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더 멀리 내다본다(2)
“이동구 사장님께선 경인지역 중소가전업체연합의 회장님이시죠?”
지태의 물음에 이동구 사장은 약간 삐딱하게 되물었다.
“그건 왜?”
“회원 분들과 언제 자리 한번 만들어 주십사 하고요. 제가 그 분들께 인사 좀 여쭙게요.”
“인사? 핑계도 여러 가지로군. 이젠 눈치도 안 보고 아예 노골적으로 나오시는구먼!”
“눈치 본다고 그다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은데요, 뭘. 어차피 제 부탁을 들어주실 거잖습니까.”
“허, 이 친구 정말 못 말릴 친구로구먼.”
이동구 사장은 혀를 차는 시늉을 했다.
그 표정을 보니 이미 반절 이상은 수락한 것 같았다.
곧 이어진 그의 털털한 웃음소리가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밝은 목소리로 이동구 사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제 소형가전업계 사장들과의 친선모임이 있었다고 했다.
정기총회 같은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었고 그저 몇몇 친한 사장들끼리 모여 저녁식사나 함께하는 자리였다고 부연 설명을 해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태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소리 없이 그려졌다.
통화 도중 이동구 사장의 웃음 속에서 뭔가 자신이 현재 간절히 바라고 있는 그 대답이 흘러나올 것 같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사장님.”
- 그리 들렸나? 그렇담 그런 거지, 뭐.
“뭐가 그리 좋으신 건데요?”
지태는 자신의 속내를 꾹꾹 숨긴 채 능청스럽게 물었다.
- 내가 자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 자리에 모인 사장들한테 슬쩍 흘려 봤어.
“동종 업체들끼리의 길드화 사업 건 말입니까?”
- 그래. 내가 마음먹고 역설했지. 우리끼리 단합해서 나름의 힘을 기르자고 말이야. 허구한 날 대기업들의 갑질에 눈물로 한세월을 다 보낼 것이냐고. 우리도 하나로 뭉쳐서 을들의 반란을 한번 꾀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말이지.
“다들 비웃었겠군요.”
- 맞아. 처음엔 비웃더군. 다들 내 말이 농담인 줄 알았던지 대뜸 콧방귀부터 뀌면서 그러더구먼. 그게 무슨 자다 봉창 두들기는 소리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냐고!
“…….”
- 그래서 내가 다시 한번 농담이 아니라는 걸 주지시켜줬고, 진지하게 비전을 제시했어. 물론 유근영 사장이 옆에서 살짝 거들기도 했고.
이동구 사장은 이제 웃음기를 쏙 뺀 목소리였다.
나름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랬더니 반응을 보이던가요?”
- 참석자 열아홉 명 중에서 서넛이 내 말에 동조를 하는 눈치였어. 그 나머지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만 말이야. 근데 개중 몇몇은 좀 더 설득을 하면 넘어올 것도 같아. 나야 워낙 말주변이 없잖은가.
“그전에 하나 묻겠습니다. 그럼 사장님께서는 제 말에 동조하시는 겁니까?”
- 새삼스럽게 뭘 물어? 이쯤 되면 나도 자네 꾐에 넘어갔다는 것쯤은 냉큼 알아먹어야지.
“꾐이라뇨. 이게 어디 저만 좋으라고 추진하는 일입니까? 서로 윈윈하자는 거지요.”
- 엎치나 메치나! 여하튼 다음 달 초에 우리 협회의 정기총회가 있는데 그때 꼭 참석하게. 그때 와서 천지전자의 새 대표이사로서 취임인사도 드리고, 자네가 직접 그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줘봐.
“고맙습니다, 사장님. 만사 다 제쳐 두고라도 꼭 참석하겠습니다.”
지태는 흐뭇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기분 좋은 소식은 함께 나눠야 제 맛이다.
그렇다고 조현민을 대표실로 부른다는 건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대표실을 나가 그와 차라도 한잔하면서 기쁨을 함께 하려는 순간이었다.
노크 소리와 더불어 곧 문이 열렸다.
“어! 그러잖아도 밖으로 나가려던 참인데…….”
지태는 밝게 웃는 낯으로 이제 막 들어서던 조현민을 맞았다.
그런데 조현민의 표정이 매우 무거웠다.
뒤따라 들어온 윤민수 부장의 표정도 조현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슨…일 있어요?”
“잠깐 보고할 게 있습니다, 대표님.”
아무리 윤민수 부장을 의식해 존대를 한다고 해도 지나치게 무게를 잡는 조현민의 행동이 너무도 생소했다.
지태는 두 사람에게 대표실의 소파를 가리켰다.
“일단 앉으시죠.”
두 사람이 자리를 잡는 것을 보면서 지태도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요?”
앉기가 무섭게 이유를 묻자 조현민 대신 윤민수 부장이 나섰다.
“생각지 못한 일이 터졌습니다, 대표님.”
“무슨 일인데요?”
“저번에 우리가 베트남으로 보낸 비디오폰 있잖습니까.”
“예!”
“조금 전 그쪽 바이어가 클레임을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보낸 물건들이 전량 다 불량이라고 합니다.”
“예, 그게 무슨?”
지태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윤민수 부장과 조현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게 참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분명 김태민 대리가 꼼꼼히 검수까지 다 마치고 보낸 물건인데…….”
조현민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도리질을 해댔다.
“홈 CCTV는요?”
비디오폰 1만 대와 함께 가정용 CCTV도 5천 대를 보냈었다.
“그건 다행히 이상이 없답니다.”
“근데 왜 홈 비디오폰만…? 콤콤에는 연락해 봤어요?”
콤콤은 비디오폰과 CCTV등을 주력으로 생산하는 업체였다.
이번에는 윤민수 부장이 대답했다.
“그쪽에서도 황당하다는 반응입니다. 김태민 대리가 검수를 끝내자마자 그 친구가 지켜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제품포장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곤 자기네 회사 트럭으로 곧장 포워딩 업체로 넘겼는데 어떻게 전량 다 불량이 날 수가 있느냐고 오히려 되묻더군요.”
지태가 심각한 표정으로 낮은 신음성을 흘렸다.
베트남 바이어가 괜히 생트집을 잡았을 리는 없다.
레뚜언은 조현민과 오랜 교분을 맺어온 바이어였다.
지난번 LED전광판의 오더를 준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레뚜언이 만일 트집을 잡고 골탕을 먹일 작정을 했다면 홈 CCTV까지 불량이라며 클레임을 걸어와야 마땅했다.
그렇다면 이 사태의 원인은 국내에 있는 게 분명하다.
“김태민 대리가 검수를 완벽하게 했고, 포장이 되는 과정까지 꼼꼼히 지켜봤다고 했죠?”
“김 대리가 어지간히 성격 깐깐하다는 건 대표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그렇게 포장된 물품을 콤콤 본사에서 직접 포워딩 업체까지 실어 보냈다. 그럼 거기겠네, 포워딩 업체!”
지태가 정답은 이미 나왔다는 듯 눈빛을 매섭게 세웠다.
* * *
지태는 곧바로 대표실을 나왔다.
두 사람의 보고를 받으면서 이번 사태의 내막에 대해 어느 정도는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그것을 토대로 전 직원들을 직접 지휘하려는 의도였다.
모두가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로 지태를 응시했다.
그중 김태민 대리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처럼 더욱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고개까지 푹 숙인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게 보였다.
“김태민 대리!”
지태의 부름에 김태민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이번 클레임 건은 김 대리의 잘못이 아녜요. 죄인처럼 그러고 있지 말아요.”
지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죄송… 아니, 감사합니다, 대표님.”
살짝 묵례를 해 보이는 김태민을 그윽이 바라보다가 지태는 전 직원들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겠습니다. 조 전무님은 오늘 당장 베트남으로 넘어가 주세요.”
전화로 사과를 하지 말고 직접 날아가 바이어를 달래라는 이야기였다.
말뜻을 알아들은 조현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의를 마치는 대로 곧 준비하겠습니다.”
조현민과 잠시 눈을 맞춘 지태가 이어서 윤민수 부장을 돌아보았다.
“윤 부장님.”
“예.”
“콤콤에 전화를 넣어서 같은 모델의 재고가 얼마나 더 있는지 좀 알아봐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거기에 더해서 우리랑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물량을 주문해간 업체가 있는지도 함께 알아봐주시고.”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윤민수 부장은 곧 스마트폰을 들고 사무실의 구석진 자리로 걸어갔다.
지태는 고개를 돌려 강요한 과장을 바라보았다.
눈빛을 받은 강요한 과장이 지시를 내려달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콤콤에서 포워딩을 맡긴 곳이 코리아 로지스라고 하던데, 거기 우리의 물류 건을 담당한 사람이 누군지 좀 알아봐 줘요. 너무 대놓고 묻지 말고 간을 보듯 살짝, 알겠죠?”
“예, 대표님.”
“자, 그럼 일들 보세요. 우리 한스무역의 신뢰와 명예가 달린 일이라 생각하고 사태 해결에 매진합시다.”
“예!”
전 직원이 큰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조현민이 지태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사무실 밖에서 잠깐 보자는 뜻이었다.
* * *
“누구 소행인지 이미 답은 나온 표정이던데……. 내 말이 맞지?”
조현민이 사무실을 나와 복도 끝 휴게 공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형님도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챈 것 같던데요?”
지태가 픽 웃으며 응수했다.
조현민이 쩝 소리가 나게 입맛을 다시면서 휴게 공간에 놓인 나무 벤치에 먼저 앉았다.
“역시 임경남이겠지?”
“그럴 가능성이 크죠. 하지만 지금껏 그래 왔듯 이번에도 놈이 전면에 나섰을 리는 없어요. 친구지만 똘마니처럼 여기는 두 놈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선우의 허영만이나 골드웰의 송영완?”
“예. 암튼 직원들에게 각각 지시를 내렸으니까 뭔가 곧 윤곽이 드러나겠죠.”
“하여간 그 새끼의 집념도 높이 사줘야겠다.”
조현민이 쓰게 웃었다.
흘깃 돌아보던 지태가 정색했다.
“콤콤에 재고가 있다면 우선 그거라도 챙겨서 베트남으로 들어가세요. 바이어를 만나 지금 말할 수 없는 내부사정이 생겨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진심을 다해 사과도 해주시고.”
“당연히 그래야지. 무역의 생명은 무엇보다 신뢰가 첫짼데…….”
“이유야 어떻든 간에 우리 측의 잘못이니까 클레임이 난 부분에 대해 책임을 물어온다면 그게 어떤 거든 100% 수용하겠다고 하세요.”
“몇 푼 벌려다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버린 상황이네, 젠장!”
“어쩔 수 없죠. 사업이 만만찮다는 것을 거듭 알게 해준 과외비 정도로 생각하게요. 이번에 손해 본 부분에 대한 것은 내가 어차피 몇 배로 되돌려 받을 거지만!”
“뭘 어쩌려고?”
임경남을 상대로 일을 크게 벌일까 우려하는 눈빛이었다.
지태가 피식 웃었다.
“대놓고 무모한 짓은 안 할 테니까 그건 걱정 마시고.”
“니가 어디 내 간을 쪼그라들게 만든 것이 한두 번이냐.”
“이번엔 진짜라니까요.”
지태가 재차 웃는 낯꽃으로 조현민을 바라보았다.
그때 한스무역 쪽에서 지태를 부르는 박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 * *
조현민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벌써 지시했던 것들을 모두 수행한 모양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보고서 형식으로 이미 문서를 만들어놓고 기다렸다.
지태는 우선 콤콤의 재고 상황부터 살펴보았다.
이번에 베트남으로 보낸 비디오폰은 국내에서 크게 인기를 끌던 모델은 아니어서 다행히 쌓아둔 재고가 제법 많았다.
전량을 다 가져갈 만큼은 아니지만 절반쯤은 급한 대로 챙겨갈 수 있겠다.
그 다음으로 살펴본 것은 동종의 모델을 최근에 주문해간 업체였다.
문서를 확인한 지태가 조현민을 돌아보았다.
“전무님, 선우글로벌이랍니다.”
“예? 그럼 역시 허영만이가?”
지태가 어차피 그놈들 중 하나일 거라고 짐작하지 않았냐는 듯 웃어보이자 조현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혀를 차댔다.
“역시나 우리들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는 법이 없는 새끼들이네요.”
“그놈들에 대한 응징은 나중에 몇 배로 되돌려주기로 하고, 일단 전무님은 김태민 대리가 콤콤에 들어가서 재고품을 검수하는 동안 출장 준비부터 서두르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지태는 이쪽을 주목하고 있는 직원들 가운데 강요한 과장을 콕 찍어 쳐다보았다.
“과장님, 코리아 로지스의 담당자와는 직접 통화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외근중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윗선하고 통화했습니다.”
지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보고서에 적힌 담당자의 이름을 천천히 입으로 되뇌었다.
“표성철, 표성철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