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라이자(Laiza)로 가는 길(1)
AR 컴퍼니 시트웨 지사라고 이름은 거창했지만, 사무실의 규모는 이름에 걸맞지 않았다.
사무를 보는 여직원 하나만 달랑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썰렁하기 이를 데 없는 사무실이었다.
그래서일까.
대략 30평정도 돼 보이는 사무실은 더욱 휑한 느낌이었다.
손님이 왔다고 그나마 하나뿐인 여직원이 차를 내왔다.
‘러펫예’라고 하는 미얀마 전통차라고 아론이 설명해 주었다.
녹차에 연유를 섞어 만든 달달한 밀크티였다.
너무 단맛이 돌아 제 입맛에 맞지 않은 듯 지태는 입술만 살짝 적시고는 곧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곧 비즈니스에 들어가려고 진중한 눈빛으로 아론을 쳐다보았는데, 그는 아주 천하태평이었다.
“미스터 아론! 물품 대금에 대한 지불 방식은 탕 마이 씨에게 들었는데 그 사이에 다른 변동 사항은 없겠죠?”
“맞습니다. 선불 50%, 물건을 받고 난 다음 나머지 대금은 현금 결제 혹은 현물!”
묻는 것에만 겨우 답해놓고는 다시 느긋한 모습이었다.
뭐 이런 돼먹지 않은 인간이 다 있어?
비즈니스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 무역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아 있는 건가.
지태는 슬슬 짜증이 나려고 했다.
그래도 사람의 표정을 읽는 눈은 있나 보다.
아론이 픽 웃었다.
“미스터 한! 우리가 만난 지 이제 겨우 한 시간도 안 지났습니다. 한국 분들은 대체로 미스터처럼 다들 성격이 급하십니까? 세월이 좀먹는 것도 아니고 여유롭게 가십시다, 여유롭게!”
지태가 떫게 입맛을 다셨다.
자신의 성격이 급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아는 바였다.
그렇다 해도 대인 관계나 사업적인 면에서는 나름 참을성이 강하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자신은 지금 비즈니스 때문에 미얀마까지 날아왔다.
일단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부터 마무리하고 난 후에 세월 타령을 하던 여유를 따지던 하는 게 옳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오래 거래를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인간적인 신뢰를 먼저 쌓는 게 우선이라고 봅니다, 나는! 비즈니스도 어차피 사람과 사람간의 거래 아닙니까. 잠시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을 갖은 다음 비즈니스에 들어간다면 우리의 대화가 좀 더 부드럽고 원활하지 않겠습니까?”
지태가 혀를 내둘렀다.
‘말 하나는 청산유수네.’
그렇게 속으로는 투덜댔지만, 그의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어서 대놓고 반박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지태는 괜히 머쓱한 기분으로 입맛에 별로 맞지 않는 밀크티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럼 아론 씨의 말마따나 잠시 인간적인 비즈니스를 가져볼까요?”
“기분이 나쁘신 건 아니죠?”
아론이 웃는 낯꽃으로 물었다.
“내가 그리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닙니다. 상대가 옳은 말을 하면 곧 수긍할 줄도 알고…….”
이제는 지태가 웃었다.
“근데 두 분, 무슨 무술 같은 걸 배우셨습니까? 아까 보니까 몸놀림이 장난이 아니시던데.”
“뭐, 조금!”
지태가 짧게 대답을 해주면서 후안을 돌아보았다.
후안 역시 어깨를 잠깐 으쓱해 보였다.
“후안 씨는 군인 출신 같던데, 내가 잘 본 겁니까?”
지태가 다시금 아론을 흘깃 쳐다보았다.
비즈니스가 아니라 호구조사 나온 건가?
하지만 자신에게 던져 온 질문이 아니라서 가만히 있었다.
후안이 고개를 살짝 주억거렸다.
한때 군인이었다는 것이 무슨 비밀도 아니고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으니까.
“필리핀 특수 부대에서 상사로 제대했습니다.”
“아, 어쩐지! 아까 그 몸놀림 말입니다. 필리핀의 고유 무술인 아르니스 맞죠?”
후안이 긍정의 고갯짓을 해줬다.
아론이 감탄하듯 입을 떡 벌리더니 감탄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지태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 역시도 감탄의 눈빛이었다.
“그렇다면 미스터 한께선 태권도?”
태권도의 종주국이 한국이라서 지태가 보인 무술이 당연히 그것일 거라고 단정 지은 것 같았다.
지태가 가벼운 미소로 끄덕였다.
비단 태권도뿐만 아니라 여러 무술들을 몸에 익혔지만 그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게 귀찮아서 그냥 고개만 끄덕인 거다.
“이번엔 내가 하나 물어보십시다, 아론 씨!”
“예, 뭐든!”
“탕 마이 씨하고는 어떻게 알게 된 사입니까? 그리고 카친 반군 쪽과는 탕 마이 씨로 인해 연결이 된 겁니까?”
인간적인 비즈니스도 좋지만 이제는 슬슬 사업 이야기 쪽으로 화제를 옮겨 가고 싶은 마음에 그리 물었다.
아론은 쉽게 답을 내놓지 않았다.
예의 그렇듯 느긋한 동작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며 적당히 식은 러펫예로 입술을 적셨다.
“탕 마이와의 관계라……. 그걸 이야기하자면 꽤나 길어질 텐데.”
“……!”
이런 대답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
지태는 괜히 물어봤다는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싶어 가만히 있었다.
아론과 탕 마이가 어떤 인연으로 맺어졌는지를 알아둔다 해도 그리 나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아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탕 마이와 나, 두 사람의 관계를 말하기 전에 우선은 내 가족사를 먼저 말해 주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어차피 끄트머리쯤에 가선 결론이 모아지는 지점이 될 테니까.”
그렇게 살짝 운만 띄워 놓은 다음 아론은 다시 러펫예를 한 모금 들이켰다.
“미스터 한! 나는 미얀마의 70%를 차지하는 버마족이 아니라 샨족 출신입니다.”
“……!”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샨족은 미얀마 북동부 쪽에 자리한 소수민족이지요.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띤 인물도 한 명 있습니다. 그게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잘 모른다.
미얀마로 넘어오기 전에 기본적인 것들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약간 공부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얀마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라든가, 이곳의 정세며 종교 따위에 국한되었었다.
그러니 민족 구성이 어찌 되는지, 소수민족 중에 어떤 유명인이 있는가에 대해선 무지했다.
지태가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론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곧 간단히 닉네임 하나를 밝혔다.
“마약왕!”
순간 지태는 퍼뜩 알아차렸다.
그리고 치면 울리듯 닉네임에 해당하는 인물의 이름을 밝혔다.
“쿤사?”
비로소 아론이 흡족하게 끄덕였다.
전 세계에 마약왕으로 군림한 쿤사는 중국계 아버지와 샨족 출신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치푸(張奇夫).
한때는 미얀마 정부군의 장교로서 자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샨족의 반군들을 토벌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샨족 반군에 합류하게 된다.
그가 어려서 한때 중국의 국민당 잔당들이 장악하고 있던 아편 장사에 손을 댄 적이 있었는데 샨주가 바로 아편 재배의 거대 생산지이고, 그것을 반군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료된 까닭이었다.
결국 쿤사는 반군들을 장악해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마약왕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 후의 결과는 전 세계인들이 익히 아는 바 그대로였다.
아론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꺼내 들었냐 하면 그 쿤사라는 분이 나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폭탄 발언에 지태가 흠칫 놀라며 쳐다보았다.
분명 지금의 이야기를 처음 시작할 때 아론은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먼저 말해 주겠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깊은 연관이 있다는 말인즉슨 쿤사가 가족이나 친척 중 한 사람일 거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지태는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쿤사와 나는 한 핏줄입니다. 대외적으로는 숙부, 하지만 가족들 사이에선 숨겨진 아들!”
‘헉.’
지태가 놀란 눈빛이 되어 아론을 바라본 뒤 곧 후안에게로 시선이 옮겨 갔다.
후안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입을 떡 벌린 채 설마 저 이야기가 사실일까 하고 오히려 지태에게 묻는 눈빛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아론이 쓰게 웃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쿤사, 아니 아버지에게 숨겨진 아들딸들이 비단 나 하나뿐인 것은 아니니까. 나도 외부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자식들 중 하나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니까요.”
자신의 가족사에 얽힌 아론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것을 대략 간추리면 이랬다.
쿤사에 대해선 외부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데, 그의 결혼과 가족에 대한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아론 자신도 아버지인 쿤사가 본처 외에 몇 명의 여인이 더 있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다만 그 자신은 쿤사가 1996년 미얀마 정부에 투항을 하고 그들의 비호 아래 호의호식을 할 즈음 그와 함께 생활을 했는데, 그런 까닭에 다른 자식들과는 달리 좀 더 특별한 호사를 누렸다고 했다.
뒤늦게 얻은 늦둥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자신은 쿤사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자랑처럼 흘렸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했을 때 아론이 문득 시간을 체크했다.
“혹시 출출하지 않으십니까?”
물음을 받은 지태가 후안을 돌아보았다.
호텔에서 어설픈 조식으로 아침을 때운 후 지금껏 뱃속을 채운 건 없었다.
사실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혼자만 배고프다며 엄살을 떨 수가 없어서 동의를 구하는 차원에서 돌아본 거였다.
“많이는 아니지만, 입이 궁금하긴 합니다.”
“그럼 일어서시죠. 해물 요리를 아주 잘하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다른 데로 이동할 것도 아니니까 술도 한잔 곁들이면서 천천히 사업 이야기나 하시죠.”
아론의 제안에 지태는 쾌히 승낙했다.
식사를 하면서 사업 이야기나 하자고 했지만, 아론은 해물 전문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사무실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바닷가에 면해 있는 레스토랑.
풍광도 좋고 시설도 깔끔한 곳이었다.
아론이 메뉴판을 건넸지만 지태는 아는 요리가 없어 그에게 주문을 일임했다.
이름 모를 생선 튀김과 게를 베이스로 한 볶음 요리, 그리고 전골처럼 보이는 탕 요리가 나왔다.
배가 출출할 지태와 후안을 위해서 아론은 따로 미얀마식 볶음밥을 주문해주기도 했다.
식사를 하면서 술잔들이 오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론의 못 다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론이 쿤사가 숨겨둔 아들이라는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이후여서 그런지 지태는 그의 이야기가 별로 지루하게 들리진 않았다.
아론의 이야기가 잠시 끊어진 틈을 타 지태가 물었다.
“그럼 카친족과 연결이 된 건 누카라는 골든트라이앵글의 새 보스를 통해서입니까?”
조금 전 지태는 쿤사의 투항 이후 골든트라이앵글을 장악한 누카라는 보스와 아론이 지금껏 끈끈하게 연을 맺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은연 중 그 자신의 뒤에는 막강한 마약 조직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차원에서 나온 말이기도 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지태로 하여금 자신을 함부로 보거나 대하지 말라는 경고성 발언이었다.
지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주로 그 자신은 잘난 게 없는 부류들 사이에서 제가 가진 배경이나 배후 세력을 팔아먹는 법이니까.
아론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투항한 이후에 양곤에서 얌전히 미얀마 정부가 입에 떠넣어 주는 밥이나 받아 드셨겠습니까? 설령 그러고 싶어도 부하들이 가만히 두질 않았겠지요. 조직의 보스란 그런 겁니다. 자기 혼자 떠났다고 조직과의 연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단 얘기죠.”
“아직도 막강한 쿤사의 배경과 영향력을 팔아먹자는 차원이겠군요?”
“빙고!”
아론이 좀 심하게 촐랑대며 맞장구를 쳤다.
“여하튼 누카 삼촌은 자식들 중에서 아버지가 유난히 귀여워하던 나를 꽤 예뻐했습니다. 그게 물론 아버지한테 잘 보이려는 수작인줄은 잘 알지만, 내가 손해를 볼 것은 없으니 나는 그걸 오히려 즐겼죠.”
다시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태가 대화의 진전을 위해 일부러 아론의 말을 끊고는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