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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117화 (117/272)

117화. 막연함이 현실로(3)

액정을 내려다보니 이돈두였다.

“어, 이 회장 어쩐 일이야?”

지태는 이동구 사장을 의식해 이돈두를 회장으로 호칭했다.

- 궁금해서 전화를 해봤지. 그동안 얼마나 바빴기에 전화 한 통이 없냐?

“진짜로 많이 바빴어. 지금도 중요한 미팅 중이고. 근데, 왜?”

- 왜는 왜야? 말 나온 김에 오늘 얼굴이나 좀 봤으면 하는 얘기지.

“오늘?”

지태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벌어볼 요량으로 되묻고는 저녁 스케줄을 떠올려 봤다.

딱히 선약이 잡히거나 급하게 처리할 업무는 없었다.

“그래. 퇴근 후에 보는 걸로.”

지태는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그런 지태를 이동구 사장이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 사장님?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요즘 새삼스럽게 한 사장이 달라 보여서. 아, 물론 얼마 전부터 그런 생각이 부쩍 들긴 했지만 요즘엔 더더욱 그런 거 같아서.”

“뭐가요?”

“예전 선우글로벌에 있을 땐 몰랐는데 자네의 대인관계 폭이 말이야. 유성락 회장님 같은 거물과 교분이 두텁질 않나, 방금 전에도 봐. 누군지는 몰라도 회장이라고 불리는 사람과 허물없이 지낼 정도로 막역해 보이질 않던가.”

그러자 속은 있어서 피식 웃고 마는 지태였다.

* * *

“표성철인지 뭔지 하는 놈 잡아 주니까 그걸로 땡이야? 전화로 잠깐 고맙다는 인사만 하면 끝이냐고!”

약속 장소인 일식집 별실에 자리를 잡자마자 이돈두가 핀잔을 던져 왔다.

나름 오랜만의 만남이 반갑다는 이돈두 식의 인사였다.

“거, 더럽게 생색내네. 그래서 내가 애들 국수 사먹였잖아.”

더욱 뻔뻔하게 들이대는 것으로 맞장구를 쳐준 지태가 목이 마른 듯 앞에 놓인 냉수를 들어 벌컥 마셨다.

밉지 않게 눈을 흘기던 이돈두가 문득 그윽한 시선으로 지태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어째 많이 상한 거 같다. 얼마나 많이 바빠서 그래?”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너무 바빠!”

“뭐 어려운 건 없고? 내가 뭐 도와줄 일 같은 건 없어?”

“그런 거 아냐. 내가 요새 신사업을 하나 추진하고 있는데 여러 모로 신경 쓸 게 많아서…….”

“신사업?”

“그런 게 있어.”

지태가 무 자르듯 싹둑 말을 끊는 투로 대답을 주자 이돈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너 지금 나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거냐? 뭔 말을 하다가 말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지태가 얼른 변명으로 다독이려다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떫게 입맛부터 다셨다.

“규모가 작은 업체들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어. 그들을 모아서 하나의 경쟁력 있는 브랜드 기업체로 거듭나게 하려고.”

“개나 소나 작은 조직들을 한데 묶어서 전국구 조직과 맞서려 한다! 뭐 그런 의미야?”

이돈두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지태의 설명을 해석하려고 했다.

지극히 이돈두다운 비유였지만, 그 뜻은 현재 자신이 추구하는 프로젝트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지태는 미소로 끄덕였다.

“뭐 그런 비슷한 거야. 힘없는 사람들이 독고다이로 거대 조직과 맞붙는 것보다 여럿이 하나로 뭉쳐 싸우고자 하는 일종의 몸부림이랄까?”

이돈두의 방식과 표현을 차용해 비슷한 비유로써 지태는 맞장구를 쳐줬다.

그러니까 더욱 쉽게 알아듣는 눈치였다.

지태가 좀 더 덧붙였다.

“그래서 조직을 하나 만들려고. 사방에 흩어져있는 독고다이들을 한 곳에 모아 조금은 규모가 있는 조직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거다.”

“조직이라면, 회사 같은 걸 따로 하나 더 차린다는 거냐?”

어쭈?

이돈두의 말귀 알아듣는 실력도 이쯤 되면 꽤나 인정을 해줘야겠다.

지태가 털털하게 웃었다.

“그 정도 눈치면 적어도 어디 가서 밥은 안 굶겠다.”

“내가 가방끈이 짧아서 그렇지 머리는 좋은 사람이야, 인마! 이거 왜 이래.”

이돈두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괜히 목 근육을 풀 듯 고개를 좌우로 두어 번 꺾었다.

“너 머리 나쁠 거라는 소리는 언급도 안했다. 괜히 제풀에 찔려선!”

“찔리기는 니미!”

이돈두가 피식 웃고는 은근슬쩍 물었다.

“야, 근데 회사 차리려면 오까네가 많이 필요하겠네?”

“당연히 많이 들어가지. 왜, 투자 한번 해보게?”

“망할 염려는 없어? 전망이 좋긴 하고?”

“망하다니, 이 친구야! 비전이 없다면 수십 명씩이나 되는 사장님들이 자기 회사를 선뜻 내놓으면서 투자한다고 하겠냐?”

하긴 맞는 말이긴 하다.

이돈두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허공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픽 웃었다.

“그거 조금만 더 설명해봐라.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진행한다는 건데?”

이돈두가 정색하고 물어보는 터라 좀 더 이야기보따리를 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지태는 지금까지 진행된 것들을 토대로 간략하게나마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방식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하나로 모은 업체들을 그 홀딩스라는 데에서 전부 관리한다는 거네?”

“말하자면 지주회사니까.”

“아, 난 그런 복잡한 단어 같은 건 잘 모르겠고. 여하튼 어떠냐, 나도 거기에 좀 보탤까? 내 피 같은 돈을 설마 다 까먹지는 않겠지?”

“그런 새가슴이라면 그냥 처음부터 투자하지 마. 돈 몇 푼 투자해놓고 날마다 가슴 졸여서 어떻게 살래?”

지태가 놀리듯 짓궂게 웃자 이돈두가 머쓱한 기분에 괜히 제 뺨을 긁었다.

그러다가 곧 진지한 모습으로 정색했다.

“비웃지 마라. 저번에 내가 그랬지? 그거 농담 아니다. 지금은 비록 음지에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양지를 지향하겠다는 그 말! 내 최종적인 목표는 나는 물론이고 우리 애들 모두가 건달 티를 벗고 양지에서 떳떳하게 명함 박고 사는 거니까. 그래서 하는 소리다. 이건 내 개인적인 욕심이 아냐.”

너무도 진지하게 나오니 지태가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었다.

“좋아. 진심을 다해서 네 심정을 말해줬으니까 나도 진지하게 대답할게. 믿어, 그냥 아무 생각 말고 나만 믿어! 나 정말 잘할 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자신이 없었다면 시작도 안했어.”

지태가 단단한 결의를 새긴 시선으로 이돈두를 바라보았다.

“……!”

한동안 눈싸움을 하듯 마주 쳐다보던 이돈두가 마침내 그윽하게 웃었다.

지태의 눈빛에서 강렬한 결의와 자신감을 읽은 것 같다.

“참, 그때 이후로 그 새끼들 움직임은 없었냐?”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돈두가 물었다.

앞뒤 자르고 묻는 것이라서 지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이돈두가 쓰게 웃었다.

“타워파 애새끼들 말이야.”

그제야 지태 역시 쓰게 웃었다.

“나름 정예라는 것들을 보냈다가 그렇게 개피를 보고 갔는데 섣불리 또 덤비겠어. 네 말대로 대호건설 그놈한테 엄청 깨졌겠지. 나 같은 민간인 하나 때려눕히지도 못하는 것들이 무슨 건달이냐고 말이다.”

“하긴 그러네.”

이돈두가 냉소인지 자괴감인지 모를 표정으로 웃었다.

언젠가 지태를 치려고 애들을 보냈다가 보기 좋게 깨지고 돌아온 뒤 자신이 이현욱에게 그런 식으로 당했던 것이 떠오른 거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웃고 있던 표정이 곧 이를 악무는 형태로 점차 변해갔다.

“암튼 조심해. 참, 그럴 게 아니라 우리 애들 몇 명 붙여 줄까, 보디가드로?”

“말은 고마운데, 너도 알잖아! 내 한 몸 정도는 나도 지킬 수 있어.”

듣고 보니 그렇다.

다시금 이돈두의 입에서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양재동 아지트에서 회합을 갖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해가 바뀌고 정초(正初)부터 불어 닥친 구조조정에 매진하다 보니 다들 시간이 없었다.

오늘 한자리에 모인 것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 회포를 풀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스폰서를 해주는 연예기획사 대표로부터 최근에 영입한 뉴 페이스들을 인사시키겠다고 연락이 온 거다.

저녁 9시가 다가오자 멤버들이 슬슬 도착하더니 임경남을 끝으로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지금 당장 양재동으로 넘어오겠다는 기획사 대표에게는 밤이 조금 더 깊어지거든 넘어오라고 통고를 해뒀다.

오랜만의 회동이니 외부로 새어나가선 안 될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우선 좀 나누기 위함이었다.

“자칭 국내 최고의 주먹이라는 새끼들로도 안 먹히니 이젠 어디 국제적인 킬러라도 불러야 하나? 젠장!”

이현욱이 문득 마시던 술잔을 쾅 내려놓으며 이빨 사이로 내뱉었다.

상석에 앉은 임경남이 흘깃 돌아보았지만,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화가 치밀었는지 잘 아는 까닭이다.

“그 새끼 정체가 도대체 뭐냐? 원래 조폭 출신이냐?”

이현욱이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허영만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예전에 그가 부리던 직원이었으니 지태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 밑에 있을 땐 그 새끼가 그렇게 센 놈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때야 밥만 주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개돼지인 줄 알았지, 뭐.”

허영만이 자조 섞인 웃음을 내뱉다가 퇴사를 결심하고 찾아왔던 지태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자 그 웃음기가 퍼뜩 사라졌다.

“시발 놈!”

은연중에 욕설을 내뱉자 모두가 돌아보았다.

“아! 그 새끼 퇴사할 때가 떠올라서.”

허영만은 얼른 변명을 늘어놓고는 쓰게 웃었다.

“후우.”

못 마땅하게 바라보던 임경남이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더 물품으로 장난질 쳤던 일도 무위로 돌아가고, 건달들을 시켜 피습했던 일마저 결국은 맥 빠지는 결과만 가져왔다.

오히려 지태에게 경각심만 불러일으키게 만든 꼴이 되었으니 심기가 좋을 리 없었다.

뭔가 확실한 방책이 필요한 시점.

단 한 번만으로도 절대 회복하지 못할 타격을 안겨 놈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놈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며 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오줌을 질질 싸게 만들어놓아야 그나마 머리꼭대기까지 차오른 분노가 조금은 풀릴 것 같았다.

‘시발!’

그때였다.

안 그래도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환장할 노릇인데 이현욱이 은근한 목소리로 거기에 기름까지 끼얹었다.

“참, 경남아! 너네 부경그룹 요즘 좀 재밌게 돌아가더라?”

“뭐가?”

“지은이 말이야. 드디어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며?”

순간 임경남의 인상이 표가 나게 구겨졌다.

“그럼 언제까지 우리 지은이가 백수 이사로 남아있을 줄 알았냐! 걔도 밥값은 해야지.”

속은 뒤집어지지만 임경남은 속내와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자신이 그토록 경계하고 원치 않았던 최악의 상황이 끝내 벌어지고야 만 것이지만.

‘시발, 우리 꼰대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

임경남은 그룹 경영에 지은을 불러들인 임상만 회장에게 속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야! 다들 시끄럽고. 얼음이나 좀 꺼내놔 봐.”

맨 정신으로는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다.

약 기운이라도 빌려서 지금의 더러운 기분을 치유하고 싶었다.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골드웰의 송영완이 소파 등받이에 벗어놓은 자신의 슈트에서 작은 비닐봉지를 꺼내 임경남에게 쓰윽 내밀었다.

* * *

그동안 미루어 놨던 약속들을 오늘 한꺼번에 다 모아놓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이니 자리를 옮겨 술 한 잔을 더하자는 이돈두를 겨우 뿌리치고 일식집을 나온 것이 밤 9시 무렵이었다.

띠리리링.

곧바로 귀가하려던 찰나 지태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지은이였다.

지태는 떫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지은이의 얼굴을 본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아무래도 전화를 받는 순간 그녀의 따가운 속사포가 쏟아질 게 틀림없다.

지태는 지은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미리 희석시킬 요량으로 내키지 않는 애교의 목소리를 내었다.

“응, 애기야!”

- …….

순간 스마트폰 너머는 쥐를 잡아먹은 듯 고요했다.

“애, 애기… 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에게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나오질 않으니 머쓱해질 수밖에.

지태는 헛기침으로 목청을 다듬고는 본래의 목소리로 돌아갔다.

“안 먹히네.”

그리곤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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