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매를 버는구나(1)
“이제 체계가 슬슬 잡혀 가는 거 같습니다.”
조현민이 회의실에 모인 임원진들을 죽 훑어가며 흐뭇해했다.
모처럼 한스의 전 계열사 임원진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전자와 무역, 그리고 홀딩스 소속 임원진들까지 모두 모이니 15명이 앉을 수 있는 소회의실의 기다란 테이블조차 꽉 차 버렸다.
“앞으론 대회의실로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아요.”
이동구 사장이 조현민의 말을 받았다.
지태가 빙긋 웃고는 조현민을 바라보았다.
“체계가 잡혀 간다는 건 그만큼 현재 여러분들이 앉아 계시는 자리에 대한 책임감 또한 무거워진다는 걸 아셔야죠.”
“누가 뭐랍니까?”
투덜거리는 조현민을 보며 이동구 사장이 혀를 끌끌 찼다.
“회장님께 말투가 그게 뭐요. 누가 보면 조 사장이 마치 회장인 줄 알겠네.”
물론 농담이다.
그걸 알기에 조현민도 히죽 웃으며 묵례를 해 보이는 것으로 제 머쓱함을 씻어냈다.
지태가 가볍게 웃고는 홀딩스 부사장인 유기영의 바로 옆에 앉은 사내를 돌아보았다.
오늘 마침내 회사로 출근하기로 마음먹은 그 사내, 박찬익이었다.
“박 팀장님! 우리 회사가 대충 이렇습니다.”
당신이 보기에 회사의 분위기가 어떠하냐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광고계의 아웃사이더이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꼴통이자 영원한 독고다이를 선호하는 박찬익이다.
이런 분위기를 가진 회사라면 아무리 조직에 얽매이는 것이 싫다 해도 스스럼없이 녹아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 모양새였다.
그러자 박찬익이 픽 웃었다.
회의를 하겠다고 이곳에 모인 지 벌써 20분가량이 흘렀다.
너무 자유분방하게 웃고 떠드는 통에 아직 회의 안건조차 상정하지 못하고 있다.
“딱 제 스타일이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뭐 나름 신선하기는 합니다.”
독고다이에 똘끼 충만한 박찬익다운 소감이었다.
지태는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런 꼴통의 입에서 이 정도의 소감을 내뱉었다는 것은 충분히 한스의 분위기에 만족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지태가 돌연 손바닥을 강하게 한번 마주쳤다.
박수 소리에 모두가 주목하자 어느새 정색한 지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적당히 입들을 푸셨으니 본격적으로 회의에 들어가도록 하죠.”
지태의 말 한마디에 회의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저마다 얼굴에 새겨져 있던 웃음기들을 서둘러 지워 내고 이제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태가 이번에 회의 안건으로 꺼내든 것은 총 세 가지였다.
그 하나가 미얀마 반군의 오더 건이고, 둘째는 다모아 매장에 관한 것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한스전자의 기술연구소 설립에 대한 안건이었다.
“중고 SUV 수집은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지태가 강요한 부장을 쳐다보았다.
“목표 물량 500대는 이미 채웠습니다.”
“반군 측에 서비스로 약속한 스페어타이어 확보는요?”
“기일 내에 확보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차질 없게 잘 준비해주세요.”
한번 고개를 끄덕여준 지태가 이번엔 윤민수 상무를 불렀다.
“예, 대표님!”
“물건을 운송할 선박은 어찌 돼 가고 있습니까?”
“라인을 총 가동해 알아보고는 있습니다만…….”
왠지 자신이 없는 목소리다.
지난 몇 년 새 한국의 유력 해운업체 몇 곳이 경영 악화로 인해 파산을 맞아 지금 현재까지도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생각지도 못한 이들의 도산으로 인해 수출업체들의 발등에도 불똥이 튀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존의 해운업체만 믿고 있다가 갑자기 손발이 묶여 버린 그들은 다른 대체수단을 찾기에 바빴다.
수출 물동량 처리를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업체들은 비싼 웃돈을 얹어 주고라도 화물선 확보에 열을 올렸지만, 그것조차도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현실이었다.
“여의치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유 회장님의 힘을 좀 빌려야겠군요. 아무래도 인맥이 우리보다는 몇 십 배는 더 넓으실 테니까.”
고민스럽게 한숨을 내뱉은 지태가 말했다.
그가 말한 회장님이란 유성락 부회장을 말한다.
분위기가 다운이 되었다고 느낀 지태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미리 걱정하지 말죠, 우리! 열심히 들여다보면 솟아날 구멍 하나쯤 보일 겁니다. 참, 군수품과 의약품, 그리고 비상식량 구매도 잘 돼가죠?”
“선금을 덥석 안겨 줬더니 업체들이 아주 그냥 신났습니다. 그 점에 대해선 전혀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태가 만족스러운 고갯짓을 하고는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곧 옆자리의 유기영 부사장을 돌아보았다.
“다모아 매장 확보는 어찌 돼 갑니까?”
지태는 사실 유기영 부사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서울과 부산, 그리고 대구 쪽은 마침 비어 있거나 매물로 나온 게 있어서 거의 계약 단계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모인 임원진들은 모르고 있는 내용이니 모두가 알아듣게 설명해주라는 뜻이었다.
유기영 부사장의 설명이 끝나자 지태는 곧바로 이동구 사장과 유근영 사장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다모아에 납품을 희망하는 업체 수가 현재까지 얼마나 됩니까?”
그러자 이동구 사장을 대신해 유근영 부사장이 대답했다.
업체들을 섭외하는 일은 그가 맡고 있는 까닭이었다.
“우리 쪽에서 직접 접촉한 업체들 말고도 안팎으로 소문이 나서 자발적으로 참여를 희망하는 업체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현재까지 도합 102개 업체입니다.”
“계약 조건에 대해선 잘 설명해 드렸죠?”
“예. 판매 대행 수수료가 총 매출금의 10%라고 알아듣게 설명했습니다. 참여 업체들로서는 쌍수 들어 환영할 입장이니 선뜻 승낙의 뜻을 내비쳤고요.”
지태가 미소로 끄덕인 다음 덧붙였다.
“전자의 두 분 사장님께서 터전만 마련해 주세요. 그러면 매장의 인테리어 및 광고 등 부수적인 일들은 여기 박찬익 팀장께서 도맡아 해주실 겁니다. 그리 알고 서로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럼 다모아의 관리 주체는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물어온 이는 윤민수 상무였다.
지태가 살짝 미소 머금은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은 홀딩스 차원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다음엔 따로 독립 법인을 세울 겁니다. 한스다모아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긍정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회의 시간이 어느덧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논의 중인 안건 하나하나가 한스로서는 모두 중요한 사안들이어서 회의에 임하는 그들의 표정엔 전혀 지루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지태가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은 40분 정도가 남았다.
그전에 마지막 안건을 내놓았다.
한스전자 부설 기술연구소 설립에 관한 건이다.
취지를 짧게 압축하자면 바로 이런 거였다.
대기업에 못지않은 고 퀼리티의 제품을 생산해 ‘한스’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한 단계 더 높이자는 것.
제품 디자인의 품격도 높이고 기존 제품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접목한 신상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자는 이야기였다.
모두 공감하고 환영하는 내용이어서 크게 갑론을박을 벌이진 않았다.
또한 이 자리에서 당장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론을 낼 사항도 아니어서 긴 시간을 끌지도 않았다.
다만 브레인스토밍으로 자유롭고도 활발한 토론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회의 막바지엔 연구소의 부지를 어디에 마련할 것인가, 연구소 인원은 총 몇 명으로 할 것이며 그들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까지 순조롭게 모아지기도 했다.
지태가 다시금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나가시죠, 오늘 점심 메뉴는 중식입니다. 제 사비로 한턱 멋지게 쏘겠습니다.”
지태가 맑은 잇속을 보이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참고로 전 짬뽕!’이라고 했다.
오래된 아재개그여서 모두 농축된 웃음소리들을 킥킥 쏟아냈다.
지태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흐뭇하게 미소를 짓다가 문득 굳어졌다.
아직까지는 모든 게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 순항이 과연 어떤 시련이나 방해 없이 계속 이어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불쑥 뇌리를 스쳐 갔다.
지난번 지은이 슬쩍 흘렸던 한마디조차 지금 지태의 불안한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아빠가 자길 부를 거 같아.’
지태는 저도 모르게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지만, 우연히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송민철은 소파 옆 협탁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을 벌써 몇 번째 내려다보았다.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연락이 아직도 오지 않는다.
럭키문 엔터테인먼트 4층에 마련된 귀빈 접대실이었다.
“후우~”
그런 그의 입에서 알 수 없는 한숨 한 자락이 새어 나왔다.
요즘 기획사 내부는 온통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얼마 전 돈두파의 난입 이후 회사에 소속된 아티스트들과 연습생들의 계약서를 모두 탈취당하고 말았다.
계약서 대부분은 연예계 데뷔를 빌미로 송민철의 손에 이끌려 성접대 자리에 불려 다녀야만 했던 애들이었다.
그중 세 명은 양재동 멤버들에게 갖다 바치기 전 송민철이 먼저 강제로 몸을 빼앗은 경우이기도 했고.
송민철은 그런 사실이 행여 밖으로 새어 나갈까봐 노심초사했지만, 그 소문을 전부 다 틀어막지는 못했다.
누가 퍼뜨렸는지는 몰라도 벌써 기획사 내부에는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 돼 버렸다.
소문이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몇몇 연습생들은 거침없이 대표실을 찾아왔었다.
럭키문 엔터테인먼트를 미련 없이 나가겠다는 거다.
송민철은 기가 막혔다.
눈을 있는 대로 부라리며 협박을 하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계약서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그녀들에겐 전혀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다 했던가.
모처럼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아이돌그룹 멤버 중 하나가 마약을 한 사실이 들통이 나 고립무원의 지경에까지 빠져 버렸다.
지난 3년간 거금을 들이붓기만 하다가 이제 겨우 수익을 내려던 참인데 그런 일이 벌어져 투자금 회수는 물론이고 럭키문 자체가 아예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주식은 이미 반 토막이 나서 대주주들로부터 매일매일 압박을 받는 형편이다.
대주주 중에는 타워파 보스인 강창근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빠른 시일 내에 회사를 정상화시키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을 따 버리겠다고 연일 전화질이었다.
그저께는 실제로 조직원들을 보내와 집무 책상 위에 시퍼런 생선회칼을 꽂아 두고 갔었다.
막다른 골목.
이미 사면초가에 몰려 있는 처지였다.
‘시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생각다 못한 송민철은 솟아날 구멍으로 양재동 멤버들을 떠올렸다.
아쉬운 대로 자신이 당장 손 내밀 곳은 그들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였다.
더구나 놈들의 아킬레스건을 자신이 쥐고 있지 않은가.
이현욱에게는 원본이라고 내던져 준 동영상 USB가 사실은 복사본이었다.
모처럼 쥐어진 칼자루를 그들에게 순순히 내어줄 바보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나.
더는 물러날 구석이 없었으므로 송민철은 전화를 넣었다.
명목상 투자를 좀 해달라는 부탁인 듯싶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내가 너희들의 목줄을 쥐고 있으니 입막음용으로 얼마간의 돈을 내놔라, 하는 거였다.
그렇게 전화를 넣은 것이 어제였었고, 전화를 받은 이현욱은 오늘 중으로 연락을 준다고 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쥐잡아먹은 듯 깜깜무소식이다.
송민철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