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매를 버는구나(3)
송민철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 주신다면 뭐든 다 내놓겠습…….”
역시나 이번에도 그는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눈앞에서 아까보다 더 무지막지한 번갯불이 다시금 번쩍인 까닭이다.
“주둥이를 찢어 놔야 정신 차릴래? 한 번만 더 떠들었다간 회를 떠버린다!”
사내의 으름장에 송민철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빈말이 아니라 실제로 죽일 것만 같은 비릿한 냄새를 맡은 까닭이다.
* * *
놈들의 차들이 멈춰 섰다.
청평호를 가로지르는 가평대교를 막 건너온 직후였다.
“쟤들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약 100미터 후방의 갓길에 덩달아 차를 세운 이돈두가 윤학수에게 물었다.
윤학수는 들여다보고 있던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양재동 패거리들하고 강창근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형님.”
“무슨 얘길…….”
답답함에 무심코 물으려던 이돈두가 말을 삼키며 뻘쭘하게 쓴맛을 다셨다.
망원경으로 내다본다고 어디 소리까지 들리겠는가.
이돈두가 옆을 돌아보았다.
느닷없는 상황에서도 도통 말이 없는 지태의 생각이 궁금했다.
“왜 조용해?”
“두고 보면 알겠지. 궁금하다고 저놈들한테 당장 달려가 물어볼 것이 아니라면.”
“아이고, 여기 공자님 나셨네.”
그러다가 이돈두는 조수석의 헤드레스트를 톡톡 쳐서 윤학수로부터 망원경을 넘겨받았다.
궁금하고 답답하니 자기가 직접 놈들의 입 모양이라도 봐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었다.
* * *
강창근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예상했던 방향과 전혀 다른 곳으로 이들은 상황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원래 사냥을 하는 것처럼 산에 데려간 다음 땅에 묻어 버리자는 게 아니었나요?”
그러자 양재동 멤버들이 가장 웃기게 생긴 개그맨 100명을 하나로 버무려놓은 것 같은 코믹한 표정들을 지으며 히죽거렸다.
“지금 세상이 어느 때라고 사람을 함부로 죽여, 이 친구야!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실질적으로 강창근과 가장 밀접하게 선이 닿아 있는 이현욱이 먼저 나섰다.
“그럼…?”
왜 굳이 이곳까지 힘들게 끌고 왔냐고 묻는 거다.
“아무리 미워도 한때는 우리와 뜻을 함께했던 친구야. 인연을 끊는 마지막 날인데 그냥 이별주라도 한잔 나누고 싶어서 데려온 거야. 아, 사실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다짐을 받아야 할 것도 있고 해서.”
“아!”
그제야 강창근은 말귀를 알아들었다는 식으로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들의 일관되지 않는 행동과 두서없는 변명은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원…….’
속으로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이현욱이 제안을 던져 왔다.
“강 회장도 우리랑 같이 별장에 가서 한잔해. 데리고 온 애들은 여기서 그만 돌려보내고.”
“그, 그럴까요, 그럼?”
강창근은 마지못해 승낙을 하면서도 큰 볼일을 보고 밑을 안 닦은 것처럼 계속 찜찜한 표정이었다.
행동대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뒤로 물러가는 강창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네 명의 멤버들은 이내 서로를 마주보며 비릿한 미소들을 공유했다.
* * *
75번 국도인 가평대교를 넘자마자 삼거리에서 다시 왼쪽으로 391번 지방도를 타고 강변을 달리다 보면 나오는 곳이다.
호명산 양지바른 기슭의 전망 좋은 곳에 지어진 별장.
아래로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청평호가 곧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였다.
지태와 이돈두, 그리고 윤학수는 지방도에서 별장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포장도로를 거슬러 올라와 그곳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뒤편 호명산에서 울어대는 밤새의 울음소리가 꽤나 구슬프게 들려왔다.
이돈두가 슈트의 옷깃을 바짝 치켜세우며 투덜거렸다.
“시발, 겁나게 춥네.”
벌써 밤 9시를 넘긴 시각이다.
그들은 지금 한 시간 반 넘게 잠복근무를 하듯 이러고 있는 중이다.
“형님, 별장을 감시하는 호성이 놈한테서 문자가 왔습니다.”
윤학수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뭐라는데?”
“벌써 술병이 네 개째랍니다, 형님. 근데 자기들은 마시지 않고 연신 송민철에게만 잔을 권하고 있다고 합니다, 형님.”
“뭔 개수작이야? 때려죽이는 게 아니라 술로 죽이겠다는 건가?”
제 말끝에 스스로도 우스웠던지 이돈두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왜 아무 말이 없어? 한지태라는 인물이 원래 이렇게 과묵하던 캐릭터였나?”
팔짱을 낀 채 별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지태가 허파에 바람이 든 것처럼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네놈이 다 했잖아. 거기에 대고 뭐 하러 굳이 사족을 붙여.”
“너도 이상하지?”
“그러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아직까진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지태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 * *
송민철의 입을 벌리고 강제로 술을 먹이는 건 강창근의 몫이었다.
응접 테이블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다섯 명 중에 나이로만 따지면 제일 연장자였다.
올해로 하늘의 뜻을 알 만한 나이라는 지천명이다.
양재동 멤버들과는 십 수 년의 차이가 나지만 돈이 어른이고 깡패라 하지 않던가.
강창근은 하대와 존대를 적당히 버무려 내뱉는 양재동 멤버들의 말에 무조건 순응하고 있었다.
고개를 꺾고 허리를 굽히는 각도에 따라 자신의 손에 쥐어지는 것 또한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니 그들을 어찌 하늘같이 모시지 않겠는가.
건달 체면이 좀 깎였다고 해서 쪽팔려 죽었다는 놈은 아직까지 보도 듣지를 못했다.
지금은 몸을 한껏 낮추고 이놈들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치까지 쪽쪽 빨아먹는 게 현명한 처신이라고 강창근은 생각했다.
“허헛, 험!”
그때 상석을 당연하게 차지하고 앉아 있던 임경남이 꼬고 있던 다리 방향을 바꾸며 헛기침을 했다.
허영만이 흘깃 쳐다보고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겠다는 듯 강창근을 돌아보았다.
“강 회장, 이제 그만 먹여도 될 거 같아.”
거기에다 이현욱이 눈치껏 덧붙였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그만 강 회장은 일어나시지.”
정확한 진의를 몰라 강창근이 눈만 껌뻑이자 이현욱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하면 됐으니까 그만 가보시라고. 이제부터 취조는 우리가 할 테니까.”
“아, 예.”
“여기 송 대표의 지분은 내일 중으로 강 회장 앞으로 옮겨질 거야. 럭키문을 인수하는 절차에나 박차를 가하셔.”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리고 두루두루 고맙습니다.”
강창근이 이현욱에 이어 나머지 세 사내에게도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자 이제 그만!”
이현욱이 어서 가 보라는 턱짓을 했다.
강창근은 다시 한번 절을 하고는 날아갈 듯 거실을 빠져나갔다.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라고는 송민철을 납치해서 별장까지 데려온 것밖에는 없다.
그건 누워서 떡을 먹는 것보다 더 쉬운 작업이어서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보상으로 중견 엔터테인먼트로 자리매김한 럭키문을 손에 거머쥐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 보따리를 안았으니 그 기쁨이야 굳이 말해 뭐하겠는가.
“어쭈? 이 새끼 완전히 맛이 간 모양인데.”
강창근이 나간 뒤 송민철의 옆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앉은 허영만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송민철의 턱을 들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원본 USB를 회수했으니 어차피 상관없잖아.”
임경남이 픽 웃으며 자신의 손가락에 걸고 있던 열쇠고리를 빙빙 돌려 보였다.
언뜻 보면 자동차 스마트키로 착각할 만큼 그와 비슷하게 생긴 USB이었다.
별장에 데려와 술을 몇 잔 권하면서 네놈이 숨겨둔 패를 보이라고 하자 송민철이 처음에는 딱 잡아떼며 버텼다.
그러나 이현욱의 눈짓을 받은 강창근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후 송민철은 그제야 구두 깔창 밑에 숨겨 놓았던 USB를 꺼내 놓았다.
“이제 다음 수순은?”
이현욱이 흘깃 돌아보며 물었다.
“막대기 챙겨 왔지?”
임경남이 대답 대신 되물었다.
이현욱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임경남은 송영완과 허영만에게 턱짓을 해보였다.
그들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허영만이 송민철을 어깨동무하듯 감싸 안으니 송영완은 잽싸게 그의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자 이현욱이 미리 준비해온 주사기 세 개를 꺼내 송민철의 팔뚝 정맥에 연달아 꽂아 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민철은 오뉴월 아이스크림 녹듯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 * *
별장 밖에서 거실을 촬영하고 있던 친위대원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타워파 보스인 강창근이 별장을 떠난 지 약 한 시간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조금 있으려니 죽은 듯 사지를 축 늘어뜨린 송민철을 데리고 양재동 멤버들은 별장 밖으로 나왔다.
허영만과 송영완이 양쪽에서 낑낑대며 겨우 부축하고 있었고, 이현욱은 그들을 얼른 앞질러 가더니 한쪽에 주차된 차에 올랐다.
시동이 걸린 SUV의 뒷좌석에 송민철을 태운 허영만과 송영완이 차에 올라타는 사이 임경남은 또 다른 승용차에 올랐다.
바로 송민철 소유의 외제 승용차였다.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려나 봅니다, 형님.”
“밑에 있는 애들한테 얼른 차 가지고 올라오라 해. 나머지는 쟤네 차를 바짝 뒤쫓으라고 하고.”
“예, 형님.”
윤학수가 이돈두의 명을 받아 스마트폰의 통화 버튼을 부리나케 눌렀다.
양재동 멤버들이 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별장 쪽으로 친위대가 운전하는 차가 올라왔다.
“어느 쪽으로 갔냐?”
조수석에 올라탄 윤학수가 친위대에게 물었다.
“가평대교 쪽으로 갔습니다, 형님.”
“서둘러라.”
속도를 높이라고 채근한 윤학수가 스마트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어디냐?”
- 아까 별장으로 가려고 좌회전을 했지 않았습니까, 형님. 그 지점에서 다시 75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형님.
“알았다. 놓치지 말고 바싹 쫓아. 그리고 촬영은 계속 하고 있지?”
- 예, 형님. 줌을 바싹 당겨서 잘 찍고 있습니다, 형님.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윤학수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통화 내용을 모두 들었으니 따로 보고할 것은 없지만 혹시 어떤 명령을 줄까 싶어서 돌아본 거다.
이돈두는 윤학수의 시선을 무시한 채 지태를 돌아보았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냐?”
“……!”
놈들의 머릿속을 좀처럼 읽을 수가 없으니 지태 역시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별장 안을 들여다보던 친위대원의 말에 따르면 강창근이 별장을 빠져나가자마자 놈들은 송민철에게 필로폰을 주사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정신을 잃은 상태로 강물에 던져 버리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좀 더 두고 보면 알겠지.’
지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앓는 소리 같은 신음성을 약하게 내뱉었다.
바로 그때였다.
윤학수의 스마트폰이 진동으로 떨어댔다.
“어, 뭐냐?”
- 놈들이 차를 세웠습니다, 형님.
“어딘데?”
- 도로 옆 졸음 쉼터 같은 곳인데 말입니다, 형님. 이젠 라이트까지 모두 껐습니다, 형님.
“이 새끼들 봐라? 알았다. 우리도 곧 도착하니까 뭘 하는지 잘 지켜보고 촬영도 계속하라고 그래.”
통화를 마친 윤학수가 다시 뒤돌아보았다.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던 참인지 시선이 마주친 지태와 이돈두가 차례로 무거운 고갯짓을 했다.
“허, 이것들 봐? 아주 골 때리는 새끼들이네.”
이돈두가 혀를 찼고,
“술과 마약에 취한 송민철이 운전 부주의로 강물 속으로 풍덩했다?”
지태는 놈들의 어설픈 시나리오를 눈에 그리듯 읊었다.
그 사이 친위대원이 말했던 쉼터가 눈에 들어왔다.
지태가 이를 악물었다.
잘 발달된 보디빌더의 가슴 근육처럼 양 볼이 심하게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