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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18화 (118/272)

118화. 막연함이 현실로(4)

- 안하던 것까지 하는 걸 보니까 뭔가 많이 찔리긴 찔리는 모양이네.

“찔리긴, 누가! 그냥 정신없이 좀 바빴어. 그래서 지금 어딘데?”

- 아직 회사.

“회사?”

- 할 것, 그리고 배울 게 너무도 많아. 과외수업을 받을 때랑은 차원이 또 달라. 아주 죽겠어! 오늘 할당받은 거, 이제 막 실장님께 컨펌받고 퇴근하려던 참이야.

회사 일이라는 게 어느 것 하나 쉬울 턱이 있겠나.

더구나 부경이라는 거대 그룹의 브레인이나 다름없는 경영지원실.

모르긴 해도 그룹의 전반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데만 해도 족히 1년은 넘게 걸릴 것이다.

그나저나 이젠 자진 납세를 할 차례였다.

지태가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지금 볼까?”

- 그걸 말이라고 해!

괜히 당연한 걸 물어서 제 발등을 찧었다.

지은이 회사에서 저녁은 대충 때웠다고 하자 지태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볼 것을 제안했다.

한창 볼멘 지은을 달래주기엔 두 사람만의 공간만큼 좋은 곳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는데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수락했다.

근 한 달만의 만남이라서 그랬을까.

두 사람은 오피스텔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서 달려들기에 바빴다.

그렇게 하나가 된 몸은 상대를 탐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열정적이고도 격렬했던 시간이 끈적끈적하게 흘러갔다.

지은이 꽤나 만족스럽게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제 조금은 보상이 된 거 같아.”

“조금?”

“그래, 아주 조금이지. 그럼 한 달 넘도록 외롭게 놔둔 죄를 겨우 이거 한번으로 때울 생각이었던 거야?”

“오늘 내가 쌍코피 좀 터지겠군.”

지태가 똑바로 누운 채 피식 웃었다.

“요새 뭘 하고 다니는데 바쁜 척한 거야?”

“…척이라니!”

지은의 말에 지태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지은이 딴청을 피우자 지태는 곧바로 그녀의 가슴을 간지럼 태우듯 가볍게 꼬집었다.

“하지 마, 간지러워!”

까르르.

간드러지게 웃던 지은은 급기야 몸을 배배 꼬며 옆으로 몸을 웅크렸다.

지태는 왼팔을 뻗어 지은에게 팔베개를 해줬다.

다시금 편안한 자세가 되자 지태가 정색하며 그윽하게 말했다.

“신사업 하나를 추진 중이야.”

“신, 사, 업?”

또박또박 되묻는 지은을 향해 지태가 고개를 살짝 돌려 쳐다보았다.

그러곤 지은의 이마에 사랑스럽게 입을 맞춰준 뒤 그동안 성과를 냈던 부분들에 대해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물론 대외비적인 성격을 지닌 부분에 대해선 아무리 지은이라도 함구했다.

“와우! 그럼 이제 곧 중소기업을 넘어 중견기업으로 발돋움하겠네?”

“중견기업은 무슨…….”

“농담 아니야. 아무리 중소기업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로 뭉치면 상시 근무인원만 해도 최하 300명 이상은 될 거잖아. 자본금도 몇 백억 단위일 테고. 안 그래?”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중견기업의 기준점은 첫째, 자본금 80억 이상인데 자신이 투자할 금액만 해도 100억이다.

그 조건에 너무도 부합하는 것이니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둘째는 상시 근무인원인데, 수십 개의 업체를 합병하게 되면 지은의 말대로 중견기업의 조건과 기준이 되는 300명은 훌쩍 뛰어넘게 된다.

그렇게 3년의 유예기간을 거치면 비로소 중견기업으로 인정을 받는다.

지태가 피식 웃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중소기업이냐, 중견기업이냐 하는 것이 아니니까.

어렵게 뜻을 모은 업체 사장들을 하나로 단단하게 묶어서 어떡하면 내실 있는 기업으로 거듭나게 만드느냐 하는 게 우선이었다,

개성 강한 그들을 톱니바퀴가 물려 돌아가듯 조화와 조율을 이뤄내는 일도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지태 씨는 분명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 적어도 내 남자라면 이 정도의 능력은 있어야지.”

지은은 농담을 가장해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지태가 자신의 남자여서 자랑스럽다는 게 은근히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것을 듣고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을까.

지태가 흐뭇한 기분으로 팔을 말아서 접었다.

그러자 지은의 몸이 자신 쪽으로 더욱 가깝게 밀착이 되었다.

지태는 그런 지은을 꼭 껴안고 진하게 입을 맞췄다.

이제 바야흐로 2라운드를 뛰어야할 타이밍이었다.

* * *

지태는 오랜만에 전체 직원회의를 주관했다.

전 직원들에게 그동안 추진해왔던 신사업에 대해 공식적으로 선언을 하려는 것이다.

오늘 전체회의를 소집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조현민과 윤민수 부장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궁금증 가득한 시선으로 지태를 바라보았다.

“오늘 제가 회의를 주관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여러분들 중에 몇 분은 이미 아시겠지만, 얼마 전부터 추진해 오던 신사업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 것은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신사업 건에 대해 먼저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지태는 일단 운을 뗀 다음 직원들을 한 명씩 차례로 훑어가며 일일이 눈을 맞췄다.

시선이 박수연에게서 끝나자 지태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살짝 띠었다.

“이게 기쁜 소식인지, 아니면 여러분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업무의 부담감을 안겨 주는 독이 될지 잘 모르겠네요.”

지태의 표정과 말투를 보면 나쁜 일인 것 같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직원들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한 차례 지나간 후 지태는 천천히 그동안의 신사업 전개 과정과 가시적 성과를 낸 부분들을 설명해주었다.

“……따라서 성공적으로 이번 프로젝트가 완성되고 새로운 회사로 거듭나게 되면 우리는 자체 브랜드와 더불어 자체 제조물품들을 생산하는 라인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한스무역은 우리 제품 위주로 판로개척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죠? 언제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직원들 사이에서 환한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태는 환호성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다음으로 말씀드릴 건 신입사원의 충원 문젭니다. 말하자면 우리 한스무역의 첫 공채!”

순간 조현민이 깜짝 놀라 지태를 쳐다보았다.

신입사원 공채 부분에 대해서는 사전에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내심 서운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끝까지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침묵하며 지켜보았다.

“신생 회사인 한스홀딩스는 한스전자를 관리하는 사업지주회사 성격이 강합니다. 따라서 전반적인 관리 업무를 맡을 인원이 절실한 실정입니다. 물론 통합을 완료하고 나면 기존의 업체에서 필요 인원을 차출해 당장은 관리 주체로 내세울 생각입니다만,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가려면 지금부터라도 전문 인력들을 배출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그들을 진두지휘할 리더도 필요할 테고. 에, 그런 차원에서…….”

지태는 잠시 말을 끊었다.

자연스럽게 어떤 긴장감이 형성됐다.

그 흐름을 타면서 지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느닷없고 죄송스럽지만, 낙하산 인사를 한 명 영입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신생 홀딩스의 부사장을 맡기려고 합니다.”

순간 모두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 갔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는 눈빛이었다.

물론 그중 가장 변화가 심한 것은 조현민이었다.

급기야 조현민의 불같은 성격이 튀어나왔다.

“대표님! 낙하산이라니, 그 무슨 봉창 두드리는 말씀입니까?”

비록 존대는 하고 있었지만, 평소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박수연이 깜짝 놀라 힐끗 돌아볼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곧 쓰게 웃는 것으로 지태의 입술에 다시 집중했다.

“만약에 우리 둘만 있는 자리였다면 제 뒤통수라도 한 대 날릴 기세네요, 전무님.”

지태가 농을 내뱉자 조현민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실언을 했습니다.”

조현민이 얼른 사과를 해오긴 했지만, 불만스러움은 여전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제 물음에 어서 답을 달라는 눈빛으로 지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태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 유성락 회장님께 떼를 좀 썼습니다. 신생 회사의 틀을 보다 빠른 시간 안에 바로 세워줄 인물을 한 명 추천해 달라고 말입니다.”

“……!”

“농담으로 낙하산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사실 어렵게 모시는 분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미그룹 법무팀의 2인자로 근무하다가 유 회장님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힘들게 결심을 굳힌 유기영 변호사입니다.”

“일미그룹 법무팀의 2인자라면 직위가 최하 전무급일 텐데 그걸 박차고 나와 우리 쪽으로 온단 말입니까?”

조현민이 입을 떡 벌리고는 놀라워했다.

“유성락 회장님의 권유와 간곡한 부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한 달 전에 그런 언질을 미리 받긴 했지만, 반신반의한 면이 없지 않아서 이제야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 이거 참!”

조현민은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연신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태는 거기에 대고 유기영 변호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며 우리에게 왜 꼭 필요한지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유 변호사는 조세 전문갑니다. 또한 M&A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유 변호사가 우리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일시에 충족시켜줄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될 거라고 자신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그제야 조현민이 박수를 쳐댔다.

의례적으로 그냥 한번 쳐주는 박수가 아니었다.

짐짓 고개까지 끄덕이며 얼굴 가득 만족스러움을 띠운, 그야말로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온 몸짓이었다.

그 뒤로 전 직원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태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그것은 비록 유성락 부회장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여하튼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이기도 한 것이니까.

“이번 신입 공채는 한스무역과 신생회사인 한스홀딩스를 합쳐 총 30명 규모로 선발할 예정입니다. 그중 10명은 신생 회사의 관리 파트 인원이 될 겁니다. 그리고 이번 공채 역시 조 전무님께서 주관하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지난번 윤민수 부장을 비롯한 경력사원을 충원할 때와 마찬가지로 조현민에게 전권을 넘기겠다는 선언이었다.

지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흐뭇한 마음으로 전체 직원회의를 마쳤다.

모두가 돌려놓았던 의자를 제자리로 돌리며 업무에 복귀하는 사이 지태는 조현민과 윤민수 부장을 따로 불렀다.

“전무님과 부장님은 저하고 좀 더 미팅을 가지셔야겠습니다.”

지태가 씩 웃으며 대표집무실을 가리켰다.

* * *

부경물산 대표실이다.

재무이사로부터 보고를 받는 임경남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말씀드렸다시피 2/4분기 이후부터 우리 부경물산의 손실 금액이 더욱 커졌습니다, 사장님.”

이제 더는 손쓸 방법이 없다는 듯 재무이사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은 말이 좀 더 남아있지만, 그걸 차마 다 털어놓을 수가 없다는 눈빛이기도 했다.

하지만 임경남은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있는 터라 그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래서 총 얼마라고?”

아무리 보아도 자신보다 20년 이상은 나이차가 나는 재무이사에게 그는 반말을 툭툭 내던졌다.

평소라면 존대와 하대를 적당히 섞어 버무렸겠지만 심기가 불편한 오늘은 그마저도 생략해 버렸다.

“지난번 골드웰과 선우글로벌 측에 조건 없이 손해를 보전해준 것까지 합하면 총 180억 원가량 됩니다.”

“시발,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예?”

엉겁결에 혼잣말처럼 욕설을 뱉어내니 재무 이사가 흘깃 돌아보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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