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더 멀리 내다본다(1)
“멋지군! 한데 그게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아. 각 단계마다 넘어야 할 턱도 많을 테지만, 대기업에서 자네들의 의도를 알아차린다면 엄청난 방해 공작도 있을 테고.”
“전체적인 그림은 아직 회장님밖엔 모르십니다. 실행에 옮기기 전까진 최대한 비밀에 부칠 거고요.”
“그렇지. 이런 프로젝트는 비밀 유지가 최우선이지.”
유성락 부회장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결코 가볍지 않은 고갯짓을 해보였다.
“괜찮은 발상이었어. 내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그 아이템을 냉큼 빼앗아 버리고 싶을 만큼.”
“그건…?”
“맞아, 칭찬이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좋아. 자네의 밑그림이 완성이 될 때까지 내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는 걸로 하지. 대신 그 대작이 완성되는 날 내 이름 석 자도 거기에 넣어줄 텐가?”
“당연하십니다. 맨 위에다 새겨 넣을 겁니다.”
“하하. 그것 참 예술이군, 그래. 내 말년에 잘 하면 이름 한 줄을 세상에 크게 날리겠어.”
그 말은 지태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였고 격려였다.
지태는 앉은 채로 유성락 부회장에게 감사의 묵례를 올렸다.
* * *
“가는 길에 태워다 준다고 해도 그런다. 어서 타.”
호텔 현관 앞이었다.
전용 기사 없이 손수 운전해온 유성락 부회장이었다.
그는 열려진 운전석 창문 너머로 어서 차에 올라타라는 듯 지태를 향해 손을 까불었다.
“아닙니다. 전 그냥 택시를 이용하겠습니다. 가는 길에 잠시 들릴 곳도 있고요.”
“허, 그 친구 고집하곤! 그럼 나 먼저 가네. 또 봐.”
이윽고 유성락 부회장은 창문을 올리더니 곧 차를 출발시켰다.
지태는 멀어지는 그의 승용차를 바라보다가 택시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고급 외제승용차 두 대가 스르르 다가오더니 멈춰 섰다.
곧 두 명의 수행 기사가 밖으로 나오더니 승용차 뒷문 옆에서 각자가 모시고 갈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나오기에!’
지태가 코웃음을 치며 무심코 호텔 로비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흠칫 놀랐다.
매스컴을 통해 매우 낯이 많이 익은 거물정치인과 또 다른 한 사람은 재계의 거물이었다.
그러나 지태가 정작 놀란 것은 재계의 거물 바로 옆에 바싹 붙어서 걸어오고 있는 여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지은이었다.
지태는 얼른 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하핫. 의원님, 오늘 모처럼 뿌듯한 저녁식사였습니다.”
임상만 회장이 호탕한 웃음으로 악수를 청하자 오신환 의원이 화답하듯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이 아이들이 하는 거에 따라서 이런 뜻깊은 자리가 자주 만들어지겠지요, 임 회장님?”
“암요, 두 말하면 입 아플 겁니다.”
임상만 회장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어서 차에 오르라는 듯 오신환 의원에게 손짓을 했다.
오신환 의원이 자신의 승용차 쪽으로 몇 발짝쯤 걸어가다가 문득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아들 오지용이 두어 걸음 마중을 나갔다.
“지용아, 자고로 남자가 여성을 잘 리드해야 하는 거다. 내 말 알겠지?”
“예, 아버지.”
거기에 화답하듯 임상만 회장은 지은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지용 군과 만나는 것도 오랜만일 텐데, 좋은 이야기들 많이 나누고 들어와라. 응?”
“…….”
그러나 지은은 시큰둥했다.
그녀는 입술을 꾹 닫은 채 땅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민망해진 임상만 회장은 오신환 의원을 보며 멋쩍은 듯 괜히 껄껄 웃었다.
“우리 지은이가 시집갈 때가 되니까 이렇게 여성스러워졌어요. 하하.”
“자고로 여자란 다소곳한 맛이 있어야 매력 아니겠습니까. 회장님께서 따님 하난 잘 키우셨습니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그럼.”
오신환 의원이 차에 올랐다.
그의 차가 출발하자 임상만 회장은 오지용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자신도 곧 차에 올랐다.
오지용은 출발하는 임상만 회장의 차에 대고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임상만 회장을 태운 차는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지은이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오지용은 괜히 뻘쭘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멋쩍음을 털어 내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하하. 꼰대들 틈바구니에 있느라 좀이 쑤셔 죽는 줄 알았네. 지은이 너도 그렇지?”
“글쎄. 난 아무 생각이 없이 나와서, 뭐.”
뽀로통한 지은의 말투에 오지용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뭘 하며 시간을 보내나? 지은아, 우리 간단하게 술이나 한잔 할까?”
“술은 됐고. 안에 들어가서 간단히 차나 한잔해. 내가 오빠한테 할 이야기도 좀 있고.”
말을 마친 지은이 먼저 휑하니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한쪽 어깨를 멋쩍게 으쓱해보이던 오지용이 곧 그녀의 뒤를 따라 로비로 들어갔다.
조명의 사각지대에 서있던 지태가 그제야 밝은 곳으로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이 들어간 호텔 로비 쪽에 멀뚱히 시선을 두었던 지태가 문득 쓰게 웃었다.
* * *
멀리 내다보겠다는 지태의 프로젝트가 이윽고 가동되었다.
그 첫 시작은 천지전자의 인수였다.
일단 결심을 끝내고 유성락 부회장으로부터 컨펌까지 마친 상태였으니 더는 거리낌이 없었다.
지태는 조현민과 윤민수 부장을 대표실로 불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흉중에 담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렇게까지 나오는 터라 못내 미더워하던 조현민도 결국은 두 손 두 발을 전부 들었다.
오전이 끝나갈 무렵 천지전자 유근영 사장과 이동구 사장이 찾아왔다.
대표실에서 천지전자 인수 절차를 모두 마친 후 지태는 시간을 확인했다.
일부러 점심 무렵으로 일정을 잡은 거여서 예약해둔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거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일궈 놓은 자식 같은 회사를 타인에게 넘기는 날이다.
유근영 사장의 마음이 오죽할까.
위로해 주고 싶었다.
물론 그 위로의 이면엔 남모르게 새겨둔 다른 뜻도 있었다.
지태는 식당의 별실에 앉자마자 바로 옆자리의 조현민부터 건너편의 이동구 사장, 그리고 유근영 사장을 순서대로 돌아보았다.
마침내 유근영 사장의 모습에서 시선이 멈췄을 때 지태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유근영 사장은 희미하게 웃어보였지만, 표정은 왠지 슬픔이 깃들어있었다.
“유 사장님의 심정을 100% 이해한다는 건 거짓일 테고 어느 정도는 짐작합니다.”
“고맙습니다, 한 사장! 솔직히 말하자면 시원섭섭하다고나 할까. 암튼 내 기분이 좀 그러네요.”
지태가 그윽한 미소로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뜻을 보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현재 천지전자에서 근무 중인 분들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저희 쪽에서 모두 승계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죠. 창업 때부터 나와 함께하던 사람들입니다. 앞으로도 잘 좀 챙겨 주세요, 한 사장.”
“그건 제가 장담할 사항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엥?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다.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에 유근영 사장은 물론이고 이동구 사장까지 놀란 눈빛이 되어 쳐다보았다.
지태가 소리 없이 웃었다.
“직원들을 챙기는 건 유 사장님의 몫이라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만 못 알아듣는 건가? 그게 무슨 소리야, 한 사장?”
성질 급한 이동구 사장이 답답하다는 듯 물어 왔다.
“새로운 천지전자의 대외적인 대표이사는 제가 될 테지만, 회사 경영은 유 사장님께 맡길 거란 말입니다.”
“실패한 장수한테 다시 지휘를 맡긴다는 겁니까?”
유근영 사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직원들 잘 챙기시고, 제품 잘 만드시고, 밤낮없이 천지전자만 생각하셨던 분이 아니십니까. 그보다 더 훌륭한 적임자를 어디에서 찾겠어요.”
“그, 그래도…….”
“유 사장님은 이제 경영에만 신경 쓰세요. 그동안 사업을 가로막았던 장애물들은 제가 모두 치워 드리겠습니다. 불합리한 갑을관계도 당장 때려치우시고요.”
“갑을관계를 때려치우라면……?”
“6개월짜리 어음이나 날리는 그곳과는 과감히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그쪽에서 원상태로 되돌려 놓겠다고 약속을 해준다면 또 몰라도.”
그러자 이동구 사장이 다시 나섰다.
“그나마 그쪽에 물건을 납품하는 덕분으로 공장이 돌아갔는데 그것마저 끊어내라면 결국엔 공장 문을 닫으라는 얘기가 아닌가?”
“천지전자가 전기주전자를 만드는 기술은 업계에서 이미 인정받은 거 아닙니까. 워낙 정교하게 잘 만들어서 원청에서 들어오는 클레임도 거의 없고요.”
“그야, 그렇지.”
이동구 사장이 유근영 사장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 자신은 제3자이긴 하지만, 그것만큼은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OEM이 끊기면 자체 판로를 개척하면 되죠, 뭐. 국내건 국외건…….”
이동구 사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고, 유근영 사장이 뒤이어 우려의 시선으로 지태를 바라보았다.
“그 기간 동안 공장은 어떻게 돌리고? 손가락 빨면서?”
“전기주전자 라인은 일단 가동을 멈추고 보풀제거기 만드는 일에만 전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어?”
“농담입니다. 너무 정색들을 하시니까 그냥 한번 해본 소립니다, 이동구 사장님.”
“판로를 개척하든 수출 쪽으로 눈을 돌리든 해결책을 모색할 때까지 버틸 여유 자금은 넉넉합니다. 적어도 새롭게 시작하는 천지전자가 갑질하는 사람들한테 처음부터 기죽고 들어가지는 말자, 그런 각오쯤으로 이해해 주세요.”
그제야 이동구 사장은 이해가 된다는 표정이었다.
유근영 사장 역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깜짝 놀랐다는 표정이 비로소 풀리면서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그리고…….”
지태가 다시 정색했다.
두 사장들을 주목시킨 다음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이 품고 있는 미래의 포부였다.
이미 유성락 부회장에게 밝혔고, 그에게서 긍정적인 뜻의 컨펌을 받았던 바로 그것들이었다.
하지만 심도 깊은 이야기까진 그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대략 수박 겉핥기식이랄까.
지태는 밑그림 정도의 수준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경륜이 있고 사업을 오래 한 사람인지라 이동구 사장은 대충 알아먹은 눈치였다.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한 사람은 이미 내 사람이 되었고, 이동구 사장도 충분히 내 편으로 만들 자신이 있는 까닭이었다.
“이제 보니 한 사장, 이 친구 아주 큰일을 낼 사람이로구먼.”
이동구 사장이 입을 떡 벌리고는 지태를 오래 쳐다보았다.
어이없다거나 비웃음이 담긴 눈빛은 아니었다.
적잖이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는 감탄의 뜻이 담긴 거였다.
“형님! 우리가 나이를 헛먹은 거 같습니다. 어찌 이런 기가 막힌 생각을 다 했을까요?”
“하지만 쉽진 않을 거야. 영세업체라고는 하지만 다들 나름의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거든. 그들을 하나로 모으고 결집시킨다는 게 결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 그래서 처음부터 무리하게 추진하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제일 먼저 제 뜻에 동조해줄 만한 몇몇 사장님들을 규합하는 게 우선이겠죠?”
“근데 그 말을 하면서 나는 왜 빤히 쳐다보나?”
이동구 사장이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인 채 물었다.
“제가 가장 먼저 설득해야 할 분이니까요.”
“나를? 난 왜 또? 이 사람아, 오해하지 마. 나는 누가 뭐래도 아직은 그럭저럭 잘 나가는 사람이야. 자네한테 내 공장을 팔 생각도 없을뿐더러 자네가 흡수하려고 마음먹는 업체들하곤 사정이 다르다고!”
“그럼 나중에 후회하실 텐데요. 그때 가서 끼워달라고 사정해 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뭐, 아직 뼈대 하나 세워지지 않은 허상뿐인 것을 가지고 잘난 척 하기는…….”
이동구 사장은 애써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내심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심경인 듯했다.
지태의 제안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까닭이다.
그런 이동구 사장에게 지태는 쐐기를 박듯 쉬지 않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