 어차피 돈이 깡패니까 상관없습니다. 이 나라에서 뇌물에 안 넘어가는 새끼들은 없으니까요.
아론의 대답에 지태가 픽 웃었다.
라카인 주를 넘어 마궤이 구로 진입할 당시와 사가잉 구 초입에서 있었던 두 번의 검문소는 아론의 말처럼 몇 푼의 뇌물을 찔러 주니 그럭저럭 수월하게 통과가 되었었다.
“아론! 검문소에 다다르면 다시 무전 날려요. 내가 그 앞으로 달려갈 테니까.”
지태는 그 말을 끝으로 워키토키를 내려놓았다.
“사실 미얀마로 넘어오기 전만 해도 좀 긴장했는데, 뭐 별 거 아니네, 미얀마!”
이돈두가 무전을 끝내고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는 지태를 흘깃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그럼 8,9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를 상상했냐?”
“아니 뭐 그냥 좋다 이거지.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이런 거……. 크큭.”
아닌 게 아니라 이돈두의 말처럼 큰 사고 없이 무탈하게 진행되는 수송길이 지태는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부디 이대로 물품을 넘겨줄 때까지 사건사고 없이 무난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앞서 가던 트럭의 후미에 빨간 불이 켜졌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다는 것은 검문소가 전방에 있다는 뜻일 터.
그에 맞춰서 때마침 아론의 무전이 날아왔다.
- 한! 저 앞에 검문솝니다.
“예,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가죠.”
무전을 마친 지태가 이돈두를 돌아보았다.
“행렬 맨 앞으로 가자.”
“검문소야?”
지태가 긴장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러면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돈 봉투를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으로 미리 준비한 뇌물이었다.
앞선 두 번의 검문소 경우처럼 이 봉투 안에도 미화 5000달러씩을 넣어 두었다.
저 앞에 불이 환하게 밝혀진 검문소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곳만 무사히 통과하면 카친 반군의 수도인 라이자까지는 이제 별로 거치적거리는 일없이 무난하게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지태는 무심결에 들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빌었다.
‘제발 이번에도 별 탈이 없기를!’
그런데 이곳의 분위기가 왠지 좀 수상했다.
이전에 지나쳐왔던 두 곳의 검문소와는 달리 살벌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우선 자동소총 등으로 무장한 1개 분대쯤 되는 병력들의 눈빛부터가 매서웠으며 초소장의 신분과 계급 또한 다른 검문소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나쳐온 두 곳은 자동소총 등으로 무장을 하긴 했어도 모두가 경찰들이었다.
한데 이곳에선 경찰 대신 모두가 연방정부의 군인들로 채워져 있다.
검문소장으로 보이는 장교 하나가 허리춤에 권총을 매단 채 이제 막 SUV에서 내리는 지태를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허리에 양손을 짚고 선 그의 어깨엔 동그라미 속에 별 하나가 들어가 있는 견장이 달려 있다.
한국으로 치면 소령 계급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보 흐므라고 했다.
“하, 이런!”
지태가 다가오자 아론이 돌아보며 난색을 표했다.
그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듯했고 적응이 안 된다는 듯 당황한 표정이었다.
지태는 무심히 아론을 지나친 뒤 검문소장으로 보이는 장교 쪽으로 다가섰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나는 한국에서 무역업을 하는 한지태라고 합니다.”
“……!”
지태가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자 장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저 훑어댈 뿐이었다.
머쓱했지만 딱히 이 장교를 탓할 일은 아니다.
지태는 내밀었던 손을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어디로 가는 길이오?”
지태에 대한 관찰이 다 끝난 듯 장교가 날카로운 시선 끝으로 물어왔다.
“미치나로 갑니다.”
미치나(Myitkyina)는 카친 주(Kachin State)의 주도(州都)였다.
“혹시 지금 운송하려는 게 밀수품 아니오?”
헐.
지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다가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밀수품이라뇨. 절대 아닙니다. 시트웨 세관에서 정식 통관절차를 밟은 물품들입니다.”
“우리 군에 접수된 신빙성 있는 제보가 있어서 그럽니다. 확실해요?”
“정 그러시다면 통관서류를 보여드리죠. 시트웨 세관에서 발급해준 겁니다.”
그러면서 슬쩍 아론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