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미얀마 사전답사(3)
“그럼 내일 어디로 이동할 생각입니까?”
지태의 요구에 즉각 답을 주는 대신 탕 마이가 오히려 물어 왔다.
“시트웨로 이동해서 그곳 항구부터 돌아볼 생각입니다. 탕 마이 씨가 말씀하신 에이전시 대표도 만나보고. 그런 다음엔 카친 주 쪽으로 루트 개척을 겸해 죽 훑고 올라갈 예정입니다만…….”
“그렇다면 내일 답을 주면 안 되겠습니까? KIA(카친 독립군) 측의 고위 인사와의 면담은 예정에 없던 거라서 일단 그쪽과의 조율이 필요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시트웨로 넘어가는 동안 답을 주십시오.”
탕 마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문득 물었다.
“혹시 총을 다룰 줄 압니까?”
“물론입니다. 군대에 다녀왔으니까요.”
지태는 자신이 한때 대한민국의 특수 부대 출신이라는 말까지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럼 권총 두 정을 준비해두라고 하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미얀마에 있는 동안만큼이라도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세요. 내일 에이전시를 방문하시면 회사대표라는 친구가 내줄 겁니다.”
그제야 지태는 자신이 미얀마에 왔음을 실감했다.
탕 마이가 호신용 권총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긴장감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현실이 피부로 느껴지자 지태가 속으로 쓰게 웃었다.
* * *
다음날 아침 지태는 후안과 함께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양곤 공항으로 길을 잡았다.
의외로 시트웨까지 가는 직항 노선은 많았다.
비행시간은 약 45분 정도 소요됐는데, 정원이 50명인 미얀마 국내선 항공기는 프로펠러로 움직이는 기종이었다.
시트웨는 미얀마 서북부 최대의 해양도시라고 했지만, 한국의 여느 중소 도시의 수준밖에는 안되어 보였다.
그렇다 해도 공항을 나와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순박해 보이는 얼굴에 정감마저 어려 있었다.
지태는 한국에서 실어온 중고차를 하선할 항구부터 찾아갔다.
공항과 항구가 거의 맞닿아있는 까닭에 굳이 교통편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도보로 이동하면서 이곳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살펴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다 착해 보이죠?”
미얀마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걸어가는 지태를 흘깃 돌아본 후안이 문득 물었다.
“어느 나라든 민초들의 모습은 다 똑같죠.”
지태가 따뜻한 미소로서 답을 주었다.
“그래도 긴장을 놓아선 안 됩니다. 순박한 민초들의 틈에 끼어 있는 독초들도 있으니까요. 우리에겐 그것을 감별할 눈이 없잖습니까.”
맞는 말이다.
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있어요, 후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지태가 다시금 미소를 그려 주고는 정면에 시선을 두며 걸어갔다.
시트웨 항구를 돌아보는 중에 탕 마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 지금 어디십니까? 시트웨행 에어 만달레이에 탑승했다는 건 확인했습니다만…….
이런!
지태는 눈살을 찌푸렸다.
탕 마이가 정보부 요원이니 이런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 건 안 좋은 거다.
마치 감시를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인상을 긁을 수는 없는 일.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항구를 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 그럼 아직 에이전시의 그 친구는 만나보지 못했겠군요?
“항구만 돌아보고 곧바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 알겠습니다. 난 지금 만달레이로 넘어가는 중입니다. 거기에 볼일이 있어서요. 내일모레쯤 카친 주로 넘어가는 길에 만나는 걸로 하죠.
“같이 동행할 생각입니까?”
- 주 경계를 넘어갈 때까지만! 그쪽 검문하는 애들이 외국인들에겐 좀 까다롭게 구는 경향이 있어서 말입니다.
편의를 봐주겠다는데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지태가 고맙다는 말을 전하자 탕 마이는 다시 보자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 * *
항구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인데 현지인 하나가 다가왔다.
지태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일부러 접근하는 듯 보였다.
“관광을 원하십니까?”
사내는 제법 유창한 영어를 쓰고 있었다.
하기는 오랜 기간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지라 일반 대중들이 영어를 쓰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태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 흘깃 사내의 위아래를 훑었다.
넓은 천을 허리에서 발목까지 휘휘 감아 마치 치마처럼 입는 미얀마 남자들의 전통 의상 론지에 낡은 슬리퍼를 끌고 있었다.
그리고 수염이 듬성듬성 나있는 것이 별로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사내였다.
“그럼 어디까지 가십니까?”
사내가 다시 물어 왔다.
“그니까, 왜?”
이번엔 좀 더 사납게 나가자 사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한쪽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무 그늘 밑에 세워 둔 오토바이를 개량한 삼륜차 같은 탈것이 보였다.
일명 ‘뚝뚝이’라 불리는 동남아 특유의 운송 수단이다.
그제야 사내의 의도를 알아차린 지태가 픽 웃었다.
정해진 요금이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손님과 운전자 간에 흥정을 통해 가격을 정하는 방식이다.
가까운 시내 같은 경우엔 미얀마의 화폐 단위로 2천에서 3천 짯이면 적정 요금이었다.
“시내에 들어가려는데 얼마요?”
지태가 간을 보듯 물었다.
“미얀마에 오신 손님인데 바가지를 씌울 수는 없죠. 내가 서비스 차원에서 아주 싸게 모시겠습니다. 1만 짯만 주세요.”
선심이라도 쓰듯 사내가 다시금 웃었다.
지태가 쓰게 웃으며 후안을 돌아보았다.
후안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조소를 흘렸다.
“후안, 아무래도 내가 국제적인 호구처럼 보이는가 봐.”
“설마요. 이놈이 아무 생각이 없는 거겠죠.”
물론 영어로 말하는 거라서 현지인 사내도 다 알아들었다.
그러자 사내가 갑자기 돌변했다.
애써 선한 인상으로 꾸몄던 태도를 바꿔 본디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담배 니코틴 때문에 탈색된 것인지 아니면 며칠 양치를 안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누런 이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입술 끝을 비틀며 씩 웃었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보며 고갯짓을 까닥까닥했다.
우르르.
지금까지 근처를 배회하듯 서성이던 사내 몇 놈이 하이에나 떼처럼 튀어나왔다.
“미얀마에 온 신고식인가 봅니다.”
후안이 돌아보며 어깨를 키득키득 들썩였다.
지태가 피식 웃으며 뚝뚝이 운전자 쪽으로 한걸음 내딛으려 하자 후안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그를 말렸다.
“이런 건 보스가 나서는 게 아닙니다. 제 밥값은 해야죠.”
굳이 이렇게 나오니 말릴 생각은 없었다.
후안의 실력이라면 이런 애들 몇 놈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지태가 좋은 구경거리라는 듯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먼저 시비를 걸었던 뚝뚝이 운전자를 포함해 도합 여섯 놈이다.
놈들은 치마처럼 생긴 론지를 걷어붙이더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발리송 나이프, 혹은 버터플라이 나이프라 불리는 칼 종류였다.
“너희들 단체로 계 묻었냐? 그런 장난감 칼로 뭐하게?”
후안이 놈들을 좌에서 우로 휙 훑어가며 조소를 날렸다.
“이 새끼가!”
온갖 인상을 다 긁으며 가장 먼저 후안을 향해 달려든 놈은 맨 오른편에 있던 녀석이었다.
그저 골목 어귀에서 대충 침만 뱉어본 동네 양아치의 솜씨는 아닌 듯했다.
꽤나 칼질을 해봤던 실력이다.
휘웅.
푸쉭.
잽을 던지듯 두어 번 찔러 대는가 싶더니 이내 후안의 목을 노리고 칼날이 훅 들어왔다.
그 순간 후안은 나이프를 휘두르는 놈의 손목을 걷어냈다.
타앗.
필리핀 전통 무술인 아르니스를 꽤 오래 수련한 후안의 몸짓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후안은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녀석의 급소를 연달아 찍어 대고 타격했다.
타앗, 탓, 빠각, 콰작.
여러 번 타격한 것에 비해 그의 동작이 펼쳐진 것은 채 2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동료가 쓰러지자 놈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사방팔방에서 정신없이 달려드는데도 후안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굳이 실력을 비교하자면 대학생이 유치원생들을 상대로 장난삼아 놀아 주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중 뚝뚝이 운전자가 대열을 이탈하며 느닷없이 지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이얏!”
아무래도 처음부터 지태를 만만하게 보고 있던 것이 확실하다.
후안의 실력이 월등한 것 같으니 지태를 인질 삼아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려는 의도인 것 같았는데.
그 순간,
뻐억!
“윽!”
단 한 방이었다.
지태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뚝뚝이 운전자를 선 채로 기다렸다가 정확한 지점에 하이킥을 날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관자놀이에 적중한 하이킥은 놈으로 하여금 짧은 비명조차 미처 내뱉지도 못한 채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놈은 마치 태질당한 개구리처럼 쭉 뻗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사이 나머지 네 놈을 처리한 후안이 뒤돌아보더니 엄지 척을 해보였다.
지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이 정도에 뭘!”
바로 그때였다.
짝짝짝.
“아하하핫!”
지태와 후안의 등 뒤에서 제법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
지태와 후안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눈앞에 쓰러져 있는 미얀마 건달들과는 달리 꽤 말쑥한 슈트 차림의 사내였다.
나이는 대략 40대 중반쯤 돼 보였고, 머리는 가지런히 빗어 넘겼다.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 애들은 내가 돈 몇 푼 쥐어 주고 고용한 애들입니다.”
저 혼자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면서 어느새 사내는 바싹 다가왔다.
사내의 생김새나 분위기가 별로 위협적으로는 안 보여서 지태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다만 ‘네놈 정체는 뭐냐?’하는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자 사내가 대뜸 악수를 청해 왔다.
“아론이라고 합니다. AR컴퍼니 대푭니다.”
지태가 고개를 가볍게 갸웃거렸다.
느낌이 오는 것이다.
“혹시 탕 마이 씨가 소개한…?”
“맞습니다. 본사는 만달레이에 있고 시트웨는 지사지요.”
기분이야 약간 떨떠름하고 안 좋긴 했지만, 지태는 아론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한지탭니다. 근데 인사치고는 좀 요란스럽군요. 이런 식의 인사는 처음 받아 봅니다만.”
“다시 한번 사과 말씀 드립니다. 사실 이번 오더가 결코 평범하지는 않잖습니까. 그래서였어요. 어느 정도 큰 담력을 지녔는지, 배짱은 또 어느 정도나 되는지도 궁금했고. 한데…….”
아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껄껄 웃었다.
기대 이상이라는 뜻일 거다.
지태가 쓰게 입맛을 다신 후 후안을 그에게 소개했다.
아론은 이미 후안의 존재와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탕 마이가 미리 귀띔을 해준 것 같았다.
“일단 사무실로 가시죠. 참, 식사는 하셨습니까?”
“나중에!”
지태가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첫인상이 별로 유쾌하지도 않을뿐더러 일단은 비즈니스가 우선인 까닭이었다.
“그럽시다. 일단 비즈니스 후에 식사를 하시는 걸로. 여긴 해양 도시라서 해산물 요리가 아주 유명합니다. 맘에 드실 거요.”
아론은 식사 제안을 크게 반기지 않는 지태와 후안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그의 소유로 보이는 일제 SUV 차량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