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첫 공채(2)
강남역 부근에 있는 부대찌개 전문점이다.
약속장소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지태와 조현민은 이제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유성락 부회장과 유기영 변호사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지태는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인사를 꾸벅했다.
“회장님을 좀 더 좋은 곳에서 모시려 했는데…….”
유성락 부회장에게 저녁을 대접하는 장소로는 이 자리가 약간 모자람이 있다고 느낀 지태였다.
그래서 멋쩍은 웃음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유성락 부회장은 털털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 친구야! 날이 차가울 때는 따뜻한 국물만큼 좋은 것도 없어. 그리고 난 요란을 떨며 만드는 요리보다는 이런 서민적인 음식이 더 좋아. 자넨 안 그런가, 유 변호사?”
지태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의도였을까.
유성락 부회장은 유기영을 돌아보며 동조해주라는 눈빛을 보냈다.
“저 역시 이런 데가 편하고 좋습니다, 회장님.”
합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며 조용하게 웃던 지태가 깜빡했다는 듯 조현민을 소개했다.
“참, 유 변호사님! 서로 인사 나누시죠. 여긴 한스무역의 조현민 전무, 아니지 이젠 새 대표님이시네요.”
“반갑습니다. 유기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간단한 수인사가 끝나갈 무렵 종업원의 손에 들린 부대찌개 냄비가 그들 앞에 놓여졌다.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라서 그런지 부대찌개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진한 육수에 모둠 사리까지 곁들이니 서민 음식이라고 하지만 임금님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반주로 시킨 소주 한 병이 거의 밑바닥을 보일 즈음이었다.
유성락 부회장이 문득 소주잔을 비우다가 말고 지태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대뜸 물어 왔다.
“어디까지 진척이 되었나?”
앞뒤가 잘린 물음이었지만, 지태는 퍼뜩 알아들었다.
보나마나 요즘 추진하는 일들 전반에 관한 물음일 거다.
지태는 방금 마신 술잔을 내려놓으며 기다렸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경인지역 연합모임의 사장님들을 규합하는데 앞장서서 이끄신 분이 이동구 사장님이라는 건 회장님도 잘 아시죠? 그분이 업계에서 나름 신망이 높아서인지 믿고 동참하겠다는 분들이 꽤 됩니다. 현재까지 총 열여덟 분의 사장님들이 뜻을 모은 상탭니다.”
“음… 그 정도면 스타트로써는 썩 괜찮구먼, 그래. 그럼 일단은 전자 쪽부터 재 창업을 하는 형식을 취해야겠구먼?”
“예. 그래서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전자의 창업 작업도 동시에 병행하려고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백 번 말로 설득하느니 저희가 지금껏 세워놓은 골조를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 주는 것만 못할 테니까요.”
“당연한 일이지. 그렇게 회사가 세워지고 뼈대가 잡혀가면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 의사를 보내올 거야.”
유성락 부회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지태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다만 고민스러운 점들이 좀 남아있습니다.”
지태가 제 말끝에 생각이 많은 표정을 짓자 뭐든 편안하게 말해보라는 식으로 유성락 부회장이 턱을 한번 치켜들었다.
“첫째, 각 사업장들이 현재 여러 지역에 나뉘어 중구난방으로 넓게 분포되어 있는 관계로 통합 관리하는 일에 애로점이 많다는 겁니다.”
“음, 그렇기도 하겠군.”
충분히 납득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거기에 대고 지태의 말이 이어졌다.
“관리야 그렇다 쳐도 비슷한 업종끼리는 생산 라인을 하나로 통폐합하려고 하는데 그게 당장은 어렵다는 점입니다.”
“음!”
유성락 부회장은 좀 전에 비우다 말았던 소주잔을 다시 들더니 동의한다는 신음성을 살짝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로는 고민스럽다고 했지만, 지태의 표정을 보니 그가 이미 어떤 해답을 찾아냈다는 것을 읽은 까닭이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티가 났습니까, 회장님?”
“자넨 배우를 안 하길 다행으로 알아야 해. 티가 많이 났어!”
유성락 부회장이 직설적으로 내뱉자 지태는 물론 조현민과 유기영 변호사도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지태가 다시 정색하고 말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이겁니다. 미분양 된 농공산업단지!”
“미분양 된 농공산업단지라……. 그거 꽤 괜찮은 발상이군. 입주할 업체가 없어 방치되는 것보단 지방 자치단체에서는 어떤 혜택을 주어서라도 입주할 업체들을 유치하려고 애쓰는 실정이니까. 다만 물류비용도 고민해야할 부분이니까 너무 수도권에서 멀거나 외진 곳은 안 되겠지?”
“예. 그래서 수도권 인근으로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것 외에는? 아까 고민스러운 것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유성락 부회장은 조금 전 마시려다 말았던 소주잔을 마저 비웠다.
그가 안주 삼아 국물 한 수저로 입을 헹구길 기다렸다가 지태가 빈 잔을 다시 채워 주면서 천천히 입을 떼었다.
“두 번째는 판로 문젭니다, 회장님.”
“판로?”
“지금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업체들은 대부분 자체 판매망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대개가 대기업 하청이나 OEM방식으로 납품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한데 이제부터 하나로 통합이 된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지 불투명해서 말입니다. 기존의 불합리한 조건으로는 제가 거래를 하고 싶지 않거든요.”
지태가 단호한 결의를 담은 말투로 끝을 맺었다.
“그렇담 자체 판매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얘긴데…….”
“예, 회장님! 그러자면 시일이 많이 걸릴 것이고, 또한 그동안 적자가 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겠죠.”
“기존의 거래 방식대로 하자니 통합에 따른 메리트가 하나도 없고, 거부하자니 판로가 개척되지 않은 상태고……. 참으로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구먼.”
“문제는 시간과 자금입니다. 그 조건만 맞아 떨어진다면 저번에 말씀드렸던 우리의 자체 판매망을 갖추면 되니까요.”
“저번? 아, 그거!”
생활용품 전문판매점인 ‘다이써’를 벤치마킹한 새 사업체를 말하는 것이다.
지태는 그런 전문판매점을 전국의 대도시마다 각기 하나씩 오픈해 자사의 소형 가전뿐만 아니라 참여를 원하는 모든 업체의 제품들을 전시 판매할 생각이었다.
더불어 톡톡 튀는 중소기업의 아이디어 상품들도 구비해 매장의 품목을 점차 넓혀갈 생각도 품고 있었다.
“시간을 두고 서로 머리를 맞대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근데 내 생각엔 작업 라인을 올 스톱하는 것보다는 기틀이 잡힐 때까지는 좀 더럽고 치사하긴 해도 참고 견뎌보는 게 어떨지 싶은데? 당장 뾰족한 방법이 없을 땐 현실과 타협하는 것도 현명한 생각이니까.”
“역시 지금으로선 그 방법밖엔 없을까요?”
“걸음마를 떼기도 전인데 달음박질부터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역시나 지태의 두 번째 고민거리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그러나 굳이 이 자리에서 해답을 구하려는 것은 아니었기에 지태는 곧 수긍하고 다른 화제로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 * *
식사를 마치고 나왔지만, 아직 밤 9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태는 자리를 옮겨 술을 한잔 더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유성락 부회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일 아침에 중요한 조찬약속이 있다는 거였다.
지태가 유기영 변호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까지 세 번째 만남이었지만. 그때마다 술을 사양하던 유기영 변호사였다.
역시나 오늘도 그는 다음에 마시자는 말로 2차 술자리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술이 약하다는 말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들은 적이 있어 지태는 유기영 변호사의 거절이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을 돌려보내고 난 다음 지태가 조현민을 흘깃 돌아보았다.
“이대로 들어가긴 아쉽죠?”
“그걸 말이라고 해? 괜히 차를 끌고 오는 바람에 난 겨우 소주 한 잔밖에 못 마셨어.”
“그럼 가죠, 뭐.”
“어디 좋은 데라도 가게?”
“예, 좋은 데로 가십시다.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 술집으로.”
그러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나는 조현민이다.
잔뜩 기대가 된다는 표정.
“거기가 어딘데?”
“어디긴 어딥니까. 아름다운 우리 형수님이 계시는 곳이지.”
“우리 호프집?”
조현민의 입가에 피어올랐던 미소가 금세 울상으로 변해 갔다.
“괜히 나 혼자서 흥분했네. 니미, 좋다 말았어.”
조현민은 자신의 아내가 운영하는 호프집으로 차를 몰고 가는 내내 투덜거렸다.
지태가 피식 웃다가 문득 생각난 듯 조현민을 돌아보았다.
“성원이도 부를까요? 그러고 보니까 그놈 얼굴을 본 지도 꽤 되었네.”
“이제는요, 뭐든 네 맘대로 하셔요. 부르든가, 말든가.”
조현민이 가락을 넣어 타령조로 읊조렸다.
지태는 피식 웃고는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강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지금 김아름과 데이트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왜 진즉에 전화를 하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지태에게 핀잔을 주었다.
쓰게 웃으며 전화를 끊은 지태가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왜? 십년지기한테도 보기 좋게 퇴짜를 맞고 나니까 내가 더 소중하게 보여?”
“그렇다고 해두죠, 뭐.”
지태가 피식 웃다가 다시 또 돌아보았다.
“이번엔 뭐?”
“그거 진행은 잘 돼가요?”
“어떤 거?”
“인도네시아 바이어하고 말입니다. 소형 진공청소기 건!”
“그거? 아주 잘 돼가고 있지. 흐흐.”
조현민은 뭔가 의미가 잔뜩 내포되어 있는 표정으로 바보처럼 웃어 댔다.
“자그마치 500만 불인데 잘 돼야지. 여하튼 크게 한 방 폼 나게 날려 보자, 이번엔!”
조현민이 호기롭게 웃었다.
너무도 기분 좋게 내뱉는 웃음이어서 지태는 입을 떡 벌린 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비슷한 분위기로 크게 따라 웃었다.
* * *
소셜 미디어의 힘은 대단했다.
대학 졸업자들이 젊은 세대라는 점에 주안점을 둔 한스무역 최초의 공채 광고가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은 거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조현민의 선택은 적중했다.
공채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조현민은 진취적이고 도전 정신이 강한 신입사원 영입을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공채의 시기가 대기업의 공채와 맞물려 있는 까닭에 이제 막 시작하는 작은 기업에 과연 몇 사람이나 지원을 할까 내심 초조했었다.
그래서 많은 번민 끝에 ‘한지태’라는 걸어 다니는 브랜드를 활용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아직도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필리핀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쳤던 돈키호테 한지태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니, 그들에게는 어쩌면 선망의 대상으로까지 자리한 지태였다.
이런 연유로 조현민은 신문 광고의 헤드라인 문구를 손수 작성해 광고기획사로 넘겼다.
[역대급 똘끼로 무장한 돈키호테, 한지태를 아십니까?]
그것이 제대로 먹혔다.
불굴의 의지와 벤처 정신이 뛰어난 한지태가 세운 회사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며 한스에 지원한 응시자들로 인해 중소기업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30:1의 놀라운 경쟁률을 보인 거다.
그것도 대기업의 공채와 맞물린 시기에 벌어진 일이라서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선발된 인원들의 첫 출근지는 새로 이전한 사무실이었다.
기존 한스무역이 자리한 빌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30층짜리 빌딩 중 15층 전관을 임대한 것이다.
최하 50평에서 최대 200평까지 네 개의 사무실이 마련된 곳이었다.
그곳에 한스무역과 한스홀딩스, 그리고 한스전자까지 차례로 입주를 마쳤으며, 나머지 200평짜리 공간에는 3사가 공동으로 사용할 대회의실 겸 다용도실로 만들었다.
명실 공히 한스가 훗날 그룹으로 도약할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발점이었다.
“햐, 이거 정말 가슴 설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서둘러 출근을 한 조현민이 지태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이른 아침 특별한 업무나 회의가 잡혀 있지 않은 이상 일반 샐러리맨들의 출근 시간으로는 꽤나 이르다 할 수 있는 오전 7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