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유혹의 미얀마(4)
헛걸음을 한 조현민이 무역 사무실로 돌아가려다가 문득 복도 끝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궁금한 것은 도저히 참지를 못하는 성미였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곧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예, 형님!
용무가 그리 바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지태는 벨소리가 세 번을 넘어가기 전에 곧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듣기론 어떤 중요한 사람을 컨택하러 갔다는데.”
그러자 웃음소리가 잠깐 들려왔다.
- 중요하죠. 우리 한스에서 아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51% 정도는 우리 쪽으로 넘어온 거 같습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51%라면 거의 다 넘어왔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오늘 늦어?”
-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암튼 나중에 통화하죠. 나머지 모자란 49%를 마저 채워야 하니까.
지태가 알 수 없는 웃음을 남기고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
조현민은 끊어진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다가 한쪽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중에 두고 보면 알겠지 뭐.”
비 맞은 중처럼 구시렁거리며 조현민은 다시 무역 사무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갔다.
* * *
“한 형, 아니지. 한 대표님!”
“편하게 부르세요, 박 이사님!”
두 사람은 광고기획사무실을 나와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근의 막창 전문점이었다.
“한 대표야말로 편하게 불러줘요. 그냥 박 형이라고 하시든가.”
박찬익은 지태의 제안을 수락하면서 자신에게 직위 따위는 부여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자신은 남에게 간섭받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니 일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겠다는 것을 수락의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지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행여 그의 마음이 바뀔까봐 염려스러웠던 까닭이다.
그러면서 형식적으로나마 직함은 있는 게 좋겠다면서 은근슬쩍 홍보이사 자리를 역제안한 것이다.
대외적으로 한스를 대표해 일선에 나설 경우를 미리 대비하자는 차원이라고 그 핑계를 대었다.
지태의 가슴속에 숨겨둔 꿍꿍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찬익은 다행히 큰 거부의 몸짓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하죠. 사석에선 형, 동생으로 호칭하는 걸로! 단, 공식적인 자리에선 서로의 직함을 불러 주기로.”
“괜찮군. 그럼 지금은 사석이니까 말 놓을게, 동생.”
박찬익은 스스럼없이 곧 말을 놓았다.
“좋네요, 형님.”
지태가 잔을 들자 박찬익이 잔을 맞부딪쳐 왔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조직 생활이 몸에 안 맞아. 무리에 동화되고 하는 그런 스타일이 전혀 아니라서.”
“감안할게요, 형님.”
“또 일이 하기 싫으면 언제 훌쩍 잠수를 탄다든가,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것도 감수하고요!”
“허헛, 이거 참!”
지태가 태클 없이 곧바로 대답을 토해내자 박찬익은 털털하게 웃었다.
“무슨 사람이 그래? 동생, 여수투수(如水投水)란 말 아나?”
“내가 지금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러고 있단 말입니까?”
“잠시 생각할 틈도 없이 마구 대답을 쏟아 내니까 그러지.”
“자기만의 아집과 소신으로 형님이 막 밀어붙이는데 어쩝니까, 그럼? 그러다 마음이 바뀌면 나만 손핸데.”
“거, 이상하게 말이 되네!”
박찬익이 졌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색하고 바라보았다.
“사실 민성이가 추천을 하면서 자네 이름을 말해주었을 때 난 이미 한지태란 사람을 알고 있었어.”
“뭘 말입니까?”
“자네, 아주 유명 인사잖아. 필리핀 때부터!”
박찬익도 인터넷을 통해 지태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후후. 내 얘기를 들으면서 분명 이런 생각을 했겠군요.”
“무슨 생각?”
박찬익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똘아이!”
“큭!”
제대로 짚은 것 같다.
박찬익은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둔 생각을 들킨 것처럼 웃었다.
지태가 술병을 들어 자신의 빈 잔을 채우기 전에 박찬익의 잔부터 채웠다.
잔을 받아놓은 박찬익이 조금은 묵직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래서였어, 내가 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
“내가 한스에 합류를 하더라도 그동안 일해 왔던 곳들과는 확실히 다를 거란 생각이 들었지. 적어도 기계처럼 묵묵히 일만 하는 경직된 곳은 아니겠다는 생각 같은 거!”
“내가 똘아이라서 말입니까?”
“그런 측면도 없지 않아 있고.”
잠시 소리 없이 웃더니 다시 정색했다.
“자네와 난, 왠지 코드가 맞을 거 같아서! 안 그런가? 동생도 자유분방한 걸 좋아하지 않나?”
“예. 내가 정체된 생각에 얽매이는 건 싫어합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박찬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잠시 입술을 앙 다물었다가 풀었다.
마치 최종 결심을 다지고 있는 듯 보였다.
이윽고,
“내가 비록 실력은 없고 똘끼가 충만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야. 내가 한번 마음먹고 달려든 일에서만큼은 그야말로 미친놈이 되지. 그리고 그 일에서 기어이 성취감을 내 스스로 느껴야 돼. 이 자리에서 동생한테 약속하지. 나를 쓸모로 할 땐 나 또한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말이야.”
가벼움을 쏙 뺀 목소리였다.
박찬익은 이제야 자신의 가슴을 활짝 열고 꼭꼭 눌러놓았던 진심을 보여준다는 듯 강한 눈빛으로 지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지태가 자세를 바로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형님. 오래오래 제게 힘이 돼 주십시오.”
* * *
똑똑똑.
홀딩스 대표실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지태가 ‘네!’라는 대답을 주자 곧 문이 열리고 조현민이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형님.”
“내가 형이 맞긴 한 거야?”
조현민이 괜히 흘기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태가 집무 책상을 돌아 나와 마주 앉기가 무섭게 조현민은 들고 온 서류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이틀 전 찾아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갔던 이 달의 오더 현황 보고서였다.
살펴보던 지태가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도합 820만 불이네요?”
“신생 회사에서 티끌 모아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지. 한데 문제는…….”
말을 하다말고 조현민이 찡그렸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를 눈치챈 지태가 쓰게 웃었다.
임경남의 방해 공작 때문에 업체에서 물품을 공급받는 것이 매우 곤란하기도 하고 번거롭기도 한 까닭이었다.
물론 임기응변으로 일단은 대처를 잘해 나가고 있긴 했다.
그 임기응변이란 무역 회사 하나를 급조해 만든 것.
직원이라야 딱 두 명뿐인 페이퍼컴퍼니에 가까운 회사.
그 두 명의 직원 중 한 명은 형식적으로 대표이사 자리에 이름을 걸어둔 조현민의 부인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간단한 업무를 맡아 처리할 여직원이었다.
그곳에서 한스무역의 오더 물품을 각 제조업체로부터 대신 조달받아 대행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형님! 그래도 덕분에 형수님이 알바비를 짭짤하게 챙기시잖아요.”
이름만 걸어놓은 대표이사의 월급으로 300만원을 책정해둔 상태였다.
“대표이사 월급 300만원이 뭐가 많다고 그래.”
그러면서도 조현민은 제풀에 찔리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조용히 지어 보이는 지태의 미소가 왠지 부담스러웠던 조현민이 분위기를 희석시킬 요량으로 문득 물었다.
“저번 날에는 누굴 컨택하러 갔다는 거야? 아주 중요한 분이라던데, 누구야?”
“며칠 기다리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지태가 냉큼 털어놓지 않자 조현민이 반전된 분위기 속에서 비로소 승기를 잡았다는 듯 짐짓 째렸다.
“빨랑 말 안할래? 이번에도 나 모르게 무슨 사고 같은 걸 칠 생각은 아니지?”
“그런 거 아니라니깐, 형님.”
지태가 웃음으로 대충 넘기려 했다.
“그니까 말해봐. 나중에 느닷없이 폭탄 터뜨리지 말고, 당장!”
참으로 집요하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지태가 빙긋 웃으며 조현민과 눈을 맞췄다.
“저번에 민성이가 케냐로 떠나면서 소개해준 분이에요. 우리나라 최고의 홍보 전문가.”
“최고의 홍, 보, 전문가?”
“예, 무슨 뜻으로 되묻는지 압니다. 우리에게 당장 홍보 파트나 그에 따른 전문가가 급하지 않다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꼭 필요한 시점에 인재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잖아요. 미리 우리 곁에 비축해 두고 있다면 그만큼 힘이 되고 재산이 되잖겠습니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지태가 덧붙였다.
“우선은 그 형님께 한스전자 광고부터 맡길 생각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 형님을 필요로 했던 것은 광고나 홍보 때문이 아니에요. 비단 그런 용도 때문이었다면 속 편하게 그냥 광고대행사에 맡겨버리지 굳이 모셔 오지도 않았을 거고요. 요즘 보기 드문 브레인입니다. 기획력과 전략을 구성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난 분이에요. 아무튼 우리 한스에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실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한지태가 어련히 알아서 초빙했을라고. 근데 형님? 벌써 그런 사이가 됐어?”
참 비위도 좋다는 식으로 조현민이 바라보았다.
거기에 대고 지태가 한마디를 더 던졌다.
“만나 보니까 나하고 코드가 아주 잘 맞는 거 같더라고요.”
“코드가 잘 맞아? 그럼 그 친구, 보나마나 똘끼 충만한 건 너랑 비슷비슷하겠네.”
그러자 지태는 내심 찔린다는 듯 킥킥 웃었다.
* * *
퇴근시간을 한 시간 정도 앞둔 때였다.
지태의 계정으로 이메일이 하나 날아왔는데, 보낸 사람은 에릭이었다.
30분 뒤에 통화를 하자는 것과 누군가의 스마트폰 번호로 추정되는 숫자 외에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약속한 대로 에릭은 정확히 30분이 지나자 전화를 걸어왔다.
지태는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를 한쪽으로 밀쳐놓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에릭!”
통화가 이뤄지자마자 지태가 반갑게 일성을 날렸다.
- 꽤 많이 보고 싶었다는 목소립니다, 한?
예의 이어지는 에릭의 느끼한 반가움이다.
그러나 곧 정색하며 목소리를 깔았다.
- 탕 마이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한을 한번 만나고 싶다더군요.
“언제쯤?”
- 가급적 최대한 빨리!
지태가 낮은 신음성을 흘렸다.
예고 없이 강펀치를 맞은 느낌이었다.
“뭔가 조급해 보이는데요? 갑작스럽게 왜 서두르는 겁니까?”
- 카친족에 조달할 보급품들이 많이 부족한 듯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좋게 생각하세요, 한! 그들이 다급한 만큼 미스터 한의 몸값하고 가치는 그만큼 올라갈 테니까.
그건 맞는 말이다.
아쉬운 입장은 그쪽이니까 이윤을 조금 더 붙이고 위험수당을 한 단계 더 높여도 그들로서는 충분히 감안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아까 그 전화번호는?”
- 맞아요. 탕 마이의 개인 폰 번홉니다. 아, 물론 차명 폰이지만.
그럴 것이다.
미얀마 MI의 요원이 그리 허술하게 자신을 노출시킬 리는 없을 테니까.
에릭의 말이 이어졌다.
- 참, 중고차를 수배하려면 시일이 좀 걸리겠죠?
“몇 대 정도나?”
- 1차로 약 500대 정도.
“중고라도 연식이 너무 오래되지 않고 몇 년은 더 고장 없이 탈 만한 것을 찾으려면 여유를 좀 두는 게 좋겠죠.”
- 그럼 미얀마로 넘어가기 전에 그것부터 미리 수배를 해두었으면 합니다. 다른 것도 급하지만, 차량이 우선 더 급하다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에릭. 조금 있다가 바로 탕 마이와 통화부터 해볼게요.”
그러자 에릭의 웃음소리가 잠시 들렸다.
- 그 친구는 나처럼 싹싹한 맛이 없습니다. 듣기에 따라선 좀 싸가지가 없다고 느낄 만큼 차가운 녀석이에요. 그래도 겉만 그렇지 속은 안 그러니까 통화하면서 오해하지는 마세요.
“우리 둘처럼 연애를 할 사이도 아닌데요, 뭘.”
지태의 농담에 에릭이 낄낄거렸다.
그 후엔 얼마간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럼 나중에 또 통화하십시다, 에릭!”
- Have a nice day!
툭.
전화가 끊겼다.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던 지태는 크게 들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곧 탕 마이의 휴대전화번호를 하나씩 눌러 갔다.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은 발신음이 들린 후 이윽고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