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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30화 (130/272)

130화. 에릭의 입맛 당기는 제안(3)

“참, 내 말대로 했어?”

뜬금없는 소리에 기민성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뭘?”

“내가 출근하기 전에 너한테 문자 보낸 거 있잖아.”

에릭에게 한국식 해장국을 대접해주라는 문자였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기민성이 씩 웃었다.

“야!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호로록 전부 다 들이마셨어. 그렇죠, 에릭?”

“굳! 베리 굳!”

기민성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좋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뭘 먹었는데?”

“황태 해장국!”

기민성의 대답에 지태가 밝게 웃었다.

속풀이 해장국으로 그것만큼 훌륭한 게 어디 또 있을까.

“그럼 아직 점심 생각은 없겠네?”

“그건 그거고 시간되면 또 먹어야지.”

기민성이 그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한국말과 함께 흘겼다.

느닷없는 한국말에 에릭이 쳐다보았다.

“점심은 뭘 먹을까 상의한 겁니다.”

“뭐든! 한국 음식에 푹 빠져서 나이로비에 돌아가면 난 앞으로 한국 식당만 찾아다닐 것 같습니다, 한!”

진심이 묻어나는 소리였다.

지태가 그윽한 미소로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 후로도 그들은 얼마간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화제 삼아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지태가 정색하고 물었다.

어제 마무리를 짓지 못한 미얀마의 오더 건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그러잖아도 에릭 역시 그 이야기를 꺼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미스터 한은 미얀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글쎄요.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오랜 세월 군부 정권을 거쳐 얼마 전 민정이양이 됐고, 그 결과로 아웅산 수치 여사가 국가 고문역에도 올랐다는 것, 그리고 요즘 국제적 이슈로 떠오른 로힝야족 학살 정도…….”

“그럼 미얀마가 진정으로 민정이양이 됐다고 보십니까?”

“아닌가요?”

지태가 되묻자 에릭이 쓰게 웃었다.

“반반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워낙 오랜 세월을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보니 민정이양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미얀마 전반에 걸쳐 뻗어 있는 형편이죠. 수치 고문역도 그들의 협력 없이는 국가 운영이 불가하니까 일정 부분 힘을 나눠준 측면도 있고. 아니, 나눠줬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 의해 조종되는,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바지사장이라고나 할까. 암튼…….”

“그 정도입니까?”

“내 사견이 조금 섞여 있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 정보부에서 파악하고 있기로는 그렇습니다.”

에릭은 계속 이어서 군부의 영향력이 대단한 현 미얀마의 실태를 설명해 갔다.

미얀마에 만연한 부정부패, 그리고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 중에 가장 유력한 인물, 현재 군 최고사령관의 위치에 있는 그 사람의 입김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서도 설파했다.

지태가 쓰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이제 미얀마에 대한 공부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도 조금은 포함돼 있었다.

의미를 알아차린 에릭이 머쓱하게 웃었다.

“한이 궁금한 것은 오더를 부탁한 사람에 대한 것이겠지요?”

“……!”

지태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강한 긍정이었다.

“‘탕 마이’라고 미얀마 MI 팀장입니다.”

“MI가 정보붑니까?”

“일명 군사 정보부라고 하는데, Lieutenant in Burma’s Military Intelligence에서 뒤의 이니셜만 따서 간단히 MI라고 부르죠.”

군부가 득세하는 국가이니 정보부 명칭도 군사라는 말이 꼭 들어가는가 보다.

지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어서 에릭은 미얀마의 정보부 요원인 탕 마이가 왜 반군 측에 협조하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탕 마이는 미얀마 국군 사관학교 출신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중령 계급인 두디야 보흐므지라고 했다.

원래는 자신의 친형과 함께 만달레이(Mandalay)에 소재한 센트럴 커맨드 사령부의 정보 장교였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다가 탕 마이는 육군 대령이면서 사령관의 참모였던 친형의 추천을 받아 정보부로 영전했다.

그 과정엔 친형을 마치 의형제처럼 아끼던 사령관의 입김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진 겁니다. 워낙 군부 내에 부정부패가 만연하니까 참다못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겁니다. 갈수록 사태가 커지자 제2의 민주화 운동으로 번질까봐 총사령관이 서둘러 숙정 작업을 벌였어요. 그리고 개중 몇몇은 실제 본보기로 사형을 집행해 버렸고.”

“그럼 탕 마이라는 사람의 친형도?”

지태가 되묻자 에릭이 쓰게 웃었다.

“예. 희생당한 겁니다, 믿었던 사령관한테. 완전히 독박을 써버린 거죠.”

“헐!”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군부가 완전히 썩어 있었어요. 심지어 총부리를 서로 겨누고 있는 반군한테 군수품과 무기류까지 팔아먹는 형편이었으니까. 여하튼 돈은 사령관이 챙기고 모든 거래 흔적은 수족처럼 움직인 탕 마이의 친형에게 남아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걸려든 겁니다.”

“그럼 탕 마이는 그 반발심 때문에 반군과 거래를 하는 겁니까?”

“그런 점도 없지 않다고 봐야겠죠. 하지만 말을 들어 보면 그보다는 돈에 더 목적이 있는 거 같아요. 미얀마가 조국이긴 하지만 이젠 진저리가 난답니다. 돈을 모아 미얀마를 떠나고 싶다는 거예요.”

그쯤에서 지태는 의문이 생겼다.

탕 마이가 반군과 내통을 하고 거래를 해온 것이 비단 한두 번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또 다른 거래선을 찾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존 거래선 외에 또 다른 거래자를 찾는 이유는요?”

그 대목에서 에릭은 쓰게 웃으며 자신의 까칠까칠한 턱을 쓸었다.

왠지 수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다.

지태가 빤히 바라보자 에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기존에 거래하던 친구는 중국인이었는데, 얼마 전 죽었다고 하더군요. 카친 반군의 수도인 라이자(Laiza)로 물품을 배달하러 가는 도중 정부군한테 들켰던 모양입니다.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정규군에게 민간인이 어디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죄다 몰살을 당했다고…….”

지태가 쓴맛을 다셨다.

반면 기민성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러면서 흘깃 지태를 바라보았는데, 벌써 이번 오더 건에 대해서 부정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지태가 그를 향해 피식 웃어주고는 다시 에릭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만큼 위험한 일이고 어쩌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는 얘긴데…….”

“반대급부로 그에 따른 보상은 아주 짜릿할 테죠. 모험을 걸어 봐도 좋을 만큼 솔깃한 제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 또한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미스터 한의 의향이나 한번 물어보는 차원입니다.”

차라리 그럴 것이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나 말든가.

지태는 경직된 근육을 풀 듯 가슴을 쫙 펴 보인 다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사무엘 은조로게를 잡을 때보다 혹시 더 위험할까요, 에릭?”

“글쎄요. 위험할 수도, 아닐 수도 있겠죠. 말했잖습니까. 미얀마 정부나 군부는 부패에 만연해 있다고. 요령껏 움직이기만 한다면 위험 또한 얼마든지 돈으로 살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러자 기민성이 끝내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릭! 그니까 이번 오더를 받으라는 거요, 말라는 거요. 조금 전에는 굳이 권하고 싶지 않다면서…….”

“솔직히 미스터 기였으면 내가 권할 생각을 하지도 않지요. 아니, 애초에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한이잖아요. 케냐에서도 살아남았던 불사조, 미스터 한!”

기민성의 기분을 언짢게 할 의도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기민성 역시 기분 나쁜 안색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 자신도 지태의 무식할 정도로 대담하면서 저돌적인 도전 정신을 순순히 인정하는 바였으니까.

기민성이 지태를 돌아보았다.

“어쩔 거냐? 이렇게 살벌한데도 이번 일이 끌려?”

“글쎄…….”

“글쎄라고…? 허!”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저울추가 긍정에 가까운 뉘앙스를 풍기자 기민성이 입을 떡 벌리며 쳐다보았다.

에릭이 팔짱을 끼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허공에 너풀너풀 흘렸다.

* * *

이런저런 질문과 답변들이 오가는 가운데 점심식사의 때를 그만 놓쳐 버렸다.

지태는 에릭과 기민성을 데리고 회사를 나왔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식당에서 불고기 백반으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지태는 에릭에게 미얀마 반군 측에서 어떤 물품들을 주로 원하느냐고 물었다.

기민성이 입으로 가져가던 수저를 든 자세 그대로 지태를 흘깃 돌아보았다.

어느 정도 결심이 서있지 않은 이상 그런 질문이 나올 리 없는 까닭이다.

시선을 느꼈지만, 지태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에릭의 입을 주시했다.

“예전에 중국인 무역업자가 취급했던 물품들 그대롭니다. 주로 군화와 군복 등 군수물품들하고 의약품. 거기에 중고 SUV 차량을 원한다고 합니다. 작전지역이 주로 산악지대다 보니까 그걸 개조해서 군용차량으로 쓰려는 의도겠죠.”

“중고 SUV라…….”

지태가 에릭의 말을 되뇌며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일반 군수 물품도 아니고 차량이라면 이동하거나 전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문제가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감시자의 눈에 지나치게 확 띈다는 점도 분명 치명적인 걸림돌이었다.

“거봐.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야. 그냥 포기해라. 이건 정말이지 아니라고 봐, 나는!”

기민성은 입맛이 달아났는지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우려가 지나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태는 피식 웃는 것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또 다른 질문이나 의문 제기 없이 묵묵히 수저질을 했다.

“에릭! 이거 맛이 어떻습니까? 외국인들이 뽑은 베스트 한국 음식 중 하나에 포함되는 음식인데.”

“말했잖습니까. 난 한국 음식에 완전히 매료된 사람입니다. 뭐든 다 맛있어요. 엑설런트!”

“허!”

두 사람의 태도를 보면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오로지 기민성뿐이었다.

식사 후 지태는 혼자서 회사로 돌아왔다.

에릭이 낮 동안 서울 시내 관광이나 하고 싶다는 청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이드 역은 당연하게도 딱히 할 일이 없는 기민성의 몫이었다.

복도에서 한스홀딩스 사무실로 들어서려던 지태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이던 지태는 한스무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쓰게 미소를 지은 후 곧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겨 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강요한 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해왔다.

경력직 채용 때 과장으로 입사를 했다가 회사 이전과 함께 바로 부장으로 승진한 강요한.

영업 총괄 본부장 겸 상무이사로 올라선 윤민수와 함께 가히 초특급 승진을 한 케이스였다.

“조 사장님 안에 계시죠?”

“예, 계십니다.”

지태가 끄덕이며 대표실로 발길을 옮기려다가 문득 다시 돌아보았다.

“강 부장님, 전에 있던 회사에서 미얀마 쪽도 담당한 적이 있다고 했죠?”

“예, 그렇습니다만.”

“알겠어요. 나중에 나와 둘이서 대화 좀 나누십시다. 그럼…….”

알쏭달쏭한 지태의 말에 강요한 부장은 그가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멀뚱히 쳐다보았다.

“어쩐 일이야, 여길 다 오고?”

대표실에 들어서자 집무 책상에 앉아 있던 조현민이 웃으며 다가왔다.

“너무하시네. 이제 나는 이곳에 아무 때나 오면 안 되는 겁니까?”

지태가 짓궂은 미소를 날리며 소파에 앉았다.

“아, 예, 회장님. 제가 깜빡했네요. 우리 한스그룹이 여기 한지태 회장님의 소유라는 것을.”

“에혀!”

지태가 떫게 입맛을 다시자 조현민이 씩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진짜 무슨 일이야? 그냥 차 한 잔 마시러 온 표정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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