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유혹의 미얀마(5)
액정에 찍힌 번호가 국제전화인 것을 확인한 듯 탕 마이는 영어로 응답을 해왔다.
- 예, 탕 마입니다.
에릭의 말마따나 목소리 자체에 얼음 기운이 있다.
차가우면서 퉁명스럽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지태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대한민국의 한지태라고 합니다. 에릭의 친구이고.”
- 전화 기다렸습니다. 에릭한테는 대강 이곳 사정 이야기를 들으셨죠?
딱딱하고 차갑지만, 그렇다고 예의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 빠른 시일 내에 미얀마에서 봤으면 한다고요?”
- 그렇습니다. 그전에 먼저 중고…….
“그건 염려 마십시오. 내일부터라도 당장 차량들을 수배해볼 테니까.”
탕 마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먼저 알아들은 지태가 빠르게 말을 자르며 대답을 주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것은 탕 마이인 듯했다.
탕 마이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치닫기를 원했다.
- 미스터 한과 길게 통화하지 못합니다. 이쪽의 내 사정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혹시 내일이라도 양곤으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
“내일… 요?”
약간 시간을 벌기 위해 되물으며 잠시 찡그린 지태가 이내 말을 이었다.
“내일 당장은 어렵습니다. 이곳에서 처리할 일도 많고. 또 비자 발급을 받자면 적어도 5일 정도는 여유를 둬야 합니다.”
- 5일 후라…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하기 전날 다시 연락주시는 걸로.
제 할 말을 마친 탕 마이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순간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했지만, 정보부 요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지태는 곧 수긍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려던 지태가 멈칫했다.
순간 필리핀의 후안이 떠오른 까닭이다.
수일 내로 한국으로 넘어온다고 했는데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할 것이 아니라 미얀마 현지에서 곧장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태는 후안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전 탕 마이와 통화했던 내용들을 간단히 설명해 준 다음 미얀마로 출국할 준비를 해두라고 했다.
이쪽에서 연락을 하면 곧장 미얀마로 날아올 수 있도록.
후안은 아무 염려하지 말라는 확실한 답을 주었다.
급한 사무를 대충 처리한 지태는 곧 집무실을 나와 한스무역 사무실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지태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한스무역의 모든 직원들은 눈을 마주치는 순서대로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그중 제일 살갑게 맞이하는 이는 다름 아닌 박수연이었다.
“날마다 얼굴을 뵙다가 이제는 자주 못 보니까 좀 서운해요, 대표님!”
“이러지 마, 수연 씨! 알잖아, 나는 이미 임자 있는 몸이라는 거!”
“어머, 어머!”
박수연은 별꼴이라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그의 방문 목적을 물어 왔다.
“조 사장님 뵈러 오셨어요?”
지태가 고개를 까닥한 다음 주변을 훑었다.
그의 시선은 조현민의 집무실을 스쳐 지나갔다가 이윽고 창가 쪽에서 멈췄다.
과장으로 입사를 했다가 지금은 부장의 자리에 오른 강요한의 책상이 놓인 자리였다.
강요한은 부하 직원 한 명을 앞에 세워놓고 뭔가 지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강 부장도 좀 겸사겸사 볼 겸…….”
살짝 타이밍을 놓친 듯한 지태의 엉뚱한 답변에 박수연이 픽 웃었다.
그러고는 대표이사 집무실을 가리키며 눈치껏 말했다.
“사장실에 들어가 계세요. 제가 강 부장님 불러다 드릴게요.”
“그래, 부탁할게.”
지태가 성큼성큼 대표이사 집무실 쪽으로 걸어가 노크했다.
“어서 와라! 근데 어쩐 일……?”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현민이 무심코 반기다가 돌연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지태가 밉지 않게 흘겼다.
“자꾸 어쩐 일이냐고 물으면 앞으로는 그 말이 부담스러워 여기에 자주 못 들릅니다.”
“아무 일 없이 찾아오지 않으니까 그렇지. 여길 일부러 방문할 때는 뭔가 내 속 터지게 만들 폭탄을 들고 오는 경우가 허다하잖아!”
“나, 원…….”
지태가 피식 웃고는 응접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현민은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은 시선으로 다가와 마주 앉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형님, 강 부장일 겁니다. 내가 잠깐 보자고 했어요.”
“그래? 예, 들어오세요!”
점점 뜻을 알 수 없다는 듯 지태를 바라보다가 조현민은 문 쪽에 대고 대꾸했다.
강요한 부장이 들어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강 부장님, 이리 와 앉으세요.”
지태가 환한 미소로 손짓을 했다.
조현민은 이제 막 다가와 앉으려는 강요한과 지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강요한까지 이 방에 불러들였는가 싶어서였다.
의문은 곧 풀렸다.
지태는 강요한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대뜸 물었다.
“강 부장님, 예전 회사에 있을 때 중고차거래도 한번 취급했었다고 그랬죠?”
“예, 그렇습니다만…….”
“잘 됐군요. 그럼 이번 일을 강 부장께 좀 부탁하면 되겠네.”
“중고차 오더가 들어왔습니까?”
강요한의 물음에 지태는 마치 조현민에게 답을 주는 것처럼 시선을 그에게로 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눈길을 받은 조현민이 물었다.
“미얀마에서 연락이 온 겁니까?”
“예. 수일 내로 미얀마로 넘어오라더군요. 그전에 중고 SUV 차량이 급하니 그것부터 좀 수배를 해달라고 하더군요.”
“몇 대나 됩니까?”
“1차로 약 500대 정도.”
“500대라면 시일이 좀 걸리겠는데?”
“최대한 시일을 앞당겨야 합니다. 그쪽 사정이 무지 급한 모양이에요.”
“아무리 급해도 우물에서 숭늉을 찾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조현민이 떨떠름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자신의 인맥이 닿을 만한 곳을 열심히 찾는 눈치였다.
그동안에 지태가 강요한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최대한 빨리 수배가 가능하겠어요?”
“전국의 모든 중고차 매매 단지를 뒤지고, 제가 가동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봐야겠죠.”
다행이었다.
강요한이 긍정적이고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나도 힘을 좀 보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태가 퍼뜩 시선을 들어 쳐다보자 조현민이 픽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왜, 그렇게 봐요? 나도 나름의 네트워크가 있는 사람입니다.”
조금은 으스대듯 거드름을 피우는 조현민을 보며 지태가 그윽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나지막하게 긴장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미얀마 대사관에 들러 비자 신청만 하면 일단 넘어갈 준비는 끝난다.
과연 미얀마는 지태 자신에게 있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인가, 아니면 독과 화만 부르는 곳이 될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혈관을 타고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어떤 적당한 긴장감과 흥분이 그 자신으로 하여금 싱싱한 생선처럼 살아 넘치게 만들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
지태는 속으로 자신감을 부르는 주문을 굳세게 외쳤다.
* * *
어둠이 깊어가는 청담동 일각.
대로변에서 꺾어진 골목 안쪽으로 약 50여 미터쯤 들어온 곳이다.
이돈두는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불 꺼진 건물 하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4층 높이의 건물.
1층은 테라스까지 갖춘 꽤나 고급스러운 카페가 자리하고 있고, 그 나머지 3개 층은 연예기획사 사무실로 쓰고 있는 중이다.
현재 시각 새벽 1시.
밤이 깊어 카페는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다.
2층과 3층에 있는 사무실의 창문 역시도 불빛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오로지 불이 환하게 밝혀진 곳은 맨 꼭대기 4층뿐.
“확실해?”
이돈두가 묻자 조수석에 있던 윤학수가 얼른 말을 받았다.
“확실합니다, 형님.”
이돈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일처리가 깔끔한 윤학수가 확실하다고 장담을 했다면 그대로 믿어도 된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절대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요 며칠 친위대 두 명으로 하여금 럭키문의 대표 송민철을 24시간 밀착 감시케 했었다.
“안에는 그놈뿐이고?”
“예, 형님! 오늘 같은 날에는 집 대신 4층에서 자고 가는 날이 많다고 합니다, 형님.”
그러자 이돈두가 윤학수의 말을 곱씹으며 쓰게 웃었다.
조소가 짙게 배어 나왔다.
“오늘 같은 날이라…….”
“어떡할까요, 형님? 지금 바로 따 버릴까요?”
“그 새끼 영화 찍을 시간은 줘야지. 작업은 그 다음 일이고.”
“예, 형님.”
대답을 마친 윤학수는 그대로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로 다가가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윤재필이 재빨리 튀어나왔다.
저번 날 아산 촌뜨기 건달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바로 윤학수의 오른팔이다.
“바로 작업 들어가는 겁니까, 형님?”
“아니! 회장님께서 일단 포르노 찍을 시간부터 주라고 하신다.”
“포르…? 아, 예.”
금세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윤재필이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그럼 작업은 언제쯤…?”
“놈이 포르노를 찍으려고 시도하는 그 즉시 들이닥치는 걸로!”
“알겠습니다, 형님.”
살짝 묵례를 취한 다음 윤재필은 황급히 승합차로 뛰어갔다.
곧 두 명의 아우를 차 밖으로 불러내 뭔가를 지시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윤학수가 시선을 옮겨 이제는 엔터테인먼트의 불 켜진 4층으로 가져갔다.
그러면서 살짝 미소가 피어올랐는데, 거기엔 어떤 결의를 담은 비릿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 * *
“야, 그렇게 쫄 거 없어. 긴장하지 말고 이리 와 봐.”
럭키문 엔터테인먼트 대표 송민철이 눈앞에 있는 연습생을 향해 연신 손짓했다.
기획사 4층에 꾸며 놓은 VIP룸이다.
거실 창문을 열면 술파티를 겸할 수 있는 테라스로 곧장 연결되는 구조였다.
약 20평 남짓한 테라스를 포함해 적어도 80여 평은 돼 보이는 공간.
침실에 딸린 욕실과 거실 화장실, 그리고 바를 겸한 주방을 빼고 나면 나머지 공간은 대부분 거실이라고 보면 되었다.
“어서 오라니까!”
널따란 가죽소파에 걸터앉아 저만치에서 바들바들 떨고 서있는 연습생을 향해 송민철이 다시금 재촉했다.
이번엔 짐짓 두 눈까지 부라리며 협박을 해대고 있었다.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연습생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유나야, 너 인마, 데뷔하기 전 마지막 테스트를 하려는 거야. 연습생한테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는 대표가 어디 있어? 금쪽같은 내 시간을 쪼개 특별히 연기연습을 시켜주고 케어를 해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어서 이리 와 봐!”
조심조심.
그제야 유나라고 불린 연습생은 마지못해 다가오고 있었다.
두어 걸음 앞까지 다가오자 마음이 급했던 송민철이 벌떡 일어나 유나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대, 대표님!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대표님.”
“가만히 있어 봐. 너 인마, 가수생활 조금 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연기자가 되는 게 꿈이라며? 그 실감나는 연기 지도를 지금부터 내가 해주겠다는 거야!”
송민철은 무자비하게 유나를 소파에 눕혀 놓고 거칠게 트레이닝복 상의를 걷어 올렸다.
헐렁하기 그지없는 유나의 상의는 힘없이 벗겨져 목 부근까지 둘둘 말려서 올라갔다.
마음이 바빠 굳이 전부 다 벗길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송민철은 말려 올라간 상의로 유나의 얼굴을 완전히 덮어놓은 채 이번에는 그녀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유나는 두 다리를 꽈배기처럼 억세게 꼬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거칠게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 그녀의 머릿속으로 뒤늦은 후회가 급하게 밀려들었다.
대표실로 올라오기 전 꽉 끼는 청바지로 갈아입는다는 것을 깜빡했다.
유나는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혼자 연습실에 남아 안무 연습을 하다가 미처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송민철에게로 불려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