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한번 해보겠다는 건가?(2)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상만 회장이 직접 나섰다.
당신의 눈 밖에 벗어났거나 적대적이라 느낀 상대에겐 그 누구보다도 냉혹한 처벌을 안겨주는 임상만 회장이다.
그러니 결과는 보나마나 뻔할 게 아닌가.
그렇다고 지태란 놈이 자신의 뜻을 선뜻 굽힐 새끼냐.
그것도 아니다.
놈은 보나마나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태도로 나올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모르긴 해도 분명 대립각을 세울 텐데 어디 그 버릇없는 행동을 아버지가 용납할 사람이던가.
다시 또 임경남의 입가에 미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나저나 이낙규 실장을 잘 설득해서 시간을 벌어야 할 텐데…….’
지태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근심거리가 다시 떠오르자 임경남은 두 눈을 꾹 감은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30대 중반의 여실장이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목례를 해보이며 한쪽으로 비켜서자 그 사이로 이현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실장이 이현욱의 뒤를 두어 걸음 따라 들어오며 물었다.
“사장님, 애들부터 들일까요? 이현욱 사장님께선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지민이 지명이실 테고…….”
이현욱이 얼른 임경남의 눈치를 살폈다.
왠지 어두워 보이는 표정이다.
일단은 저 녀석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단둘이서만 나눌 이야기가 있다.
“조금 있다가 부르지. 중요하게 나눌 비즈니스가 있으니까.”
이현욱이 턱짓을 하자 여실장은 예의 간드러지는 모습으로 묵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할 이야기라는 게 뭐야?”
임경남은 이현욱이 미처 자리를 잡기도 전에 자신을 불러낸 이유부터 채근했다.
“숨넘어가겠네! 야, 우선 자리부터 좀 잡자.”
이현욱이 눈을 흘기자 임경남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어서 앉으라는 듯 턱짓을 했다.
아랫사람 부리듯 채근한 것이 미안했던지 임경남은 술병을 들어 이현욱의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오늘 좀 꿀꿀한 일이 있어서 그래.”
이현욱이 속으로는 조소를 날리면서도 입으로는 웃는 척했다.
그러면서 무심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근데 급히 할 이야기라는 게 뭐냐? 뭐 안 좋은 일이야?”
“글쎄. 이게 좋은 일인지, 안 좋은 일인지 나도 도통 감이 안 잡혀!”
이현욱이 찜찜한 표정으로 가득 채워진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뭔데?”
“그게… 송민철 말이야.”
“어, 그놈! 이제야 시체가 발견된 거야?”
임경남은 날카롭게 세운 눈빛을 이현욱에게 고정한 채 물었다.
그러자 이현욱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뭔데?”
임경남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재차 물어 왔다.
“차는 발견됐는데 시체가 없다는 거야.”
“그럼 차 안에 있던 새끼가 어디로 갔다는 건데? 안전벨트까지 꽉 매 놨는데 설마 놈이 깨어나서 자력으로 빠져나오기라도 했다는 거야?”
이현욱이 다시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경찰 쪽에 확인해보니까 운전석 쪽 창문이 깨져 있더라는 거야. 그니까 경찰에서는 운전자가 창문을 깨고 탈출한 것으로 보고 있는 눈치고.”
“그렇다면 송민철의 주변을 탐문해봤을 거 아니냐. 그래야 실종인지 사망인지를 결론 낼 테니까.”
“종적을 도통 알 수가 없다더라. 있을 만한 곳, 가 있을만한 곳들은 몽땅 다 뒤져 봤는데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대.”
“그럼 뒈진 거겠지, 뭐. 급류에 떠내려갔을 수도 있잖아.”
“그렇긴 하지…….”
임경남이 단정 짓고 말을 던지는데 일단은 끄덕일 수밖에.
하지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이현욱은 뭔가 영 찜찜한 표정이었다.
“근데 경남아!”
“……!”
“만에 하나 말이야. 그 새끼가 살아 있다면 어떡하지?”
“그걸 말이라고!”
“그니까 만에 하나라고 했잖아.”
“…….”
임경남은 사뭇 조여 오던 긴장감 때문에 저도 모르게 앞으로 잔뜩 내밀었던 몸을 다시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그런 그의 입에서 고민스러운 신음 소리와 함께 싸늘한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그땐 다시 작업 들어가야겠지.”
그거야 지극히 당연한 말이고.
이현욱이 씁쓸하게 웃음을 날렸다.
“하긴 시발! 한번 죽였는데 두 번이라고 못 죽일까. 근데 내가 오기 전에 넌 무슨 한숨을 그리 푹푹 내쉬고 있었냐?”
이현욱은 이쯤에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급히 화제를 바꿨다.
그러나 화제의 방향이 틀려먹었다.
괜히 또 임경남의 심기만 건드린 꼴이 됐다.
잠시 잊었던 고민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 이현욱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더니 짜증스러운 동작으로 술병을 들어 자신의 빈 잔을 채웠다.
빤히 쳐다보던 이현욱이 마치 세상에 달관한 사람처럼 말했다.
“그래, 시발! 고민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한잔 마시고 죽어 보는 거지, 뭐. 경남아, 이제 그만 애들을 부를까?”
이럴 땐 이현욱의 말마따나 술에 흠뻑 취해 계집년의 속살이나 더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세상만사 모든 근심, 걱정을 다 덜어 낼 수가 있을 테니까.
임경남이 흔쾌히 고갯짓을 했다.
그러면서 슬쩍 물었다.
“너 얼음 가진 거 있지?”
이현욱은 임경남을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염려스럽기도 했다.
요즘 들어 임경남이 마약을 찾는 빈도수가 너무 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 *
별실 안의 분위기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얼굴에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임상만 회장이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노기 띤 모습이 확연했다.
지태 역시 몹시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임상만 회장의 앞이라서 겨우 분기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회장님,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까지 꼭 입에 올리셔야만 했습니까?”
“그건 유감이네. 내가 사과하지. 자네와 경남이, 둘 사이의 악연도 우리 지은이와 이루어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유가 된다는 걸 강조하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좋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어지간히 제가 싫으신 거 같은데 더는 구차하게 매달리거나 사정하진 않겠습니다.”
지태의 눈빛이 더욱 굳건해졌다.
자신의 결의를 한가득 담은 시선을 임상만 회장에게 고정한 채 이를 악물어 보였다.
하지만 임상만 회장은 지태의 표정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는데, 그것은 더 이상 매달리지 않겠다는 지태의 단호한 선언 때문이었다.
‘이제 포기를 하려는 모양이군.’
임상만 회장은 꽤나 흐뭇하고도 만족스러운 미소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해주지.”
이번엔 지태가 말없이 빙긋 미소를 지었는데, 그 느낌이 매우 차가웠다.
“……!”
“우리 부경물산에서 수주한 오더 중 한스가 감당할 만한 수준에서 로컬로 넘겨주지. 연 매출 20조에 달하는 곳이니 그중 10%만 넘겨준다 해도 한스에서 가져가는 대행수수료는 만만찮을 거야.”
만만찮은 정도가 아니다.
현재 한스무역의 규모로서는 가히 놀랄 만한 제안이었다.
지은을 포기하는 대가로 지태에게는 2조에 달하는 매출이 복덩이처럼 거저 굴러들어 오는 것이다.
수수료를 2%만 따져도 연간 400억 원에 가까운 순이익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지태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만 갔다.
이제는 차가운 냉소에 더해 조소까지 배어 있었다.
지태의 냉담한 반응을 본 임상만 회장은 입가에 그리고 있던 미소를 금세 지웠다.
그리고 자신이 뭔가 농락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자 표정이 덩달아 납덩이처럼 굳어 갔다.
“뭔가? 지금껏 나를 놀린 건가?”
“놀리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회장님. 다만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아 바로 잡으려는 것뿐입니다. 아까 제가 더는 매달리거나 사정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린 것은 지은이와 저 사이를 회장님께서 승낙해주시길 구걸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어요.”
“이, 이런!”
“그렇다고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일도 없을 겁니다. 제 의지는 이미 확고하니 재차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싶고요, 나머진 지은이에게 맡겨 두겠습니다. 주위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저와의 사랑을 택하겠다면 저 또한 지은이의 뜻에 따르겠다는 것이기도 하고요.”
“지금 자네가 내뱉은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회장님을 뵙기 전까진 사실 두려웠습니다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 모든 걸 감수하겠습니다.”
“넌 이제 모든 걸 다 잃게 될 거다. 지금껏 쌓아 온 것들, 그리고 우리 지은이까지도!”
임상만 회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지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시퍼런 레이저 불빛을 한동안 쏘아 대더니 이윽고 몸을 홱 돌렸다.
그 뒤에 대고 지태가 형식적인 목례를 올렸다.
그 순간 임상만 회장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피눈물이 어떤 건지 경험해 봤나? 못해봤다면 이제부턴 자주 경험해 보게 될 거야.”
냉소를 섞어 툭 내뱉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꽝.
요란하게 문이 닫히자 그제야 지태는 몸 안에 잔뜩 응축돼 있던 긴장의 세포들이 일시에 풀려나는 기분이었다.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져 쓰러지려는 것을 겨우 바로잡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는 분명 선전포고였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기어코 루비콘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지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방망이질을 하는 가슴을 다스리듯 긴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 * *
다음날 늦은 오후였다.
지은이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 자기! 어제 아빠 만났다면서?
“……!”
지태는 즉각 대답하지 않고 한 호흡을 쉬어 갔다.
왜 흥분하는지 잘 알고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 상태에서 응수를 해봤자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난한 말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큰 까닭이었다.
- 도대체 무슨 말이 오간 거야? 어떤 식으로 끝을 봤는데 이 난리를 치는 거지?
“난리라니?”
- 오늘 내 오피스텔에서 짐을 몽땅 다 빼갔어. 그뿐만이 아냐. 내 차도 빼앗아 갔어. 회사에서 내주는 업무용 차로 출퇴근하라는 거야. 근데 더 웃기는 것이 뭐냐면 꼬리가 붙었다는 거야, 꼬리가!
“꼬리?”
- 그래, 꼬리! 말로는 보디가드라고 하는데, 내가 보디가드가 뭐 필요 있겠어. 이 사람들이 지금 화장실 빼고는 하루 종일 나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니까!
임상만 회장이 어느 정도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지태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지은에게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됐는지 정도는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은아!”
- 어!
“어제 회장님을 만나 뵙고 내 뜻을 확실히 전했어. 말하자면 전쟁 선포를 한 셈이지.”
- 전쟁 선포?
“그래. 어떤 방해가 있어도 널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했거든. 내가 싫어져서 네가 스스로 떠난다면 몰라도 그전까지는 결코 널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어.”
- 그건 잘했네. 역시 자긴 내 남자야.
“한데… 당분간은 엄청 힘들 거다, 너나 나나!”
- 어차피 그 정도는 각오했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당분간 우리 서로 만나는 건 자제하자. 일단 소낙비는 피하고 보자는 얘기야.”
- 그게 언제까진데?
지은이 불안감이 감도는 음성으로 물었다.
지태는 다시 한번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막연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잠깐 동안의 소낙비일지, 아니면 그것이 긴 장마로 이어질지.
“암튼 추이를 지켜봐야지. 그리고 나도 방어할 태세를 갖춰야 하니까 당분간은 정신이 없을 거야.”
이윽고 지태가 답을 내놨지만, 지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