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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44화 (144/272)

144화. 라이자(Laiza)로 가는 길(2)

“그래서 카친 반군과는 누카라는 보스 때문에 알게 된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 말년에 비록 내가 늦둥이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는 하지만 당신의 사후엔 자식들 서열에서 완전히 뒤로 밀렸죠. 결국 유산 분배 때 나는 별로 영양가 없는 유통 쪽을 물려받게 되었고…….”

지태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어서 빨리 이야기를 진행시키라는 뜻에서.

“그러다 보니 누카 삼촌하고도 자연스럽게 다시 이어지더군요. 그쪽 아지트에 필요 물품을 대줄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거든. 오지 정글까지 물건 배달하는 일도 그렇지만, 아시죠? 그쪽 사람들이 좀 유별나게 사납고 무섭다는 거.”

“목숨이 몇 개 더 있다손 쳐도 선뜻 내키진 않겠군요. 우선 나부터도.”

지태의 맞장구에 아론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하튼 그 과정에서 카친 반군 쪽과 선이 닿았어요. 누카 삼촌이 괜히 중국 쪽 공안들을 건드려서 한바탕 난리가 터진 후에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지태는 즉각 알아들었다.

에릭이 방한해 미얀마 현지의 실상을 설명해줄 때 쿤사 이후 새로운 마약왕으로 등극한 누카라는 인물이 중국 정부와 인근 세 나라로부터 동시에 수배를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음, 그래요. 이제 아론 씨가 카친 반군과 어떻게 연이 닿았는지는 대충 알겠어요. 그런데 탕 마이 씨와는 어떻게?”

지태가 흘깃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로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는 터라 후안이 생각할 때 그 자신은 꿰다놓은 보릿자루라고 느낄까 봐 염려스러운 마음이 든 것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후안이 괜찮다는 듯 그윽하게 웃어 주었다.

지태는 후안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고는 답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아론을 쳐다보았다.

“우선 건배부터!”

아론 역시 후안에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잠시 그를 배려하는 차원의 건배를 제안해 왔다.

단숨에 술을 삼킨 아론이 탕 마이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말하기 전 생각을 정리하듯 묵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후아~”

이윽고 다시 누카라는 인물에 대해 썰을 풀려고 하자 지태가 서둘러 그의 말을 끊었다.

에릭으로부터 이미 대충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인 까닭이었다.

멋쩍게 미소를 짓던 아론은 그 부분에 대해선 곧 생략하고 진전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옮겨 갔다.

그리고 얼마 뒤 비로소 아론의 기나긴 이야기가 모두 끝이 났다.

초장엔 호기심 어린 내용이 많아 집중을 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더 이상 흥미로울 것도 없어서 조금은 지루했던 터였다.

대화를 갈무리하듯 지태가 굳이 답을 내놓지 않아도 되는 물음을 혼잣말처럼 흘렸다.

“그니까 결국은 탕 마이, 카친 반군, 그리고 아론 씨까지 삼박자가 척척 들어맞았군요. 서로 원하는 조건이 맞았고, 또 서로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 줄 수도 있었으니까.”

아론도 이것은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라는 것쯤은 눈치챘다.

그렇다 해도 건배를 하듯 술잔을 얼굴 높이까지 치켜드는 것으로 지태의 말에 동의를 표하긴 했다.

그러곤 문득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체크했는데 뭔가 마음속으로 숨겨둔 또 다른 계획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오늘 두 분이 미얀마에 오신 기념, 아니 이제 한 배를 탄 기념으로 화끈하게 한번 쏘겠습니다.”

그러면서 섹스를 뜻하는 손짓과 함께 ‘치키치키!’라는 의성어를 내뱉었다.

지태가 고개를 내저었다.

“라이자로 넘어가는 길이 멀고 험하다면서요? 오늘은 그냥 일찍 쉬고 싶습니다. 정 아쉬우면 호텔 방을 잡고 간단히 술이나 한잔 하시죠! 이제는 우리들의 진짜 비즈니스를 할 차례이기도 하고.”

아론은 이렇게 단호하게 사양할 줄은 몰랐다는 듯 떫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이내 표정을 바꾸며 씩 웃었다.

“그러시죠, 그럼.”

* * *

똑똑똑.

부경물산 사장실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집무 책상 대신 소파에 앉아 있던 임경남은 누구의 방문인지를 알고 있는 듯했다.

“들어와요.”

곧 문이 열리고 비서실장 오한표가 들어섰다.

임경남이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보고할 게 뭔데?”

오한표 실장이 소파에 앉기가 무섭게 물었다.

“지금 한국에 없답니다.”

“누가?”

오한표의 앞뒤 자른 첫마디에 임경남이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아, 죄송합니다. 한지태 말입니다, 사장님!”

“한국에 없다니?”

“어제 출국했다고 합니다, 미얀마로.”

“미얀마? 거긴 왜?”

“그것까진 제가 아직 파악을…….”

오한표 실장이 순간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고개를 푹 떨궜다.

자신이 직접 지태의 뒤를 밟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흥신소 대표 이덕재가 알려오는 내용만 전달받아 임경남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는 배달자일뿐이었다.

‘흠…….’

하긴 이덕재라고 무슨 일 때문에 지태가 미얀마로 날아갔는지까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한스무역의 대외비까지 빼낼 능력은 안 될 테니까.

잠시 못마땅하게 째려보던 임경남이 오한표 실장의 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등받이에 더욱 깊이 몸을 파묻었다.

“하긴 심부름센터나 하는 놈들이 그런 것까지 알아낼 수는 없었겠지……. 그나저나, 음!”

임경남이 묵직하게 날숨을 내뱉었다.

잠시 뭔가를 더듬는 눈치더니 마침내 어떤 결론을 얻어낸 모양이다.

임경남이 시선을 바닥에 박고 있는 오한표 실장을 쳐다보았다.

“이봐요, 오 실장!”

“예, 사장님!”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가 나오자 퍼뜩 고개를 쳐든 오한표 실장이 임경남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우리 부경물산의 미얀마 지사에 현재 누가 나가 있지요?”

“물산에는 미얀마 지사가 없습니다. 베트남 지사에서 그곳까지 관할하긴 하지만……. 아, 부경전자는 지사가 개설돼 있습니다, 사장님.”

“전자라…….”

임경남이 되뇌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쓴맛을 다셨다.

지난번 지태를 골탕 먹이려고 부경전자의 사장을 반 협박하여 무리하게 화성 산업단지 내 공장부지 매입을 권유했던 기억이 떠오른 거다.

전자의 사장이 말은 안 해도 내심 자존심이 상해 있을 것이고, 자신에게 보나마나 악감정을 품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아무리 차기 후계자의 막강한 파워를 지니고 있다고는 하나 평생을 부경그룹에 충성한 그를 두 번씩이나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이번에는 아무래도 자신이 좀 굽히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인도양 벵골만의 푸른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해변에 지어진 호텔이었다.

호텔 좌측으로는 시트웨의 명소인 등대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아론이 직접 호텔 객실을 잡아 줬는데 두 사람의 관계를 배려해 두 개를 예약했다.

아무리 봐도 지태와 후안은 상하 관계로 맺어진 것 같았고, 그런 주종 관계의 남자 둘이 객실을 함께 쓴다면 서로가 불편할 것이라는 게 아론의 판단이었다.

세 사람은 지태의 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밖에서 사 들고 온 술병들이 응접 테이블에 놓여 있지만 지태의 말마따나 사업 이야기가 우선이어서 술에 집착하는 모습은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오더 물품에 대한 것은 아직 확실치 않군요?”

지태가 조금 전 설명을 마친 아론의 말끝에 물었다.

“확실하게 결정이 난 것은 지금으로선 중고 SUV가 전붑니다. 그 외에 군복이라든가, 군화를 대체할 단화 같은 군수품도 주문이 확실하지만, 좀 더 자세한 사항은 쿤모 소장을 만나보면 알게 될 겁니다.”

아론이 말한 쿤모 소장은 카친 독립군인 KIA의 부사령관을 말하는 거였다.

그는 이번 오더의 총 책임자이며 지태가 라이자로 가서 만날 최고위층 인사이기도 했다.

“오더 물품의 선금도 쿤모 소장이 관장하게 됩니까?”

“이번만 그럴 겁니다. 다음 오더부터는 내가 대리할 예정이고.”

그렇다면 이번 거래에서 아론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더 물어본다고 해봤자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도 뻔했다.

그러자 지태의 질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차피 카친 반군의 수도인 라이자로 넘어가 쿤모 소장을 만나면 거래 내용에 대한 것들이 보다 명확해질 것이므로.

더는 진행할 화제가 없자 그제야 세 사람은 사 들고 온 술병들을 비우기 시작했다.

약 1시간가량 술자리를 함께 한 아론이 마침내 몸을 일으켜 돌아갔다.

내일 오전 10시에 시트웨를 출발해 만달레이로 넘어가기로 아론과 합의를 보았다.

거기에서 탕 마이를 만나 하룻밤을 묵은 후 다음날 라이자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아론이 돌아간 뒤에도 후안은 자신의 방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겉으로 내세운 핑계거리는 테이블 위에 미처 다 비우지 못한 술병 때문이라고 했지만, 돌아간다 해도 잠자리에 드는 것 외엔 달리 할 일도 없어서였다.

“후안! 아론은 어떤 사람 같습니까?”

지태가 종이컵에 반쯤 담긴 위스키를 한 모금 입에 적시며 물었다.

“글쎄요. 제가 봤을 땐 그리 믿음이 가지 않는 인물이긴 합니다만……. 허풍과 과시욕이 강한 사람 같기도 하고.”

후안은 아론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았다.

지태가 픽 웃었다.

“사람이 가벼워 보이긴 합니다. 깊게 속을 털어놓고 사귈 사람은 못 되는 것 같아요.”

“맞습니다, 보스!”

‘엥?’

후안이 대답 끝에 자신을 보스라고 호칭하자 지태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미스터께서 저를 친구처럼 여겨 주는 것은 좋은데, 그래도 상하 관계는 분명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제 마음도 편하고.”

허, 이거 참!

사람 낯간지럽게 만드는 재주가 넘치시네.

지태가 머쓱하게 쳐다보다가 시선을 비켜 가자 후안이 쐐기를 박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금부터는 보스라고 호칭하겠습니다. 보스께서도 저를 대할 때 말씀을 편하게 하시지요.”

지태가 소리 나게 쓴맛을 다셨다.

지금껏 지켜본 바에 의하면 후안도 자기 고집이 은근히 센 친구였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지 않는 스타일이니 만류해 봤자 소용도 없을 거다.

“좋아요, 후안! 호칭이 뭐 그리 중요한 거라고. 그래요, 그게 편안하다면야…….”

“그럼 말씀부터 편안하게 하세요, 보스.”

아직 깍듯하게 자신을 대하는 지태를 보며 후안이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적응이 될 때까진 날 내버려둬요, 후안.”

지태가 그윽한 눈길로 대답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위로 짙은 노을이 지고 있다.

바다가 온통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미얀마에 넘어온 지 이틀,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다.

지태는 부디 아무런 사고 없이 앞으로도 이렇게만 순조롭기를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보며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 * *

오전 10시 5분 전에 아론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두 사람더러 지금 바로 호텔 로비로 내려오라고 했다.

어젯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덕분으로 이른 아침부터 깨어있었던 지태는 후안을 불러내 벌써 조식까지 먹고 온 상태였다.

그 후 두 사람은 내내 지태의 방에서 같이 있었기 때문에 아론의 연락을 받자 곧 방을 나설 수 있었다.

로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지태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그놈은 요즘 어떻게 지내, 후안?”

하룻밤이 지나자 지태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하대가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갑질하는 상사의 그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목소리에 정감이 넘쳤다.

앞뒤 꼭지 다 자르고 던진 질문이었지만 후안은 용케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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