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한스그룹의 기초(2)
“티끌 같은 업체 몇 개를 통합해서 전자회사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해하겠어. 한데 무슨 돈이 있어서 홀딩스를 세웠다는 거지?”
“조사를 해본 바로는 외국계 기업으로부터 꽤 많은 액수를 투자받았다고 합니다.”
“투자? 어느 나라 기업인데?”
“케냐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투자기업은 알려진 바가 없고요.”
“케냐? 허, 웃기지도 않는군.”
임경남은 투자한 기업의 국적이 케냐라는 말에 입을 떡 벌린 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공채 규모는 얼마나 돼요? 한 대여섯 명 뽑은 거야?”
“저, 그게 30명이나 됩니다, 사장님.”
순간 헛웃음을 내뱉던 임경남의 입술이 꾹 닫혔다.
상당히 놀란 눈빛이다.
창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구멍가게 수준이라고 얕보았는데 30명이라면 꽤나 많은 숫자인 것이다.
오한표 비서실장의 부연 설명이 덧붙여졌다.
“더구나 신입 사원의 연봉 수준이 대기업의 그것에 버금간다고 합니다. 특히 ‘한지태’라는 이름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거의 영웅 내지는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터라 그렇게 지원자가 많았던 걸로 알려졌…….”
“집어치워!”
버럭 내뱉는 임경남의 고함소리에 오한표 실장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었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 터에 얼마나 놀랐던지 딸꾹질까지 해댔다.
그러다가 속으로 가만히 자신이 방금 읊조렸던 말들을 더듬어 되짚어갔다.
분명 임경남이 자신에게 한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라고 했던 것은 호의를 가져서가 아니었다.
뭐든 꼬투리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내라는 밀명이었던 것인데, 오히려 칭찬 비슷한 보고를 올렸으니 얼마나 울화가 치밀겠는가.
실수를 깨달은 오한표 실장이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사과를 하는 모습조차 꼴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임경남이 못 마땅하다는 헛기침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보고를 마쳤으니 나가야 할 판이지만, 명령이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는 찰나였다.
띠리릭.
고요한 적막 한가운데로 문자가 왔다는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금 임경남의 인상이 구겨졌다.
자신과 있을 때는 모든 벨소리를 무음으로 해놓던지, 아니면 진동으로 해놓아야 한다.
그런 부주의한 면을 차가운 표정으로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오한표 실장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그게… 사장님 폰입니다.”
“……!”
임경남은 머쓱했다.
괜히 또 한 번 못마땅하다는 헛기침을 내쏟으며 턱짓을 해댔다.
“그만 나가서 일봐요!”
오한표 실장이 정중히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고 나가자 임경남은 쓴맛을 다시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골드웰 송영완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인도네시아 소형 청소기 건 말이야. 왠지 우리가 놈들한테 발린 거 같다. 시간 나면 전화 한번 줘라. 점심 때 잠깐 만나던지 하게.]
설마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내젓던 임경남의 표정이 빠른 속도로 일그러졌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과 함께 왠지 더러운 기분이 차츰 뇌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 * *
지태는 각 사(社)의 사장단을 소회의실로 따로 불러 티타임을 가졌다.
“한 사장! 아니지, 이제는 엄연히 3사를 거느리는 대표이사이니 회장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이동구 사장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농을 건네면서도 경어를 붙였다.
“왜 이러세요, 이 사장님!”
지태가 계면쩍은 미소로 응수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안 그래요, 다들?”
이동구 사장은 주위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모두는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밝게 웃었다.
그렇다고 부인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근데 조금 전에 저는 왜 부르셨습니까?”
지태의 지적에 이동구 사장은 농담 때문에 본질을 잠시 까먹었다는 듯 히죽 웃고는 곧 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이제 다음 수순은 어떻게 되는가 싶어서 말입니다.”
“아까 대회의실에서도 밝혔듯이 이제 곧 전자의 이전이 있을 겁니다. 후보지는 현재 우리가 원하는 조건과 부합하는 몇 곳을 선정해 검토 중에 있습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차원에서 따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있고요. 머잖아 최선책을 마련해 답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아, 예!”
질문을 던졌던 이동구 사장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고, 뒤이어 한스전자의 유근영 전무와 홀딩스의 유기영 부사장이 천천히 끄덕였다.
전자의 이전을 위한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조현민과 윤민수 상무는 조용히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신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동구 사장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지태를 돌아보았다.
“저기, 한 사장!”
“예!”
“미처 말씀을 못 드린 게 있는데, 사실은 약 2주 전쯤 공장에 누가 찾아와서 청소기 제조라인을 살펴보고 간 적이 있어요.”
“아, 그래요? 자신이 누구라고 밝히던가요?”
“말로는 그럽디다. 자기가 부산 지역에서 무역을 하는 사람인데, 자기네와 거래하는 바이어가 청소기를 좀 알아봐달라고 해서 실사 겸 해서 견학을 왔다고.”
그러자 지태의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그려졌다.
그 표정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조현민을 돌아보았는데, 그 역시 같은 미소를 입가에 그리고 있었다.
“제가 부탁드린 대로 라인이 바쁘게 돌아가는 척하셨죠?”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하라는 대로 하긴 했어요. 주문도 없는데 물건을 억지로 찍어내는 척하려니까 좀 우습기는 했지만. 근데 무슨 일이오?”
“나중에 상세히 말씀드릴 날이 올 겁니다. 지금은 그냥 모르는 척해주세요.”
이동구 사장이 입맛을 떫게 다셨지만, 여타 다른 군소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태는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체크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지태가 전자의 유근영 전무를 돌아보았다.
“유 전무님, 식사하러 가시죠.”
“아, 그럴까요?”
그러면서도 왜 자신만을 콕 집어 말하느냐는 눈빛이다.
“조현민 사장님과 잠깐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그럽니다. 유 전무님이 여기 계신 분들을 모시고 먼저 내려가 계시면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대답을 마친 유근영 전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각 사의 임원진 모두가 따라 일어섰다.
함께 소회의실을 나온 지태는 그들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사이 조현민을 이끌고 홀딩스가 자리한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점심시간 전에 사장실을 나온 임경남은 수행 기사 없이 손수 차를 몰고 송영완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송영완이 미리 예약해놓은 곳은 광진구에 있는 전망 좋은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한강의 조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운치 넘치는 호텔이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나 만끽하려고 가는 길이 아니다.
임경남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번 송영완이 보내온 문자와 함께 약속을 잡으면서 그와 나누었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시발, 아무래도 우리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거 같아.]
“개새끼!”
기억을 떠올리던 임경남의 입에서 급기야 욕설이 새어 나왔다.
인도네시아의 바이어와 맺은 계약이 지태의 농간이었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지태의 사업에 연거푸 타격을 주기 위해 무리를 해서 겨우 바이어의 마음을 돌려놓았었다.
그 대가로 임경남은 소형 진공청소기의 가격을 바이어가 요구한 대로 40%까지 다운시켜 주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울며 겨자 먹기로 청을 받아 준 것은 오로지 지태의 사업을 어떻게든 망쳐 놓고 싶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태의 되치기였다는 게 서서히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혹시 이 새끼가 지난번에 물건 바꿔치기한 것을 알아챈 건가?’
임경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송영완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벌써부터 골치 아프게 머리를 굴릴 필요는 없었다.
임경남이 다시금 이를 악무는 사이 어느새 약속장소인 호텔이 저 멀리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 * *
한스홀딩스 대표실은 두 사람이 시원하게 내지르는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이제야 뒤통수를 맞았다는 걸 눈치채면 뭐해. 어차피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 안 그래?”
조현민이 다시금 통쾌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낄낄거렸다.
“어제 에디가 뭐라고 그래요? 혹시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처럼 다른 소리를 하던가요?”
지태가 약간의 부정적인 얼굴을 하고서 물어보자 조현민이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어딜! 어제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아주 신났더라고. 왜 아니겠어. 동구전자, 아니 이제는 한스전자로 통합됐지만. 암튼 이름도 없는 중소기업의 제품 값으로 글로벌 기업인 부경의 진공청소기를 구매했어. 수출 단가만 하더라도 거기와는 현저하게 차이가 나잖아?”
“글쵸!”
지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조현민이 더욱 열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부경전자의 청소기를 우리 제품 단가로 구매를 했어. 어디 그뿐이야? 우릴 죽이려고 다급한 마음에 40%나 다운된 가격에 맞춰 줬잖아. 정상가로 부경의 청소기를 구입하려면 우리 제품의 30% 정도는 더 얹어 줘야하는 것을 거의 땡처리 가격으로 수입하게 됐으니…… 하하핫. 지금 에디는 어깨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심정일 걸!”
“그거야 임경남이가 제 발등을 스스로 찍은 거니까!”
지태가 입술 끝을 비틀며 임경남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말을 이었다.
“참, 에디가 우리 측에 줄 커미션에 대해선 무슨 말 없던가요?”
“물건이 넘어오는 즉시 자신이 이득을 본 금액에서 30%를 바로 송금해주기로 했어.”
조현민이 기분 좋은 웃음을 날렸다.
결과적으로 임경남은 지태의 사업을 망치려다가 오히려 이쪽에 돈을 보태준 꼴이 되고 말았다.
만일 임경남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장 분통이 터져 죽을 것이고.
조현민을 따라 웃던 지태가 문득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체크하는 시늉했다.
“그만 가시죠, 형님.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실례니까.”
“너는 이제 좀 늦어도 돼. 회장님이니까!”
조현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툭 내뱉어 놓고는 히죽 웃었다.
“자꾸 놀릴 겁니까?”
“웃자는 소리야. 오늘 내 기분이 너무 좋아서 말이야.”
조현민이 손사래를 치며 먼저 대표실을 나갔다.
뒤따라 지태가 이제 막 문을 나서는데 직원 하나가 난초 화분을 들고 왔다.
지태가 눈빛으로 이거 웬 거냐고 묻자 직원이 화분에 매달린 리본을 보고는 말했다.
“DD 엔터테인먼트 이돈두 회장이라고 적혀 있는데요, 사장님.”
그 소리에 지태가 피식 웃었다.
“어디에 놓을까요?”
“음… 아! 저기가 좋겠군!”
지태는 검지로 자신의 집무 책상을 가리키고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이돈두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통화 목록을 뒤지는 찰나 돌연 액정화면이 바뀌었다.
“암튼 이놈도 양반은 못 돼!”
지태가 기분 좋은 웃음을 날렸다.
- 일부러 시간 맞춰 전화한 건데, 지금은 좀 한가하지?
이돈두는 나름 지태의 사정을 무지 배려했다는 식으로 말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