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진로 급선회(1)
그러다가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닫고는 약간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자신보다도 스무 살 가까이 많은 오한표 실장에게 너무 함부로 대하면 안 되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은밀한 부분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사람 부리는 입장에서 아랫사람을 잘못 관리해 개피를 보는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봐온 임경남이었다.
지금은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지만, 자신의 날개가 떨어져 힘을 쓸 수 없을 땐 주인의 목을 치는 칼날이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오 실장,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흥분했어. 이게 오 실장 잘못도 아닌데 말이야.”
돌연 태도를 바꾼 임경남의 모습에 오한표 실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고, 그동안 이런 모습을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오한표 실장은 아랫사람이 갖춰야할 처신의 도를 이미 깨우친 사람이다.
이럴 땐 더더욱 자신의 자세를 낮춰야 한다는 것.
“아닙니다, 사장님. 제가 좀 더 그쪽을 상세히 살피고 계속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여하튼 회장님께선 한지태 그놈이 도대체 미얀마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보는 선에서 끝내라 하셨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다신 대가리를 들이밀지 못하게 아예 싹을 짓밟아 줄 생각이란 말입니다. 알겠어요?”
“잘 알고 있습니다. 저… 그런 차원에서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말해 봐요.”
임경남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쳐다보았다.
오한표 실장이 보기에 그 표정은 만일 이상한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애써 누그러뜨렸던 화를 다시 폭발하겠다는 예비 신호 같았다.
“직원들을 찾는 일과 병행해서 헬기 몇 대를 임대해 띄웠으면 합니다.”
“헬기? 그게 무슨…?”
“어차피 물건을 싣고 시트웨를 빠져나갈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대충 세 군데만 추적해도 놈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대형 트럭 60여 대가 넘는 행렬이라면 눈에 띄기 쉬울 테고 말입니다.”
“음!”
임경남이 꼬투리라도 잡으려고 게슴츠레 떴던 시선을 거두어 가며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의 방법 같았다.
“그럼 당장 시행하도록 명령을 내려요. 거기에 소요되는 경비 같은 건 걱정하지 말라 그러고.”
임경남은 손짓을 털어 내며 어서 나가 보라는 사인을 보냈다.
오한표 실장이 대표실을 나가자 임경남은 깔끔하게 손질된 자신의 턱을 쓸며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 * *
아무래도 거대 수송 행렬이다 보니 차량들의 전진 속도가 엄청 느렸다.
동이 트기도 전인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오후 2시를 훨씬 넘긴 지금, 그들이 다다른 곳은 마궤이 구(Magway Division)의 메이크틸라(Meiktila)라는 도시였다.
마궤이 구의 딱 중간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한국으로 치면 춘천을 연상케 하는 호반 도시였다.
메이크틸라 호수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된 곳인데, 우거진 숲과 어우러져 한결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내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벌써 지나쳤다.
새벽에 집결해 아침도 거른 채 내처 달려온 길이었다.
내심 말은 안 해도 그 누구보다 기사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을 것이다.
지태는 시내 외곽의 도로 갓길에 수송 행렬을 세우게 한 뒤 인근에 있는 식당들을 섭외하여 우선 수송 기사들부터 점심을 먹게 했다.
돈두파의 친위대와 필리핀 용병들이 식당 출입구 앞에 우뚝 서있는 아름드리 고목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지태는 주요 인물들을 간이 테이블로 불러들였다.
아론과 이돈두, 그리고 후안과 윤학수 등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미얀마 전도가 펼쳐져 있었는데, 예전에 루트를 점검할 당시 빨간 펜으로 이동 경로를 표시해 두었던 바로 그 지도였다.
“1박 2일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예상이 빗나갈 것 같아요.”
지태가 부정적으로 고개를 흔들흔들 털어댔다.
아론도 동의하는 터라 지태의 고갯짓 리듬에 맞춰 끄덕거렸다.
“하루 정도 늦어진다고 해도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지태는 아론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뭔가 께름칙한 듯 입술을 모은 채 묵직한 콧김을 내뿜었다.
그때였다.
지태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건 탕 마이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예, 한지탭니다.”
- 아, 미스터 한! 지금 어디쯤입니까?
“메이크틸라입니다만…….”
- 얼마 가지 못했군요.
“이곳의 도로 사정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는 안전이 우선이니까요.”
- 그래요. 안전이 우선이죠. 그보다 알려 드릴 게 있습니다.
갑자기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탕 마이의 목소리가 쇠뭉치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졌다.
느낌이 별로 안 좋았다.
- 혹시 시트웨에서 부경 쪽 사람들을 작업한 거, 미스터 한의 작품입니까?
“예. 우리를 미행하고 있어서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계속 꼬리가 붙어 우리의 목적지가 노출되면 곤란하니까.”
- 그건 잘하신 거지만… 혹시 죽였습니까?
“아뇨! 이삼 일만 잡아두라고 했는데, 왜요?”
- 지금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 사람들을 찾으려고 경찰뿐만 아니라 군에서까지 나섰단 말입니다. 근데 당장 급한 일은 그게 아니고…….
탕 마이는 잠시 뜸을 들였다.
지태가 답답하고 불길한 마음에 스마트폰을 귀에 더 바짝 갖다 붙였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면 뭐가……?”
- 헬기를 동원했습니다.
“헬기요?”
- 시트웨에서 외부로 나가는 길이야 답이 딱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북으로 친 주(Chin State), 동부 쪽으로는 마궤이 구와 만달레이, 그도 아니면 사가잉 구일 테니까요.
“흠!”
지태가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띄기 쉬운 수송 행렬이니 도로 몇 군데만 훑으면 자신들이 금세 노출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담 일단 소나기는 피해 가야겠군요.”
-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어두워지면 헬기를 띄울 수 없습니다. 허가가 나지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낮 동안엔 어쩔 수 없이 운행을 중단해야겠군요. 그리고…….”
- 예, 말씀하시지요.
“아, 아닙니다. 됐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하기로 하죠.”
지태는 곧 종료 버튼을 눌렀다.
영어를 알아듣는 아론이나 후안은 통화 내용을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이돈두와 윤학수는 도대체 무슨 말들이 오갔는가 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태의 표정에서 무슨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눈치로 대강 알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이돈두가 지태의 표정을 다시 살피며 물었다.
“부경 쪽에서 우릴 뒤쫓으려고 헬기를 띄웠대.”
“이런 시발 놈들!”
하다가 돌연 표정을 바꿨다.
“그럴 게 아니라 전부 잡아다 조져 버리면 되잖아. 우리가 그 새끼들한테 겁먹을 필요 있냐?”
지태가 입을 떡 벌리고 돌아보았다.
참으로 속 편한 소리를 한다는 식이다.
정상적이고 투명한 거래라면 이돈두의 말처럼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반군과의 거래였다.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지면 반역죄로 줄줄이 엮여서 사형에 처해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거래인 거다.
뒤늦게 지태의 의중을 눈치챈 이돈두가 딴청을 피우듯 고개를 돌렸다.
지태가 아론과 후안을 쳐다보았다.
“이곳으로 언제 헬기가 날아올지 모르니까 일단 식사를 마친 인원부터 차량을 분산시켜 이동시키도록 합시다. 헬기에서 내려다보아도 눈에 안 띌 만한 곳으로!”
아론과 후안, 그리고 윤학수가 배고픔도 잊은 듯 바삐 일어났다.
그 뒤를 지태와 이돈두가 따랐다.
* * *
지태는 식사를 마치고 이제 막 식당을 나오거나 아직 식사를 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기사들을 재촉했다.
그렇게 도로 한쪽에 세워 놓았던 트럭들을 부랴부랴 한적한 곳으로 분산 이동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탕 마이의 말대로 메이크틸라 상공에도 문제의 헬기가 이윽고 모습을 보였다.
조금만 지체했더라도 발각이 되었을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지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속으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임상만 회장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임경남과 양재동 패거리들의 공격을 막아 내기에도 벅찬 지금 임상만 같은 거물이 힘을 보탠다면 자신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후우.”
“왜?”
지태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자 근처의 꽃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이를 쑤시던 이돈두가 돌아보며 물었다.
묻는 와중에도 그는 트림까지 해댔다.
배가 심하게 고팠던 터라 조금은 무리하게 음식물을 섭취한 모양이었다.
“그냥 이것저것 골치 아픈 일들이 널려서.”
“부경의 그놈 때문에?”
개인적으로 쌓인 원한은 없지만, 지태의 적이면 곧 자신의 적이라는 생각에 이돈두는 임경남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그 위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 위라면?”
“임상만 회장!”
“헐!”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는 이돈두의 어깨를 툭 쳐 보인 지태는 나무 그늘 한쪽에 주차된 렌터카를 가리켰다.
지금은 오더 물품을 어떻게 안전하고 은밀하게 전달하느냐 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당장 닥치지 않은 골치 아픈 고민들은 잠시 머릿속에서 비워 내고 싶었다.
“왜?”
“왜는 무슨! 밤새 달려야 하니까 잠깐 눈이라도 붙이자는 얘기지.”
“별로 안 졸린데……. 알았어. 그만 좀 째려라.”
이돈두는 괜히 흘긴다는 식으로 지태를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주변을 훑었다.
60여 명이나 되는 수송 인원들은 물론이고 이쪽 경호 인력들의 모습 또한 눈에 띄지 않았다.
어차피 날이 저물면 출발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직후여서 각자 알아서 휴식을 취하거나 낮잠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돈두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렌터카 쪽으로 걸어가는 지태의 뒤를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따랐다.
* * *
오후 7시.
사위는 점점 짙은 어둠에 묻혀 가고 있었다.
수송 인원들이 한낮의 휴식을 끝내고 각자의 트럭에 시동을 걸면서 행렬들은 길고도 게으른 기지개를 켰다.
지태는 메이크틸라 시내 중심가에 있는 유명 햄버거 가게에서 사람 숫자보다도 더 넉넉하게 주문해온 햄버거와 콜라 등을 모두에게 모자람 없이 나눠 주었다.
이제 따로 모여 식사할 시간은 없었다.
가는 도중 잠깐의 휴식은 있을지언정 식사 따위로 지체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까닭이다.
이대로 밤새 달려 적어도 오늘 중으로는 카친 주의 경계에 다다라야 한다.
그곳에서 다시 해가 어두워질 때를 기다렸다가 본격적으로 반군의 수도인 라이자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지태는 출발에 앞서 아론과 후안, 그리고 이돈두 등을 한자리로 불렀다.
“왜요, 한?”
갑작스러운 부름에 아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정했던 루트를 변경하려고요.”
“예엣?”
“아까부터 자꾸 여기에서 루트를 변경하라고 하네요.”
지태는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검지로 콕콕 찍어 보였다.
“혹시 우리 루트가 새어 나갔을까봐 그럽니까?”
아론이 짐짓 찡그리며 다시 물었다.
예정된 수송 루트를 변경한다는 것은 지태가 둘 중 하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중 하나는 물론 탕 마이일 테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그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