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41화 (141/272)

141화. 미얀마 사전답사(2)

미얀마 양곤 국제공항(Yangon International Airport).

양곤은 지난 2005년 네피도(Nay Pyi Daw)로 행정 수도를 이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의 수도였던 곳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양곤 국제공항은 그에 전혀 걸맞지 않은 시골 터미널 같은 허접한 수준이었다.

그랬던 것을 아웅산 수치 국가 자문역이 정권을 잡은 이후 2007년 국제선 터미널을 새로 건축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물론 지금도 타국의 그것들처럼 그리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국제공항의 면모는 갖추고 있었다.

“후우~”

여섯 시간 반을 날아온 끝에 양곤 국제공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지태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묵직한 한숨을 인식하며 스스로 놀랐다.

아닌 척했어도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걸 보니 내심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손가방 외에 달리 들고 온 수화물이 없어 입국 심사는 아주 간단했다.

수속을 마치고 출국장을 빠져나오다가 벽에 걸린 대형 디지털시계를 보던 지태가 피식 웃었다.

미얀마 현재 시각 밤 10시 30분.

한국과는 시차가 2시간 30분이 나는 거여서 여섯 시간을 날아왔어도 이곳은 아직 자정을 넘기지 않았다.

지금 한국 시간은 자정을 훨씬 넘긴 오전 12시 30분일 거다.

출국장을 나오니 눈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마닐라에서 먼저 날아와 지태를 기다리고 있던 후안이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한!”

“예전보다 얼굴이 더 좋아 보입니다, 후안!”

둘은 손을 맞잡은 채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후안은 오전에 필리핀의 마닐라를 떠나 오후 1시쯤 양곤에 도착했다고 했다.

지태가 문득 그윽한 눈길로 후안을 바라보았다.

“자칫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부탁이었어요. 근데 두 번 생각할 여지도 없이 선뜻 도와준다고 하니까 나로서는 뭐라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한!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잊지 않고 나를 기억해준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언제든 필요할 때 불러만 주면 늘 보스처럼 모시겠다고.”

“하, 이거!”

지태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러다가 후안에게 잠시 양해를 구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것보다 우선 처리할 일이 있는 까닭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탕 마이에게 연락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지태는 곧 탕 마이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채 두 번이 가기도 전에 통화는 바로 연결되었다.

아마도 눈이 빠지게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한국에서 온 한지탭니다.”

-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곧바로 만나는 걸로 하십시다.

탕 마이는 많이 서두르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미얀마에 관광이나 하자고 온 것은 아니니까.

- 내가 알려 주는 차번호의 택시를 타고 그 기사가 안내하는 곳으로 오시오.

탕 마이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지태는 탕 마이가 불러 준 택시의 번호를 머릿속에 저장해 놓고 서둘러 대합실을 빠져 나왔다.

그러고는 길게 늘어선 택시들 사이에서 탕 마이가 알려준 번호의 택시를 찾았다.

지태가 찾던 택시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의 대열이 아닌 길 건너편에 홀로 주차돼 있었다.

지태와 후안이 다가서자 운전석 창문으로 흘깃 두 사람을 훑어보던 택시 기사가 턱짓으로 얼른 타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양곤 국제공항은 시내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밤이 깊어 차가 많지 않은 관계로 택시는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정체 없이 약 30분간 쏜살같이 내달렸다.

인조인간처럼 무뚝뚝해 보이는 택시 기사가 마침내 지태를 내려준 곳은 미얀마 불교 사원의 명소 중 하나인 술레 파고다 인근의 한 호텔이었다.

택시가 떠나자 본능적으로 주변을 한번 훑던 지태는 일단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막연하게 로비 안을 둘러보다가 탕 마이에게 전화를 걸 생각으로 휴대폰을 꺼내드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벨보이처럼 보이는 직원 하나가 은근한 눈빛으로 바짝 다가왔다.

“혹시 한국에서 오신 미스터 한이십니까?”

“……?”

“맞군요. 이걸 가지고 올라가 계시면 됩니다.”

벨보이는 야릇한 시선으로 눈웃음을 짓고는 대뜸 객실 번호가 적힌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지태는 주저하지 않고 카드를 받아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후안은 매의 눈빛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어갔다.

“후안! 벌써부터 긴장할 건 없습니다. 아직 서로의 패를 까보이지도 않은 상태인데 위협부터 가해 오겠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가 그런 쪽으론 촉이 좀 강합니다. 아직 위협은 느껴지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후안.”

지태가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쳐 보이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527호실.

지태는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키홀더에 카드를 꽂았다.

순간 모든 조명이 일제히 불을 밝히며 객실 내부를 환하게 비췄다.

지태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떠올리다가 곧 굳어졌다.

“……?”

“무슨 일입니까, 한?”

후안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지태를 보며 물었다.

지태는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그에게 잠시 침묵하기를 부탁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침실 쪽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에릭에게 들었던 대로 미스터의 감각은 남다르군요.”

침대 옆에 놓인 티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던 사내가 살짝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에릭의 말마따나 겉모습만 보아도 첫인상이 차갑다고 느껴지는 사내였다.

두툼한 입술이 꽤나 고집스럽게 보였고, 눈빛에 날카로운 칼 한 자루가 박혀 있는 것 같은 매서움이 있었다.

여하튼 지태가 느끼기에 그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단단한 사내로 보였다.

지태가 호의를 띠면서도 결코 기가 죽지 않은 모습으로 씩 웃었다.

“그게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의 온갖 험지를 마다하지 않는 이윱니다.”

“배포가 크다는 것은 장사꾼의 최대 장점이지요. 반갑습니다, 탕 마이입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탕 마이가 성큼 다가오더니 악수를 청했다.

한눈에 봐도 자신의 마음에 썩 들었는가 보다.

탕 마이는 이제 완연히 호감을 띤 미소를 날리며 지태를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지태 역시 호의적인 미소로 화답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지태가 손을 맞잡았다.

“근데 이분은……?”

탕 마이가 악수를 하던 몸짓 그대로 고개를 돌리며 턱짓만으로 후안을 가리켰다.

“사업 파트넙니다, 동남아 쪽을 담당하는.”

“아, 그렇군요. 탕 마이입니다.”

탕 마이가 지태의 손을 놓으면서 후안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후안 안토니오입니다.”

세 사람은 곧 거실로 나왔다.

응접 소파에 빙 둘러앉으니 비로소 탕 마이는 얼굴에 애써 띄워놓고 있던 미소를 완전히 지워 버렸다.

한가하게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빨리 사업의 본질에 충실하자는 뜻 같았다.

지태가 서두를 꺼내보라는 식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인 다음이었다.

이에 화답하듯 탕 마이가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얀마로 출발하기 전에 내가 부탁했던 물건들의 진행상황은 어찌 돼갑니까?”

중고 SUV 차량을 말하는 거였다.

“차질 없이 순조롭습니다. 앞으로 열흘 안으로는 물량이 확보될 거 같습니다.”

“음.”

탕 마이가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어떤 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럼 이곳까지 도착하려면 최소 두 달 이상은 걸리겠군요.”

“최대한 서두른다면 그럴 겁니다.”

“음.”

다시 한번 신음 소리를 내던 탕 마이가 무겁게 끄덕였다.

“급하다고 무턱대고 재촉할 수도 없으니… 알겠습니다. 저쪽엔 내가 그리 전하지요. 대신 다른 물건들은 그 이전에라도 가능하지요?”

“어떤 오더인가에 따라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최대한 맞춰 드리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지태가 탕 마이와 눈을 맞추며 믿음직스럽게 고갯짓을 했다.

그때 눈빛을 교환하던 탕 마이가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체크했다.

“요즘 나라 안팎으로 시끄러운 일이 좀 있어서 길게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초조한 모습을 보인 것이 미안했던지 탕 마이가 서둘러 변명을 해왔다.

지태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바쁜 것은 이해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탕 마이의 사정이다.

이렇게 잠시 눈이나 마주치다가 돌아갈 것 같았으면 굳이 넘어오지도 않았다.

일의 매듭은 확실히 짓고 넘어가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건 네 사정이고!’하듯 지태는 소파에 몸을 깊이 묻으며 짐짓 여유를 보였다.

“사정은 알겠지만,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이래저래 조율할 게 많아요, 탕 마이 씨.”

“그렇겠군요.”

잠시 지태를 들여다보던 탕 마이가 입술을 꾹 닫은 채 끄덕였다.

“그럼 잠깐만요.”

탕 마이는 양해를 구하고는 휴대폰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약 3분 정도 있다가 다시 나온 탕 마이가 쓰게 웃었다.

“전화 한 통으로 한 시간 정도 여유를 벌었다면 나도 대단한 장사꾼 아닙니까? 계속 진행하시죠.”

전혀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뱉어내곤 탕 마이가 저 혼자 웃었다.

예의상 미소로 화답한 지태가 오더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가와 물품에 대한 대금 지불 방식 등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지태로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반군과의 거래여서 그들이 한스무역에 정식으로 매입 오퍼를 들이밀 상황도 아니고 신용장을 오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정상 신용장은 오픈시키지 못하겠지만, 오더를 대행해줄 에이전시는 이미 섭외해 두었습니다, 한!”

“잘됐군요. 이곳 양곤에 있는 회삽니까?”

탕 마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본사는 만달레이에 있는데, 시트웨(Sittwe)에도 지사가 있습니다. 그쪽 대표가 일 년 중 반은 시트웨에 머뭅니다. 참, 그러고 보니 중고차를 들여오려면 양곤보다는 어차피 그쪽으로 운반선을 대야겠군요.”

이런 우연의 일치가 다 있을까.

그러지 않아도 지태는 중고차를 하선할 장소로 미얀마 서쪽에 있는 시트웨 항구를 점찍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지태는 에이전시의 지사가 시트웨에 있다는 점에 대해선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그럼 대금 지불도 에이전시를 통해 이루어집니까?”

“선금 50%, 나머지는 물품을 전달한 후에 즉시 현금이나 경우에 따라선 현물로 지급하는 걸로!”

“아니, 현물이라니?”

“혹시라도 사정상 현금을 만들지 못할 경우 금이나 비취 같은 보석으로 대신하겠다는 겁니다.”

시세에 맞게만 쳐준다면야 보석으로 받아도 상관은 없었다.

지태가 흔쾌히 끄덕였다.

“좋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쉽고 시원시원하게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살짝 불안해지기까지 한 지태였다.

지태가 자신의 그런 뜻을 농담 비슷하게 던지자 탕 마이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위험에 따른 카친 측의 배려라고 생각하시면 마음 편하실 겁니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나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지태가 소파 등받이에서 천천히 몸을 떼며 말했다.

물론 미소를 살짝 띠긴 했지만 곧 지웠다.

다시 정색한 지태가 탕 마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번에 미얀마로 날아온 것은 탕 마이 씨와 안면을 트려는 것도 있지만, 물품을 운송할 루트의 개척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지태가 잠시 말을 끊으며 한 템포 쉬어 갔다.

“예, 말씀해 보세요.”

탕 마이가 편안하게 말해보라는 듯 끄덕였다.

“카친 측 고위 책임자도 기왕이면 만나보고 싶습니다만.”

지태는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힘을 주었다.

“흠!”

순간 탕 마이의 입에서 낮은 신음성이 내뱉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