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막연함이 현실로(2)
시선을 느낀 지태가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자 그는 질문에 앞서 소주병을 집어 들고 손을 뻗어 왔다.
지태가 얼른 두 손으로 빈 잔을 내밀자 그는 소주를 7부 정도 따라 주고는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지태가 예의상 입술을 적신 다음 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말이오. 여기 이동구 사장한테 두어 번에 거쳐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워낙 두서없이 내뱉는 통에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아서 말이지.”
그는 옆자리의 이동구 사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야기의 행간을 살펴보니 지태가 구상 중인 동종 업체들 간 길드화 사업을 말하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릴 그렇게 해. 그 정도로 이야기를 했으면 처마 밑에서 졸던 닭대가리라도 다 알아듣겠다.”
이동구 사장이 염치없다는 듯 괜히 쏘아붙였다.
“그래, 잘 알겠으니까 자넨 일단 조용히 해봐. 난 자네 말고 이 젊은 사장한테 물어볼 게 있으니까.”
“예, 말씀드리죠, 사장님.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 이렇습니다. 여기 가느다란 회초리 하나가 있다고 치죠. 그 하나는 약합니다. 어린아이의 손에도 쉽게 부러질 정도로 말입니다. 근데 그것이 열 개, 스무 개로 뭉쳐 있다면 어떨까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명제의 예로써 가장 흔하게 써먹는 방법이었다.
“그럼 그렇게 뭉쳐서 누구와 대립하겠다는 거요?”
“대립하자는 게 아닙니다. 상생하자는 거지요. 적어도 힘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비굴하지는 말자 하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상생하자는 대상이 대기업이나 재벌들을 말하는 거요?”
“그러면 왜 안 되는지 오히려 제가 되묻고 싶습니다만.”
“허!”
머리숱이 적은 사장은 급기야 혀를 차고 말았다.
너무 황당무계하다고 여긴 탓일까.
그는 고개까지 절레절레 내저으며 쓴맛을 다셨다.
“한번 시도조차 해보지도 않고 되네, 안 되네 자포자기하고 말 건가? 우리라고 언제까지 그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살자는 게야?”
보다 못한 이동구 사장이 핀잔을 늘어놓았다.
이제 좌중은 조용해졌다.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 지 오래였다.
개중엔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부정적인 시각에 비웃음을 띤 사람도 보였다.
지태가 이동구 사장의 말끝에 덧붙였다.
“낱낱개의 조그마한 몸뚱이로 넓은 바다를 헤쳐 나가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로 뭉쳐 몸집을 키운 다음 물결을 헤쳐 나간다면 한결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저쪽 편에서 지태의 제안에 관심을 두고 있던 어떤 사장이 물어왔다.
대부분 50대 이상 중년들의 틈바구니에서 비교적 젊은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
얼핏 40대 초중반 정도 될까.
“그니까 구체적으로 어쩌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뭉쳐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를 알려줘야 우리가 뭔가 감을 잡더라도 잡지 않겠어요.”
“무조건 뭉치자는 게 아닙니다. 업종별로 작은 덩어리를 한데 묶을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공동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울 예정이고요. 다만 그러기 위해선 결과적으로 업종 간 합병이 선행되어야 할 테지요.”
그러자 듣고 있던 사장들 사이에서 기가 막힌다는 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합병?”
“거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원, 살다 살다 별 괴상망측한 소리를 다 듣는구먼.”
그들 대부분은 아까부터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비웃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던 측에선 눈빛이 더욱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직 막연한 점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한 눈빛들이었다.
“이봐요, 젊은 사장!”
아까부터 지태의 말에 계속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 중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사장이었다.
뭉툭한 딸기코에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는 6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게 말이오, 방구요? 누가 평생을 바친 제 사업을 송두리째 갖다 바친단 말이야. 현실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뜬구름 잡기 식의 구상에 누가 동조를 하겠느냐, 이 말이야. 다들 안 그래?”
그는 동조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와 생각의 궤를 같이 하던 몇 사람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지태가 속으로 쓰게 웃고는 부정적 측면의 사장들을 휘 둘러보았다.
“저의 제안이 싫으시면 굳이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보다 좀 더 인간답게 살고 싶고 보람을 느끼면서 기업을 일으키고 싶으신 분들만 뜻을 모아 주시는 게 저로서도 바라는 점이니까요.”
“젊은 사람이라 아직 세상 돌아가는 걸 몰라요. 막연하게 뜬구름 잡는 것하고 현실세계는 차원이 달라요, 이 친구야.”
다시 딸기코에 광대뼈가 도드라진 사장의 비웃음이다.
바로 그때였다.
그들의 뒤편에서 돌연 생소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젊은 사장이 제안한 사업 말입니다!”
그러자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몰려갔다.
시선을 받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곧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것에 이 사람이 보증을 선다면 어떻겠습니까?”
자리에 모인 사장들의 두 눈이 점차 어떤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혹시 저기 저분,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양반이신가?”
놀란 눈빛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말문을 뗀 것은 이동구 사장이었다.
누구를 콕 집어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절로 감탄에 겨워 내뱉은 소리였다.
지태가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일찍 나선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차가 좀 막혀서 말이야.”
사람 좋은 얼굴로 악수를 청하는 그 사람은 바로 유성락 부회장이었다.
지태가 유성락 부회장을 맞이하는 사이, 뒤에서는 이런저런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대개가 ‘세상에!’ ‘저 유명한 양반이 이 젊은 사장을 보러 온 거야?’ 등등의 감탄 섞인 목소리였다.
유성락 부회장은 곧 맞잡은 지태의 손을 떼어 내고는 여러 사장들을 향해 몸을 틀었다.
“안녕하십니까, 유성락입니다. 불청객이라고 박대하시진 않겠지요?”
“박대라니, 그 무슨 당치 않으신 말씀을. 자, 이리 앉으시지요, 회장님.”
이동구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빈자리 한곳을 권했다.
“참, 말을 하다 말았는데… 조금 전 이 사람이 했던 말은 진심입니다. 나 유성락이라는 이름을 걸고 이 젊은 사장의 플랜을 적극 지지하면서 또한 여러분들이 소신껏 안심하고 참여를 해도 무방할 거라는 점을 내가 보장한다는 이야깁니다.”
“그 말씀은…?”
딸기코에 광대뼈가 도드라진 사장이었다.
유성락 부회장이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 젊은 한 사장이 그 엉뚱한 플랜을 들고 나를 찾아왔을 때 ‘이거 물건이다!’라는 느낌이 확 왔어요. 그래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줬습니다. 아니, 내가 20년만 젊었더라도 그 아이템을 몰래 훔쳐 버리고 싶을 만큼 꽤나 진취적인 도전이라고 봤어요. 이만하면 적절한 대답이 됐는지 모르겠군요.”
밑바닥에서 시작해 대 일미그룹의 부회장까지 오른 재계의 입지전적인 사람의 말이었다.
그가 보증하고 장담한다는데 어찌 신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회장님께선 이 젊은 사장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또 다시 광대뼈가 도드라진 사장의 물음이었다.
“내가 모시는 상사이십니다.”
“예?”
그가 놀라서 되묻는 표정을 짓자 유성락 부회장은 호탕하게 웃었다.
“농담입니다.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어서……. 실은 이 친구가 경영하는 한스무역의 비상임 고문역입니다. 비록 월급 한 푼 못 받는 명예직에 불과하지만…….”
그 후로 뒤늦게 나타난 사장들까지 모두 합류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송년회 자리가 시작되었다.
유성락 부회장의 깜짝 방문으로 인해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으며, 지태가 내민 제안은 부정적 시선을 보내던 사장들까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했다.
* * *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했다.
정초부터 지태는 바빴다.
이동구 사장이 하루걸러 한 명씩 대동하고 오는 업체 사장들과의 만남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특별히 뜻하지 않은 약속이 잡혀있을 땐 조현민을 대신 그 자리에 내보냈지만, 대부분은 지태가 그들을 직접 만나 앞으로 전개될 사업에 대해 좀 더 성실하고도 디테일하게 설명해주었다.
바삐 한 달이 흘렀을 즈음엔 합류하기로 결심을 굳힌 사장들의 숫자가 열 손가락을 넘어섰다.
“이 정도면 이제 그만 실무 절차에 들어가도 되지 않겠어?”
지태는 오늘도 미팅을 요청한 이동구 사장과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만나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동구 사장이 들고 온 문서더미가 놓여있었는데, 사업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온 사장들의 동의 서명이었다.
“예. 사장님의 말씀대로 우선 착수에 들어가고 기초적인 틀을 갖추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전에 먼저 장치를 하나 만들어두는 게 중요하겠지요. 여러 업체들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어 관리할…….”
“장치라니?”
“홀딩스(holdings) 말입니다!”
“홀딩스? 지주회사 같은 걸 말하는 건가?”
“기왕 뭉치게 된다면 이제는 하나의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전처럼 중구난방으로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지태의 부연 설명에 이동구 사장은 한참만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일리 있는 말인 것이다.
“하긴 지분 문제도 있고 하니 전체의 중심을 잡아서 이끌어줄 구심점이 필요하겠지. 그럼 홀딩스에서 통합업체를 관리하게 되는 건가?”
“예. 홀딩스가 경영 전반에까지 적절히 조율해 나갈 겁니다.”
“가장 민감한 부분이 지분 문제일 텐데, 그건 어떻게…?”
“맞습니다. 가장 중요하죠. 각 사업장마다 그 가치와 규모가 다르니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최대한 정확한 가치판단을 구할 생각입니다. 그것을 근거로 합리적이고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결론을 도출해낼 거고요, 사장님!”
“음. 한 사장이 오죽 잘 알아서 하겠는가. 난 그저 자네만 믿고 맡기려네.”
이동구 사장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는 무슨! 이제 내 보스가 될 사람인데 안 믿으면 어쩔 거야.”
이동구 사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윽한 미소로 바라보던 지태가 그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참, 일단 지주회사를 만들게 되면 100억 정도 선에서 신규투자를 유치할 생각입니다.”
“100억씩이나? 그 정도 액수를 투자할 만큼 우리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나?”
“예. 외국에 있는 친군데 저를 믿고 여기에 투자를 하고 싶다는 군요.”
말을 마친 지태가 속으로 픽 웃었다.
사실은 외부의 누군가가 투자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그 자신이 셀프 투자를 하려는 것.
그동안 목숨 걸고 벌어들였던 돈들은 외국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 명의로 스위스 계좌에 묶어 놓았다.
그것을 국내에 투자 형식으로 들여올 생각이었다.
이번 신사업의 프로젝트는 그 자신이 주체가 되어 좀 더 멀리 내다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프로젝트에 동조, 참여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사장들도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
그래서 동조하겠다고 서명을 하는 순간 지태가 경영의 총책임자가 되어 자신들을 이끌어 주리라는 것을 은연중 확인했다고 보면 되었다.
“햐, 이거 왠지 벌써부터 설레는데? 시작부터 자본금이 최하 못 돼도 3~4백억이 넘는 기업이라니…….”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우린 벌써 반을 이룬 겁니다. 나머지 반을 채워 우리의 꿈을 이루는 것은 이제 다들 얼마나 노력을 아끼지 않느냐 하는 것에 달렸고요.”
“다들 죽기 살기로 뛸 거야. 그동안 대기업들 틈바구니에서 아등바등 살아 왔는데 이제 대등하게 나아가겠다는 거 아닌가. 모르긴 해도 그 시너지 효과란 게 엄청날 걸세.”
“당연히 그래야죠. 그나저나 저를 믿고 따라 주셔서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사장님.”
“에이, 어딜! 이게 어디 자네 혼자 좋으라고 그러는 건가. 다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일이지.”
이동구 사장의 말에 지태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나름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내보이는 의지의 소산물.
바로 그때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지태의 스마트폰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