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58화 (158/272)

158화. 한번 해보겠다는 건가?(1)

라마다 유토피아 호텔.

지태는 약속 시간 20분 전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지태가 호텔을 올려다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긴장감으로 잔뜩 뭉쳐 있던 세포들이 순식간에 다시 ‘헤쳐모여!’ 하는 기분이었다.

좀 전보다는 한결 나아졌다.

지은은 오늘 저녁 임상만 회장과 만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데 전화를 걸어와 퇴근 후 데이트를 하자고 애교를 떨어대지는 않았을 테니까.

지태는 외국에서 갑자기 찾아온 바이어와 저녁 약속이 있다는 구실을 대며 그녀의 제안을 뿌리쳤다.

과연 오늘 임상만 회장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뻔한 자문이었고, 그 해답이야 이미 머릿속에 명백하게 드러난 상태지만 그럼에도 궁금했다.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그룹의 회장은 과연 어떤 식으로 자신을 설득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지태는 쓰게 웃었다.

딸자식을 둔 아버지의 입장은 재벌 회장이나 일반 서민이나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태는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켠 다음 쩝 하고 입소리를 내며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 * *

요즘 임경남은 한마디로 똥줄이 탔다.

지태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모하게 퍼부었던 180억 원이라는 자금과 원유 선물투자로 날려 먹은 1억 달러에 가까운 손실금 때문이다.

이 사실을 그룹 경영지원실에서 오래 전부터 냄새를 맡았다는 징후는 벌써 여러 곳에서 포착되었다.

지난번 원유 선물에 투자를 했다가 큰 손실을 본 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OPEC 회원국들의 감산정책으로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 가격이 치솟을 것이라는 투자 자문회사 대표이면서 친구인 녀석의 장담만 믿고 무리하게 투자를 한 것이 실수였다.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독단적 판단으로 투자를 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가 OPEC의 합의를 깨고 원유 증산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원유 가격은 이전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하락해 버린 거다.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1억 달러를 날려 버렸다.

가뜩이나 지태 때문에 쏟아 부은 자금을 무마하려고 분식회계까지 자행했던 터라 이제 더는 물러설 곳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터라 임경남은 우선 시간이라도 벌 요량으로 오늘 급기야 본사 경영지원실을 찾았다.

이낙규 경영지원 실장을 만나 술자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목줄을 죄여 오는 감사의 고삐를 조금만 늦춰 달라고 사정을 해보려는 것이다.

정 안 되면 무릎이라도 꿇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경영지원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임지은이었다.

“아직 퇴근 안 했냐?”

보자마자 비위가 상한 임경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서 지은의 가슴에 비수를 꽂듯 기어코 한마디를 더 보탰다.

“오늘은 그 개자식 안 만나?”

“말 좀 가려서 하지? 상스럽게 개자식이 뭐야, 개자식이!”

지은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직원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먼저 도발해온 것이니 받은 만큼 그대로 되돌려 주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지은이었다.

임경남이 이를 악문 채 비서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 실장님은?”

미리 약속을 잡고 온 것도 아니어서 임경남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여비서에게 물었다.

“오늘 대한상의 저녁 모임이 있으셔서…….”

이낙규 실장은 이미 자리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임경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임경남을 보면서 지은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흘깃 쳐다보았다.

무슨 이유로 퇴근하자마자 본사에 부리나케 달려왔는지 알겠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승기를 잡은 표정으로 이번엔 지은이 임경남에게 비수를 꽂았다.

“불똥이 튀어서 발등이 몹시 뜨거운가봐?”

“뭐어?”

“오빠, 아니 임경남 사장님의 표정이 꼭 그러하십니다요.”

지은은 임경남을 가족이 아닌 공적인물로 대하겠다는 듯 돌연 호칭을 바꿔 부르며 심기를 건드렸다.

“너, 너!”

임경남이 이를 갈며 쏘아보았지만, 지은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짧은 눈싸움 끝에 임경남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못마땅한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경영지원실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대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려던 임경남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기왕 어려운 결심으로 찾아온 걸음이니 본사를 나가기 전에 회장실 쪽 분위기나 살피려는 것이다.

회장실은 경영지원실보다 2개 층 위에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비서실로 곧장 들어선 임경남이 회장 집무실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조용히 물었다.

회장실 분위기만 엿보려는 게 목적이어서 임상만 회장이 안에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다.

“저, 그것이…….”

그런데 응대를 해오는 여비서의 태도가 참으로 어정쩡했다.

임경남은 그녀의 태도에서 뭔가 귀에 솔깃한 사연이 있음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 * *

“많이 기다렸나?”

호텔 한식당의 별실로 들어선 임상만 회장이 사람 좋은 얼굴로 물었다.

얼굴에 그려진 미소와는 달리 눈빛은 더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지태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그를 맞았다.

“아닙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앉지.”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던진 임상만 회장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서실에서 미리 예약을 해놓았던 터라 임상만 회장이 도착하자 곧 주문한 요리가 줄줄이 세팅되었다.

그에 맞춰 별실까지 수행했던 비서실장은 눈치껏 방을 나갔다.

둘만 남게 된 별실 안은 이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지태는 마치 바늘방석에라도 앉아 있는 것처럼 죽을 맛이었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

임상만 회장이 먼저 수저를 들면서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지태가 따라서 젓가락을 들긴 했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어떤 것부터 입에 넣어야 할지 판단이 잘 안 섰다.

그때 임상만 회장의 말이 흘러나왔다.

“요 며칠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얼굴을 봐서 그런가? 자네를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구먼, 그래.”

“……?”

지태가 무슨 소린가 싶어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수긍하는 눈빛으로 변해 갔다.

한강일보의 인터뷰 기사와 송석기 앵커의 뉴스를 임상만 회장도 본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이야. 아암, 그 나이에 벌써 이만큼 가시적인 성장을 보였다는 건 누가 봐도 대단한 일이지. 더구나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제 스스로 이뤄냈다는 건 더욱더 그렇고.”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태가 앉은 채로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도대체 무슨 말을 이어 가려고 이렇듯 내키지도 않는 윤기 번지르르한 기름칠부터 해대는가 싶었다.

“한잔할 텐가?”

임상만 회장이 본차이나로 만든 주전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제가 먼저 한잔 올리겠습니다.”

지태가 주전자를 집어 들고서 술을 권했다.

잔을 받은 후 이번에는 임상만 회장이 지태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들지.”

지태에게 눈을 고정한 채 임상만 회장은 그대로 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입만 적시고 내려놓을 줄 알았는데 단숨에 마셔 대니 지태도 그냥 말 수는 없었다.

고개를 모로 돌리고 한입에 털어 넣은 후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간의 침묵.

그 몇 초 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지태에겐 꽤나 길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이제 슬슬 자신을 불러낸 임상만 회장의 의중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지태는 짐작했다.

“자네가 이룬 성과는 아주 놀라워. 매스컴에서 그리 떠들어대는 게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얘기지.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럴 수 있겠다 하는 정도야.”

“……!”

“대한민국의 상위 1%, 아니 그중에서도 다시 1%에 속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보는 시각은 어떨지 생각해보았나?”

지금껏 쌓아 올린 지태의 성(城)이 그들의 눈에는 고작 티끌 정도의 하찮은 성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무시의 말투였다.

지극히 맞는 말이지만 듣는 입장에선 사실 기분이 더러웠다.

“첫술부터 배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겨우 발을 뗀 정도인데요, 뭘.”

지태가 반발하듯 내놓을 수 있는 말은 이게 고작이었다.

마치 밟으니 아주 잠깐 꿈틀대는 지렁이처럼.

지태의 느낌을 읽은 것일까.

임상만 회장은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웃었다.

“그래. 앞으로 찾아올 수많은 장애들을 극복하고 꾸준하게 달릴 수만 있다면 혹 그럴지도 모르지. 한데 그렇게 되기까지 과연 얼마나 걸릴까?”

“……!”

“다른 기업들은 몰라도 우리 부경만 하더라도 그래. 우리 선친께서 처음 기업을 일으켜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언 60년이란 세월이 걸렸지.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딱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래. 난 그 긴긴 세월을 기다려 줄 만한 인내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

임상만 회장이 내뱉은 말을 다시 풀어 보자면 지은의 짝이 되려면 지금 당장 그에 걸맞은 레벨이어야 한다는 뜻일 터였다.

지태가 그 레벨에 오를 때까지, 아니 설령 오른다 해도 언제일지도 모를 그 기약 없는 세월을 마냥 기다려 줄 수 없다는 이야기.

그러니 여기에서 그만 지은이를 포기하라는 조용한 경고.

지태가 빙긋 웃었다.

“올라갈 수 없는 나무는 애초에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씀이군요.”

“……!”

“너무 가혹하신 말씀이십니다.”

“굳이 상처를 주려는 의도는 아니네. 이건 내가 사는 세상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해준 것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지은이에게는 이미 정해진 혼처가 있기도 하고 말이지.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맺어진…….”

오신환 의원의 아들 오지용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 말씀은 제가 회장님의 마음에 흡족할 만한 레벨이 되어도 불가능하다는 뜻입니까?”

이미 식욕을 잃었다.

사실 지독한 긴장감 때문에 어차피 입맛도 사라진 지 오래지만.

여하튼 지태는 들고 있던 수저와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혼사는 나름 암묵적으로 내려오는 룰이 있다네. 그게 아무리 정략적이라 해도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는 없는 거야.”

“회장님이 사시는 세상의 규칙 같은 거, 저는 잘 모릅니다. 사실 그런 규칙은 알고 싶지도, 따르고 싶지도 않긴 하지만……. 다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집안의 아들딸들이 말입니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정략적인 이해관계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요.”

지태는 일부러 더 가슴팍을 활짝 펴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임상만 회장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쉽지 않을 싸움이라는 것은 이미 명확해졌다.

싸울 상대를 앞에 두고 기가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체급이 맞지 않아 패배할 것은 자명하지만, 설령 질 때 지더라도 최소한 비굴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지태는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임상만 회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 * *

텐프로 살롱 임페리얼(Imperial).

임경남은 VVIP룸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룹 본사를 나오던 길에 그는 이현욱의 전화를 받았다.

급히 상의할 것이 있으니 이곳에서 간단히 목이나 축이자고 했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임경남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회장실의 비서가 전해준 말을 떠올린 뒤끝이었다.

임상만 회장은 지금 이 시각에 지태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

지금쯤 절망에 빠져 있을 지태를 떠올리자 고소한 마음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던 거다.

“개자식! 네놈의 재롱도 딱 오늘까지다,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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