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유혹의 미얀마(2)
- 오, 미스터 한!
대뜸 튀어나온 첫마디가 영어였고, 아주 반갑게 맞이하는 목소리였다.
지태가 입 안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후안, 우리 오랜만이죠? 잘 지냈어요?”
그랬다.
지태가 지금 통화를 하고 있는 이는 필리핀의 후안 안토니오였다.
한동안 안부를 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를 걸면서도 내심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이렇듯 후안이 아무렇지 않게 반갑게 맞아 주니 지태로서는 안심도 되고 다른 한편 고맙기도 했다.
- 요즘엔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해 놀고 있습니다. 지난번 미스터 한이 챙겨 준 돈 때문에 당분간은 놀고먹어도 무방하지만 말입니다.
후안이 가식 없는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렇다면 잘 되었군요.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 언제 또 필리핀에 오실 일이라도……?
필리핀에 있는 자신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이면 당연히 필리핀 내에서 자신이 해줄만한 역할이라고 짐작한 듯했다.
그러자 지태가 약간 머쓱한 웃음소리를 냈다.
“필리핀이 아닌데…….”
- ……?
후안은 잠시 침묵했다.
지태의 의도를 모르니 일단은 들어보자는 식인가 보다.
“미얀마입니다, 후안.”
- 미, 얀, 마요?
“예, 미얀마! 그곳에 가야할 일이 좀 생겼거든.”
- ……!
또다시 침묵하던 후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내가 필요한 일이라면 보통 비즈니스는 아니겠군요?
“미안하지만 어쩌면 목숨을 걸 상황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부담을 안 가지셔도…….”
- 갑니다!
후안은 지태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단호하게 내뱉었다.
“예?”
너무 선뜻 대답이 튀어나오자 지태가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후안이 정색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왔다.
- 미스터 한이 언제 어느 곳에서든 나를 불러만 주시면 기꺼이 달려가겠다는 말입니다.
그게 설령 듣기 좋으라고 내뱉은 빈말이라도 좋았다.
지태는 이미 감동하고 있었다.
“후안!”
감격에 찬 목소리로 부르자 후안이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 내가 만나 본 사람 중에 미스터 한은 최고였습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내가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어요. 미스터 한이 필리핀을 떠난 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그 마음은 여전합니다.
“고맙습니다, 후안. 나 역시 후안을 사내 중에 사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결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케냐의 에릭에 이어 후안 역시도 그에 버금가는 사람이라고 늘 마음에 새기고 있었으니까.
- 필요할 때만 찾아 준다고 해도 나는 언제나 미스터 한을 내 영원한 보스로 모실 겁니다.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친구로서 그 우정이 영원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태가 그윽하게 웃었다.
“후안! 난 보스니 뭐니 그런 관계보다는 친구가 좋습니다. 후안과 내 관계는 말이죠.”
- 친구는 당연한 거지만, 여하튼 보스처럼 여기겠다는 내 마음엔 변함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
감격에 겨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지태가 침묵하며 내뿜는 숨소리만으로도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는 까닭에 후안은 잔잔한 웃음소리로 화답했다.
지태는 일단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자면서 후안에게 조만간 한국으로 넘어오라고 했다.
* * *
한스홀딩스 대표실로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오도희가 들어섰다.
신문사 지령 10000호 기념 특집 화제의 10인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엔 짐짓 여유를 부렸었는데 이제 시일이 촉박하게 됐다면서 어제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인터뷰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도희 씨는 기자보다는 연예계에 진출했어야 했어요.”
“왜애요?”
지태의 말뜻을 알면서도 좀 더 노골적으로 확인받고자 오도희는 한껏 콧소리를 냈다.
“굳이 내 입으로 들어야 시원하겠어요? 도희 씬 아침에 거울을 볼 때마다 스스로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아, 어쩜 나는 이리도 예쁠까, 그런…….”
“암튼 지태 씬 연구 대상이야. 갈수록 느끼해진다고 생각하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거야, 그쵸?”
“진심인데.”
지태가 짓궂게 입맛 다시는 소리를 들으며 살짝 미소를 지은 오도희는 본격적으로 인터뷰에 들어갔다.
임지은을 통해 간간이 전해들은 것만으로도 지태의 기사거리는 충분히 지면을 채우고도 남았다.
하지만 오도희는 일반적인 것보다는 좀 더 디테일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질문을 퍼부었다.
기왕이면 한스그룹의 홍보 효과도 누릴 수 있게 만들 요량.
그래서 지태의 사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럼 가장 최근에 벌인 사업부터 소개해 드릴까요?”
지태는 그런 오도희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그윽하게 웃어준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중소 규모의 업체들을 하나로 통합해 한스전자를 탄생시켰다는 것으로부터 지태는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각지에 산재해 있는 공장들을 하나로 통합 관리하기 위해 당진 공장으로 최근에 이전했다는 말로써 끝을 맺었다.
거기까지는 지은이를 통해 이미 들은 바가 있어서 오도희 입장에서는 별로 신선한 뉴스라고 할 수가 없었다.
오도희가 ‘그래서요?’라는 시선을 보내자 지태가 씩 웃었다.
“아직 모든 것을 다 밝힐 단계는 아니라서 더는 디테일하게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말씀드리죠. 앞으로 한스전자가 생산해내는 제품뿐만 아니라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무장했지만 판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다른 영세 업체들과도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기획 중에 있다는 것! 머잖아 한스가 그리는 청사진을 세상에 공개할 테니까 궁금하시더라도 조금만 참고 응원해 주세요.”
지태가 환한 미소로써 마무리를 했다.
사실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기 전 사업 전반에 대한 내용이 공개가 되면 우선 우려스러운 것이 임경남이었다.
또다시 어떤 식으로든 사업을 방해하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득이 되는 인터뷰라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운만 띄운 거였다.
인터뷰 시간이 어느새 두 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 사이에 준비된 질문과 지태의 입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는 거의 다 나온 듯했다.
이제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날 시간이었다.
다른 저명한 인사들과는 달리 낯간지럽고 역겨운 소리, 뻔한 자화자찬을 내뱉지 않는 지태와의 인터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내 즐거웠다.
오도희는 적이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지태를 향해 윙크를 해보였다.
지태가 떫게 입맛을 다셨다.
물론 장난이었다.
“이거 지은이가 알면 큰일 나는데, 쩝!”
“착각하지 마세요, 지태 씨. 나도 임자 있는 물건엔 절대로 눈길을 안 주는 스타일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다 고맙습니다.”
지태가 마지막 농을 던졌다.
이제 그만 일어설 시간이었다.
오도희가 동행했던 사진기자를 앞세우고 대표실을 나서려 하자 지태가 인사치레로 물었다.
“조금만 더 계시다가 같이 식사라도 하시지.”
“김영란법에 저촉돼요. 앞날 창창한 나를 옷 벗기실 참이에요?”
“내가 왜 도희 씨 옷을 벗깁니까? 큰일 날 소리!”
“암튼 지태 씨의 농담은 썰렁하기 그지없어. 그만 갈게요.
오도희가 웃음기 띤 얼굴로 사진기자를 앞세우고 대표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 다시 집무 책상으로 돌아온 지태는 노트북을 살피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메일이 와있는 것이다.
“에릭이네.”
메일을 열어 보던 지태의 얼굴이 미묘한 표정을 연거푸 쏟아 냈다.
기쁨인가 싶으면 어느새 긴장감으로 뒤덮였고, 무거운 낯빛이었다가 이내 어떤 결의를 다지는 눈빛으로 변하기도 했다.
이윽고 미얀마로 향할 순간이 한걸음 앞으로 바싹 다가온 것이다.
미얀마 정보부 요원 탕 마이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거였다.
메일 속에는 지태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만나고 싶어 한다는 탕 마이의 전갈이 적혀 있었다.
신용장을 오픈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니 오더물품 대금의 지불 방법과 그들이 원하는 정확한 물품 등에 대한 논의를 직접 만나서 갖자는 얘기였다.
하긴 아무리 에릭이 중재자라지만 어차피 거래는 자신과 탕 마이 두 사람이 하는 것.
길거리 노점에서 물건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고 일면식도 없이 이 중대한 거래를 진행시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어떤 위험 요인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래였다.
일단 먼저 만나자는 탕 마이의 제안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좋지!”
지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에릭에게 탕 마이의 제안을 수락하겠다는 뜻을 전하려는 것이다.
* * *
지태는 오랜만에 지은을 만나 예기치 않게 사달을 만들고야 말았다.
“도대체 뭐가 고생길이라는 건데?”
지은이 의심쩍은 시선으로 지태의 온몸을 훑었다.
지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푹 한숨을 내쉬는 그 짧은 찰나에도 뭔가 그럴 듯한 변명거리를 서둘러 찾으려고 애썼다.
멀지 않은 날에 다시 외국에 나갈 일이 있는데 그때는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달라고 농담한 것이 결국 이 사달을 만들었다.
꼬치꼬치 캐묻는 지은에게 엉겁결에 미얀마의 오더 건을 꺼냈는데, 이번에도 조금은 위험한 고생길이 될 것이라는 말이 그렇듯 제 발등을 스스로 찍고 만 것이다.
미얀마는 우리나라와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국가이고, 더구나 지금 거래하려는 오더는 밀수도 아니고 정상적인 무역일 텐데 도대체 뭐가 위험한 거냐고 지은은 집요하게 물어 왔다.
지태는 제가 내뱉은 불씨를 서둘러 끄기 위해 시답잖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요즘 좀 시끄러운 나라잖아. 로힝야족 문제로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는 나라이기도 하고. 여하튼 치안이 좀 불안하니까 그냥 해본 소리야.”
하지만 지은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조금이라도 먹혀들어갈 소리를 해야 믿어 주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다.
겨우 미얀마의 치안 불안 때문에 지태가 지레 엄살부터 떨어댔다고?
그건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다.
필리핀에서 그랬고, 케냐에서의 출장길 또한 목숨을 담보로 한 도전이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지태의 입에서 엄살이 나와도 의심 없이 수긍을 할 것이다.
그런데 겨우 정국 불안, 치안 불안 때문이라고?
지은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말해!”
‘헐! 내가 죽일 놈이지.’
오랜만에 만나서 좋은 이야기만 주고받으며 달달한 사랑을 속삭여도 모자랄 판국에 덜컥 제 무덤이나 파고 있다니.
지태는 속으로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 당장 뭔가 그럴 듯한 이유를 늘어놓지 않는다면 이 막다른 골목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지태는 온몸으로 느꼈다.
이럴 경우 지은은 촘촘한 그물망이거나 늪과 같은 존재였다.
발목이 잡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지태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은… 미얀마 조폭과 연계된 사업가가 있어. 그 친구와 거래를 하게 된다는 얘기야.”
작심하고 입을 열긴 했지만, 차마 미얀마 반군인 카친족과 거래를 한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조폭을 끌어다 붙인 거였다.
그럼에도 지은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혀를 차며 지은은 아주 우스워 죽겠다는 듯 내뱉었다.
“뭐어, 조폭?”
지태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다시 또 변명하듯 툭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