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에릭의 입맛 당기는 제안(4)
“뭐지? 우리 현민이 형님 이젠 돗자리 깔 때가 되신 건가?”
“내가 점쟁이 빤쓰를 입어서 그런 게 아니라 넌 너무 얼굴에서 기복이 심해. 희로애락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그거 보는 사람 입장에선 좋은 거 아뇨? 포커페이스가 안 되니까 이용해 먹기 좋잖아.”
“야, 네가 남한테 이용당할 놈이긴 하고?”
그 점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지태는 피식 웃었다.
조현민이 흘깃 지태의 표정을 살피곤 말했다.
“자, 이제 그만 털어놔봐. 뭐야, 무슨 일인데?”
다시금 의미가 잔뜩 밴 웃음을 선보인 지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릭이 제안한 미얀마 오더 건에 대한 거였다.
처음엔 단순한 오더인 줄로만 알고 짐짓 함박웃음까지 지어보이던 조현민이었다.
그러다가 입가에서 급격하게 웃음기가 지워진 것은 오더의 주체가 반군이라는 말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아니, 얼굴 자체가 시퍼렇게 변해 갔다는 표현이 옳았다.
“이제 그런 위험한 일은 안 해도 되잖아. 지금 우리가 벌이고 있는 사업만 잘 꾸려가도 충분히 도약할 수 있잖아!”
조현민이 목청을 높였다.
지태의 마음이 굳혀지기 전에 아예 싹을 잘라야겠다고 마음먹은 거다.
그러나 솔직히 설득할 자신은 없었다.
지금껏 보아온 지태의 성격이라면 벌써 마음을 굳혔을 확률이 높았다.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거침없이 꺼낼 정도라면 이미 마음속으로는 결정을 다 내려놓고 일방적으로 통고하는 측면이 매우 큰 것이다.
“우리들의 현재, 아니 이보다 조금 더 큰 도약만을 꿈꾼다면……. 예, 지금으로도 물론 충분해요. 하지만 야망을 좀 더 키운다면 아직은 부족한 게 많은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잖습니까. 기회란 자주 오는 게 아니잖아요. 할 수 있을 때, 능력이 뒷받침돼 줄 때 무리를 해서라도 바짝 당기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입니다, 형님!”
“물론 기회가 주어질 때 잡으면 좋지. 근데 넌 왜 꼭 죽을 자리만 찾아다니려고 하는 건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야.”
조현민은 이미 설득이 안 될 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너 정말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다 때려치울 거다. 너를 사지로 내보내고 나 혼자 가슴 조마조마하며 버티는 거 이젠 질린다고, 인마!”
“방법이 있을 겁니다, 형님.”
“무슨 방법?”
“형님이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뭐든 안전한 장치를 만들어 놓고 추진하겠다는 얘기예요.”
“새끼가 정말! 빈말이라도 하지 않겠다는 소리는 죽어도 안하네.”
조현민이 입을 반쯤 벌린 채 약간은 노기를 띤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지태가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뒷머리를 긁었다.
* * *
에릭이 방한한 지 나흘째 되는 저녁이었다.
케냐로의 출국을 하루 앞둔 날이기도 했다.
지태는 저녁 메뉴로 왕갈비를 추천했다.
소와 돼지를 반반씩 주문했는데, 에릭은 식사 내내 원더풀을 외치며 환호했다.
기민성은 때마침 집안에 제사가 있어 함께하지 못했다.
늦은 오후, 기민성은 에릭에게 전화를 걸어와 어차피 케냐로 돌아가면 우리 두 사람은 자주 볼 사이이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고 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지태가 2차로 그를 데려간 곳은 호텔 라운지 바였다.
내일 출국할 에릭을 배려해 간단히 이별주를 나눌 생각이었다.
“미스터 한!”
술잔을 한입에 비운 에릭이 문득 불렀다.
“……?”
대답 없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에릭이 피식 웃는다.
“왜요? 헤어지기가 서운해서 그럽니까?”
느끼함이 조금 배어있는 지태의 물음에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일단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오늘 예매한 항공권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지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서…….”
지태가 그윽하게 웃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난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에릭.”
어제 기민성과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에릭은 마지막으로 지태의 대답을 확인했었다.
미얀마 반군의 오더 건을 진짜로 맡을 것이냐고.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을 마친 터라 지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릭은 곧장 케냐로 돌아가지 않고 미얀마에 잠시 들렀다가 귀국하겠다고 했다.
전화상으로 이쪽의 예스 사인을 탕 마이에게 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좀 더 디테일한 부분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오늘 오전, 지태의 결심을 확인한 에릭은 미얀마 양곤행 항공권을 예매했던 것이다.
“항공권을 취소할 일은 없으니 그건 됐고, 이젠 우리 둘의 애틋한 이별을 아쉬워하며 건배!”
버터가 아무리 느끼하다 해도 이보다 더 기름지기까지야 할까.
에릭의 건배사에 지태가 낯간지럽다는 듯 몸서리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영영 이별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분위기 잡기 없깁니다.”
지태가 픽 웃는 낯꽃으로 에릭의 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쳤다.
* * *
인천공항엔 자신보다 며칠 앞서 케냐로 돌아가는 에릭을 배웅하기 위해 기민성도 발걸음을 함께했다.
지태는 비행시간이 다 되어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는 에릭과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출국장 너머로 에릭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애틋하냐? 누가 보면 꼭 머나먼 이국땅에 여친이라도 보내는 줄 알겠다!”
기민성이 킥킥거리며 놀린다.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엎드리면 코 닿는 곳에 사는 것도 아니잖아.”
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머쓱한 기분을 날린 지태가 출구 쪽을 가리켰다.
“그만 가자.”
“왜, 벌써? 비행기 뜨는 거 안 봐?”
“쓰읍!”
“야, 알았어, 알았다고. 이제 안 놀릴게.”
지태가 인상을 쓰며 흘기자 기민성이 제풀에 놀라 두 손을 번쩍 들고는 뜀걸음으로 앞서 걸어갔다.
“넌 언제 출국이냐?”
운전대를 잡고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태가 물었다.
기민성이 가만히 날짜를 헤아리더니 떨떠름하게 내뱉었다.
“모처럼의 휴간데 벌써 반절 이상을 까먹었네. 이제 겨우 나흘 남았다.”
“나 같았으면 아무 일도 안 하고 열흘씩이나 놀고먹으면 좀이 쑤시겠다. 넌 안 그래?”
“좀이 쑤시긴! 내 휴가 중에 절반을 너하고 에릭한테 쏟아 부었어, 인마! 그것만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서 자다가도 벌떡 깬다. 어쩌다 내가 이런 영양가 없는 놈들을 친구로 만나선…….”
“지랄!”
지태가 살짝 흘기고는 다시 전방을 바라보자 기민성이 느닷없이 나사 빠진 것처럼 낄낄거렸다.
그 웃음이 멈춘 시점은 문득 정색하고 던져오는 지태의 물음 직후였다.
“너 언제 우리 회사로 합류할래?”
“……!”
“농담 아냐. 진심을 다해 묻는 거다. 한스가 커나가는 모습을 너와 함께 지켜보고 싶다는 얘기야.”
“알아, 무슨 말인지. 고마운 제안이고. 근데 지금은 아니라고 본다.”
“왜?”
“너무 거저먹는 거 같잖아. 다 차려 놓은 밥상에 나더러 염치없이 수저 하나 슬그머니 얹어놓으라고? 그건 내 쫀심이 상하는 일이야.”
“이제 시작이야.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이라고.”
“암튼 지금은 아냐.”
“그럼 언제?”
“나도 뭔가 한 큐는 들고서 발을 담가야 체면이 서지.”
“……?”
“그게 뭐든!”
기민성이 하얀 치아를 환하게 내보인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지태가 흘깃 돌아보긴 했지만 따라 웃진 않았다.
대신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담아 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이렇게 하자.”
“……?”
“네가 우리 한스의 아프리카 총괄 지사장이 돼 줘라.”
“그게 그 소리지, 뭐. 결국 나더러 큐브에 사표를 던지란 얘기 아니냐.”
“아직 사표는 던지지 말고 그대로 나이로비 지사에 근무하면서 오더 관리만 좀 맡아달라는 얘기야.”
“나보고 이중 플레이를 하라고?”
“큐브와 오더가 겹치거나 침해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할게. 또 시장 개척 같은 것도 우리가 다 알아서 할 거고. 다만 우리 한스가 지사를 둘 형편이나 인력이 안 되니까 알바 형식으로 네가 일 좀 봐달라는 거다.”
“알바라…….”
기민성이 지태의 말을 되뇌며 깊은 콧숨을 뱉어냈다.
“그건 생각해볼 문제겠는데.”
생각해 보겠다는 것은 진한 긍정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적어도 지태의 귓가에는 그렇게 들렸다.
지태가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걸자 기민성이 흘깃 돌아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나 아직 승낙한 거 아니다. 생각해볼 문제라고 그랬지.”
“누가 뭐래냐…….”
지태는 다시금 그윽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 * *
에릭이 미얀마로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에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은 어제 미얀마에서 케냐로 돌아왔다고 했다.
지태는 궁금한 게 있었다.
미얀마의 MI 요원인 탕 마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다음 곧바로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 아무런 기별도 없이 케냐로 곧장 귀국해 버린 까닭이다.
그러나 지태는 그 궁금증을 꾹 누르고 가슴속에만 담아 두었다.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그러자 에릭이 먼저 그 부분을 건드리며 나왔다.
- 내가 왜 전화를 안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한?
“연락을 하지 못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 이래서 내가 미스터 한을 좋아한다니까. 진정한 보스란 일단 참을성이 있고 배포가 커야지요. 사실 미얀마 현지 사정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더군요. 그래서였어요. 혹시 모를 도청의 위험도 있고…….
“그런 이유 때문일 거라고 짐작은 했습니다. 그런데 미얀마 현지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지태의 물음에 에릭은 잠시 침묵과 함께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최근 벌어진 미얀마의 현지 사정이란 것에 대해 먼저 설명해주었다.
그는 이번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을 대충 간추리면 이런 내용이었다.
메콩강을 중심으로 미얀마, 태국, 라오스 등 세 나라의 국경이 접해 있는 산악 지역, 일명 골든트라이앵글이라 불리던 곳은 세계 최대의 마약 생산 기지라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곳을 오랜 세월 장악하고 있던 이가 바로 ‘마약왕 쿤사’라는 것도 워낙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런 마약왕 쿤사가 1996년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 본거지와 무기류 일체를 미얀마 정부에 양도하고 투항하면서 예전의 명성은 비로소 끝이 났다.
본거지를 양도한 대가로 쿤사는 신병이 구속되는 일은 물론 일체의 죗값조차 치르지 않았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쿤사는 호텔 경영이나 국내외 여러 이권 사업에 관여하면서 과거를 완전히 세탁한 유력 비즈니스맨으로 변신을 꾀했다.
그렇듯 사업가로 변신한 쿤사의 호화로운 노후 생활은 200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럼 그것으로서 트라이앵글을 중심으로 한 세계 최대 마약 생산 기지와 판매자들이 동시에 모두 사라졌느냐?
그건 아니다.
쿤사가 넘긴 것은 군사 시설과 무기 등의 이양이었지 마약 이권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후에도 후계자를 자청하는 자들이 여러 세력으로 난립하며 왕성한 활동을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쿤사가 이끌던 시절과는 차이가 있었다.
활동 영역이라든가, 영향력, 세력 면에서 쿤사 시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위축되고 약화된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약을 판 자금을 바탕으로 비교적 덜 위험한 곳에 투자를 하는 등의 새로운 활로를 찾기에 바빴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에릭은 잠시 말을 쉬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