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라이자(Laiza)로 가는 길(3)
“아! 파울로 말씀이군요?”
후안은 그 자신이 파울로에게 한 짓이 떠올랐던지 쓰게 웃었다.
“두 다리가 박살나 병신이 된 놈인데 무슨 사는 낙이 있겠습니까. 마닐라 외곽에 집을 하나 얻어 휠체어로 근처 동네나 돌아다니며 하루하루 소일하고 있습니다.”
“정작 죽일 놈은 카를로 그 새낀데…….”
지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후안이 말을 받았다.
“어쨌거나 파울로 역시 보스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공모했던 놈입니다. 죽어 마땅한 놈인데 그 정도로 봐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죠.”
하기는 별로 용서하고 싶지 않은 놈이다.
지태는 후안의 말이 옳다는 듯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이르렀다.
기다리고 있던 아론이 손을 번쩍 들어 두 사람을 맞았다.
아론의 일제 SUV는 곧 시트웨를 빠져나와 남쪽으로 달렸다.
시트웨의 도로 사정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는 크고 작은 강들이 많아서 배를 이용한 운송 수단이 더 발달하게 된 미얀마였다.
그래서 도로 교통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면이 없잖다.
거기엔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대여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도로 건설에 국비를 투입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한데 그중에서도 시트웨의 교통편은 특히 더 불편했다.
바다를 끼고 있는 해양 도시라서 항구는 발달했을지 몰라도 동부나 북부 지역으로 가려면 복잡하게 얽힌 도로를 오르락내리락, 또는 지그재그로 넘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아론은 시트웨 남쪽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앤이라는 도시에서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앤과 민부를 잇는 고속도로였다.
지태는 들고 있던 미얀마 전도를 펼쳐 방금 지나쳐온 길들 위에 빨간 펜으로 꼼꼼히 표시를 해두었다.
이것은 나중에 중고차를 운반할 때 이용할 운송루트가 될 것이다.
“참! 거기 글러브박스를 한번 열어 보세요, 한!”
운전 중에 아론이 조수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
지태가 미얀마 전도를 반으로 접으며 돌아보았다.
“총을 쏠 줄 안다면서요? 탕 마이가 부탁한 겁니다.”
권총인 모양이었다.
지태가 글러브박스를 열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둔 제법 묵직한 물체가 손에 잡힌다.
꺼내 살펴보니 베레타 M9 모델이었다.
두 정이 들어 있으므로 그중 한 정을 뒤에 타고 있는 후안에게 넘겼다.
손에 익은 모델이어서 그런지 후안도 꽤나 만족스러워했다.
“요즘은 많이 없어지긴 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와 구 사이, 주와 주 경계선 근처에 산적들이 많았어요. 대략 대여섯 놈들이 한 팀을 이루는데, 놈들은 산 중턱쯤의 도로에 숨어 있다가 만만하게 보이는 차량이 다가오면 냅다 내려와서 덮칩니다. 돈이나 물건만 빼앗으면 모르겠는데 사람까지 무자비하게 죽입니다, 그 개자식들은.”
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지태를 흘깃 돌아보며 아론이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아론의 SUV는 이제 마궤 관구를 지나 만달레이 관구로 접어들고 있었다.
미얀마에는 7개의 관구(Division)와 7개의 주(State)로 나눠져 있다.
관구는 주로 버마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7개의 각 주에는 소수민족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보면 이해가 빠르다.
아론의 우려와는 달리 관구 경계선을 넘어 만달레이 구간으로 접어들었는데도 산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구 경계선을 넘을 때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었을 뿐이다.
관구와 주 경계선마다에는 꼭 세관 같은 검문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들은 외국인들에게 특히 더 까다롭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엔 아론이 누군가의 이름을 팔아 별 탈 없이 통과를 했지만, 다음번에 중고차를 운반할 때는 얼마간의 뇌물을 써야만 무난하게 통과를 할 것 같았다.
그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붙들고 늘어진다면 답답한 것은 누구겠는가.
눈치껏 그들 주머니에 몇 푼 쥐어 준 다음 얼른 그 자리를 뜨는 게 훨씬 현명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제 두 시간만 달리면 만달레입니다.”
아론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지만, 이미 스쳐가는 이정표를 본 후라서 지태도 대충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정표에는 현재 위치에서 만달레이까지의 거리를 버마어와 영어로 병행 표기해두었다.
잘 나가던 SUV의 속도가 갑자기 또 줄었다.
다시 산길로 접어드는 구간이었다.
경사가 심한 언덕을 약 20분쯤 올라서니 거의 정상에 다다른 듯 도로가 점차 완만해졌고 시야도 조금은 멀리까지 트였다.
경사를 타고 오느라 잔뜩 느려졌던 차의 속도가 다시금 회복을 하고 있었다.
시속 100Km쯤으로 달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아론은 곧 속도를 줄였다.
50미터 전방쯤에 심하게 굽은 도로가 보인 까닭이다.
속도가 확 줄어든 탓에 커브는 유연하게 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커브를 꺾은 바로 그 직후였다.
도로 한가운데에 가로로 눕혀져 있는 물체를 먼저 발견한 지태가 급하게 소리쳤다.
“아론, 조심!”
뒤늦게 물체를 발견한 아론이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이익.
덜컹.
달리는 속도가 있어서 그런지 브레이크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SUV는 끝내 물체를 밟고 지나서야 겨우 멈출 수가 있었다.
“시발, 뭐야?”
아론이 투덜거렸다.
밟고 지난 것이 사람 같지는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찜찜해하는 얼굴이었다.
지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보기에 그것은 이미 죽은 소 같았다.
이 산중 도로 한가운데에 웬 죽은 소가 떨어져 있지?
수상함과 함께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을 품는 순간이었다.
뒷좌석에 탄 후안도 그런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는지 급히 차창 밖 너머로 주변을 살폈다.
“보스! 일단 차에서 내리는 게 좋겠.”
바로 그때였다.
탕!
쨍그랑.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 한 발이 운전석 쪽 창문을 뚫고 아론을 스쳐 아슬아슬하게 비켜 갔다.
소스라치게 놀란 아론이 등받이에 몸을 바짝 갖다 붙였다.
“내려!”
지태가 조수석의 문을 열며 외쳤다.
뒤따라 후안이 내렸는데, 아론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아론! 어서 이쪽으로!”
지태가 열린 조수석 문으로 아론을 유도했다.
“아론! 정신 차리고, 어서요!”
지태가 재차 외치자 아론은 그제야 기다시피하며 조수석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때 다시금 총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단발 사격이 아니라 안전핀을 자동으로 놓은 채 긁어 대는 소리였다.
타타타타탕.
티웅, 티웅, 팅팅팅!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SUV 차체에 구멍이 숭숭 뚫리며 날카로운 금속성을 쏟아냈다.
다행히 SUV 차량 반대편에서 총질을 해대는 것이라서 차체가 총알을 막아 주고 있었다.
지태가 아론을 돌아보았다.
그도 어느새 허리춤에 꽂아둔 권총을 빼들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겁에 질려 있는 얼굴.
“저것들이 아론이 말했던 산적들입니까?”
“그, 그런 것 같아요. 들은 소문에 의하면 주로 바윗돌 같은 걸 굴려 놓는다는데 이 새끼들은 특이하게도 죽은 소를 이용한 모양입니다. 이제 어쩌죠?”
어쩌긴 뭘 어째.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받은 대로 똑같이 되돌려 줘야지.
지태가 쓴맛을 다시며 말했다.
“싸움을 걸어왔으니 응당 받아줘야죠.”
지태가 담담하게 내뱉자 아론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이 새끼들!”
지태는 아론의 시선을 무시하고 이번엔 후안을 돌아보았다.
“후안! 대략 몇 놈이나 되는 거 같아?”
“대여섯 놈 이상 되는 거 같습니다. 우리 쪽에서 아직 반격을 하지 않으니까 비무장 상태인 줄 아는 모양입니다. 총구를 이쪽으로 하고 슬슬 걸어 내려오는데요.”
후안의 설명에 지태가 범퍼 옆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낡은 군복들로 복장을 통일한 놈들이었다.
들고 있는 총기류는 다양했다.
AK 소총부터 권총, 그리고 사냥총도 언뜻 눈에 들어왔다.
그중 두 놈은 만도 혹은 정글도라 불리는 칼을 옆구리에 차고 있었다.
“아론, 저런 놈들은 죽여도 상관없습니까?”
“진짜로 싸우시게요? 그냥 돈 몇 푼 쥐어 주고…….”
“돈만 빼앗는 게 아니라 죽이기까지 한다면서요? 저놈들은 두려워 말고 죽여도 상관없는지, 아니면 탈이 생기는 건지 그거나 얼른 말해 봐요.”
“괜찮습니다. 능력이 돼 죽일 수만 있다면 저런 것들의 인권 따위는 어느 누구도 안 따지니까.”
“그럼 오케이!”
지태는 SUV의 뒷부분에서 자신을 흘깃 돌아보는 후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후안이 씩 웃었다.
지태는 놈들이 좀 더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기다렸다.
권총의 유효 사거리가 짧으니 사정권에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원 샷, 원 킬로 놈들을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사격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지태였다.
그리고 후안의 솜씨 역시 믿고 있기에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때 놈들 중 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æ~!”
도무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아마도 버마어 같았다.
지태가 아론을 쳐다보았다.
“뭐라는 겁니까?”
“우리더러 손들고 나오랍니다.”
이쪽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엔 서툰 영어가 날아왔다.
“어이, 거기 대가리 박고 있는 쥐새끼들! 어서 손들고 기어 나와. 말만 잘 들으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지랄!”
지태가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 다시 차량 후미 범퍼 옆에 있는 후안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지태가 후안에게 사인을 보냈다.
빠르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인 다음 검지로 좌측을 가리켰고, 다시 손가락 세 개를 펼쳐 우측을 가리킨 후 이번엔 검지로 지태 자신을 가리켰다.
좌우로 셋 씩 나눠 동시에 처리하자는 말이다.
후안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갯짓을 했다.
지태가 다시 범퍼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놈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이제 놈들은 산기슭을 거의 다 내려와 있었다.
거리는 대략 30미터쯤.
지태가 후안을 가만히 불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다섯부터 하나씩 접으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다섯, 넷, 셋, 둘…….
마지막 하나에서는 손을 내리며 권총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
기합처럼 외치며 지태가 먼저 몸을 날렸다.
마치 텀블링을 하듯 도로 바닥을 두어 바퀴 구른 다음 속사 무의탁무릎쏴 자세로 어느새 자리를 잡았다.
후안 역시 자동으로 지태와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놈들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두 사람을 보자 반쯤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당황스럽기 그지없다는 낯빛들이다.
그 틈을 노려 지태의 총구에서 먼저 불이 뿜어졌다.
뒤를 이어 후안의 총소리도 들려왔다.
탕, 탕, 탕.
탕, 탕, 타당, 탕.
겁먹고 있는 아론에게 장담했던 대로 두 사람은 그야말로 원 샷, 원 킬이었다.
급소만을 골라 정확하게 쏘아댄 탓에 놈들은 그 자리에서 총에 맞는 족족 즉사하고 말았다.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녀석들이었다.
특수부대원 출신인 지태와 후안에게는 너무도 간단한 식사였다.
지태는 제 몫으로 할당된 녀석들을 처리하고 얼른 후안을 돌아보았다.
그도 역시 백발백중의 실력을 보였다.
하지만 놈들 중 하나가 총에 맞는 순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었는지 본능적으로 발사가 된 모양이다.
후안의 팔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괜찮아, 후안?”
지태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후안에게 다가갔다.
“약간 스쳐 갔을 뿐입니다. 괜찮습니다, 보스!”
꼬박꼬박 붙여 오는 보스라는 호칭도 이젠 자연스럽게 들리는 지태였다.
“그래도 어디 좀 보자.”
지태가 후안의 셔츠를 찢어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은 듯 보였다.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차량 옆에 머리를 박고 있던 아론이 그제야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두 분, 사격 선수였습니까?”
놀라움 가득한 얼굴로 아론이 물었다.
둘은 대답 없이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일단 자리를 뜨십시다.”
지태가 좀 서두르는 눈빛으로 아론을 보았다.
“그러죠.”
아론이 서둘러 운전석에 오르는 동안 지태는 도로 양 옆을 훑었다.
다행히 오가는 차량들은 보이지 않았다.
“가지, 후안.”
“예, 보스!”
두 사람은 곧 차에 올랐다.
아론은 아직 진정되지 않은 놀란 가슴을 애써 누르며 기어를 전진에 넣고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이제 만달레이까지는 약 50여 킬로미터만을 남겨 놨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