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엉겁결에 떠맡다(3)
“너 혼자 퇴원하려고 그랬냐? 어머니랑 아름 씨는?”
병실을 한 바퀴 둘러보던 지태가 물었다.
김아름이 근무 중이라면 최소한 강성원의 어머니라도 와있을 줄 예상했다.
“내가 뭐 애냐, 인마.”
“그럼 띨띨하게 칼이나 맞고 다니는 놈이 애지, 어른이냐?”
“에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 말이 나오니 순식간에 할 말이 없어진 지태였다.
미안하다는 기색이 역력하자 강성원이 헤벌쭉 웃었다.
“이 새끼 이거 요즘 너무 소심해졌네. 형이 그냥 농담 한번 해본 거야.”
괜히 부담을 지어줬다는 생각에 강성원은 얼른 이 상황을 웃어넘기려고 했다.
한데 지태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여하튼 나 때문에 벌어진 건 맞잖아.”
“하, 이 자식! 아니라니깐 그러네.”
강성원은 지태의 가슴팍을 가볍게 툭 내리쳤다.
그제야 지태의 입가에 쓴 미소가 피어올랐다.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방검복 입고 다녀. 그나마 상체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봐야지. 흐흐.”
“그래, 인마. 좋기도 하겠다!”
이번엔 지태가 강성원의 가슴팍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
“두고 봐라. 돈두파 이 개새끼들 앞으로 나한테 걸렸다하면 모조리 다 곡소리가 날 테니까. 감히 이 어르신의 몸에다가 회칼을 박아? 헛!”
강성원은 그날 밤의 일이 생각나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태가 얼마 전 이돈두를 만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아직 그렇게 오해하는 건 당연했다.
“아냐, 걔네들!”
“어?”
“알고 보니까 너 그렇게 만든 놈들, 걔네가 아니었다고.”
그러자 강성원이 지태를 수상쩍게 쳐다보았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지태는 대답 대신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의식하고는 강성원의 퇴원 가방을 얼른 손에 들었다.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지태가 툭 내뱉고는 병실을 먼저 빠져나갔다.
“뭐, 돈두파 보스라는 놈을 만났다고?”
병원 로비를 걸어 나오던 강성원이 더는 궁금해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앞서가는 지태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뭐하고 있냐, 빨리 안 나오고?”
뒤늦게 강성원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느끼고 지태가 뒤돌아보았다.
강성원이 서둘러 다가왔다.
“니가 그 깡패 새끼를 왜 만났는데?”
“어쩌다 보니 사정이 좀 그렇게 됐어.”
“어쩌다 보니 그놈을 만났다고?”
강성원은 범인을 취조하듯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지태는 로비를 빠져나오자마자 정원 한쪽에 놓인 빈 벤치를 가리켰다.
차가 없으니 어차피 택시를 타고 이동할 거다.
택시 기사가 있는 데서 이돈두와 만났던 부분을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곳에서 간단하게라도 설명하고 가는 게 낫다고 지태는 판단했다.
“그렇다고 건달 새끼하고 친구까지 맺었냐? 아주 잘 하는 짓이다.”
지태의 설명을 모두 듣고 난 강성원이 툴툴거리며 내뱉었다.
이돈두와 만나게 된 이유는 잊어버린 채 그와 친구를 맺었다는 부분만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은 모양이다.
“그럼 친구 먹자는데 면전에 대고 ‘싫어, 인마!’ 그렇게 하냐? 그리고 나야 뭐 손해를 볼 것도 없잖아. 나이 많이 먹은 놈이 한참 아우뻘한테 먼저 친구 먹자고 했는데.”
“아이고, 그래! 장하다, 장해, 이 자식아!”
강성원은 기어이 지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하, 자식! 환자라고 내가 좀 오냐, 오냐 해줬더니만.”
지태가 짐짓 가자미눈을 뜨고 흘겨대다가 이내 픽 웃었다.
곧 그날 밤을 떠올리듯 정면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그래도 건달 놈치고는 꽤 괜찮아 보이더라.”
“주먹질해서 밥 빌어 처먹는 새끼들이 다 똑같지 그중에 괜찮고 말고가 어딨냐?”
“나한테만 허튼 짓거리를 안 하면 괜찮은 건달인 거야, 인마!”
“그래. 니 똥 엄청 굵다니깐!”
강성원이 가볍게 놀리다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참, 근데 이현욱한테 사주를 받은 놈들이 타워파라고 했지?”
“돈두 똘마니 애들이 확실하게 목격했다고 했으니까 얼추 그 말이 맞을 거야.”
“하, 시발! 이것들이 완전히 겁 대가리 짱 박았네. 감히 대한민국의 민주경찰을 건드려? 아니, 서울 광수대 민완형사의 몸에 칼빵을 놓아? 이 시발 놈들, 너희들 이제 내 손에 다 죽었어!”
대화를 나누다보니 다시 열이 뻗치고 분노가 치솟는 모양이었다.
강성원이 거칠게 내뱉고는 이를 악물었다.
* * *
오전 전체 회의를 마쳤을 무렵이었다.
“어머!”
사무실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박수연이 흠칫 놀라는 목소리를 냈다.
순서대로 돌아보며 그녀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직원들의 반응이 조현민에게까지 전달되는 데는 채 1초를 넘기지 않았다.
그 역시도 박수연과 다르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어!”
윤민수 부장이 출근한 것이다.
지태는 분명 그에게 일주일간의 휴가를 주었었다.
쉬는 동안 아내를 잃은 슬픔을 어느 정도 털어내고 오라 했는데 겨우 이틀이 지난 수요일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모두가 놀랄 수밖에.
조현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윤민수 부장을 맞았다.
“이게 어찌된 겁니까? 좀 더 쉬시지 않고서.”
“아닙니다, 전무님. 이틀이면 충분했어요. 아내도 제가 너무 오래 슬픔에 빠져 있는 걸 별로 원치 않을 테고요.”
“하이고, 이런!”
조현민은 위로하듯 윤민수 부장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참! 대표님께 인사부터 드리죠.”
“예.”
윤민수 부장은 대표실 쪽으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어?”
어느새 대표실까지 전염이 된 모양이었다.
노크 소리에 무심코 ‘예!’라고 응답하던 지태 역시 안으로 들어선 이가 윤민수 부장이라는 사실에 직원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지태는 그에게 손짓으로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그러고는 윤민수 부장이 자리를 잡고 앉자 조금은 아픈 시선으로 물었다.
“사모님과의 이별식은 잘 치르셨습니까?”
“이별이라뇨. 전 아직 제 아내를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지태가 위로를 담아 던진 말에 윤민수 부장이 엉뚱한 답변으로 응수해 왔다.
“……?”
“그동안 이별연습을 수없이 했지만 쉽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포기하고 그냥 여기에 묻어 두기로 했습니다, 영원히!”
윤민수 부장은 제 심장을 톡톡 쳐 보였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지태가 다시금 아프게 미소 지었다.
“이해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는요, 무슨…….”
“새 인연을 맺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사람에게 너무도 과분한 위로와 격려를 주셨어요. 대표님 이하 전 직원들에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그렇담 굳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이번엔 우리가 윤 부장님께 위로를 드렸지만, 언젠가는 그 마음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을 날이 있을 테니까요.”
“그날, 그때가 오면 저 역시도 제 일처럼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지태가 재차 연민을 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윤민수 부장이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밀린 업무부터 처리해야겠어요.”
“아! 예에.”
엉겁결에 대답을 마쳤을 때 윤민수 부장은 벌써 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
그가 이제 막 문을 열려는 순간 지태가 다시 불렀다.
“윤 부장님!”
“예?”
“저기 뭐 하나 상의 드려도 될까요?”
“뭔데요, 대표님?”
“사실은 제가 작은 공장 하나를 인수하려고 하는데 윤 부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윤민수 부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지태는 그를 일단 다시 소파에 앉게 했다.
윤민수 부장에게서 꼭 어떤 해답을 구하려던 의도는 아니다.
그로 하여금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만들려는 지태의 배려였다.
아무래도 업무에 깊이 빠져 있는 동안엔 아내에 대한 슬픔과 애틋한 그리움이 조금은 희석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 * *
“저더러 공장 인수 절차에 착수하라던데요.”
대표실을 나오자마자 윤민수 부장은 조현민을 밖으로 불러내었다.
두 사람이 올라온 곳은 빌딩의 옥상이었다.
연일 대기의 질을 떨어뜨렸던 미세먼지가 오늘은 때마침 ‘좋음’으로 표시된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서울 하늘이 여느 때와는 달리 무척 쾌청했다.
윤민수 부장의 말에 조현민은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뭐 대표께서 그리 말씀했다면 벌써 작심한 것이겠군요.”
그 말을 들은 윤민수 부장은 조현민이 자신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나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도 전무님처럼 처음엔 그 말씀을 듣고 좀 생뚱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듣고 보니까 조금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던데요.”
“고개가 절로…?”
조현민이 의외라는 식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천지전자를 인수해 봤자 아무런 메리트가 없다고 봤는데, 윤민수 부장이 오히려 지태를 두둔하고 나오니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윤민수 부장의 말이 이어졌다.
“예, 맞습니다. 조 전무님께서 우려하시는 것처럼 공장 자체로는 별로 메리트가 없습니다. 근데 대표님이 생각하고 있는 빅 픽처, 장기적인 비전으로 봤을 때는 나름 괜찮을 것도 같다, 이런 말입니다.”
“……?”
자신은 들어 보지 못한 지태의 비전을 윤민수 부장만 들었던 모양이다.
순간 조현민은 살짝 배신감이 느껴졌다.
창업 멤버인 자신보다 윤민수 부장을 더 신뢰하나 싶어서.
조현민의 눈빛을 읽고 그 마음을 헤아린 듯 윤민수 부장이 소리 없이 웃었다.
“이건 저로 하여금 전무님을 먼저 설득해주라는 우리 대표님의 우회적인 지시 아니겠습니까.”
그제야 상황이 이해된다는 듯 조현민이 씁쓸하게 웃었다.
“대표께서 나를 완전히 잔소리꾼으로 아는 모양이네. 근데 그 장기적인 비전인가, 프로젝트인가 하는 건 뭔데요?”
“그건 점심시간 때 대표님이 직접 설명해주신답니다. 물론 조 전무님과 따로 식사를 하시면서요.”
“허, 이게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지태의 의도는 알겠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약간의 배신감이 남아 조현민은 허공에 대고 혀를 찼다.
* * *
조현민의 마음을 얻어 보려고 지태가 신경 써서 고른 점심메뉴는 한정식이었다.
보기에도 거창한 점심이었지만, 조현민은 일부러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몇 푼 벌었다고 아주 그냥 돈이 썩어 났지?”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좀 쓰고자하는데 빈정대시긴!”
“식사 정도라면 이해나 하지. 목숨 걸고 벌어 온 돈을 엉뚱하게도 깨진 독에 쏟아 부으려고 하니까 하는 소리 아냐.”
“잔소리도 배가 불러야 나올 거 아닙니까. 일단 이것들부터 해치우자고요!”
지태는 한상 가득 깔린 요리와 밑반찬들을 가리켰다.
자신이 창업 멤버라고는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한스무역의 오너는 지태였다.
멘토니, 영원한 사수니 낯간지러운 소리를 해대지만 결국 대표가 결정하면 그것으로 끝인 거다.
이미 지태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고 마음을 다시 돌이키기가 어렵다면 굳이 억지를 부리며 인상을 구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기왕 차려진 밥상이니 모처럼 성찬이나 즐겨야겠다고 조현민은 마음을 굳혔다.
“드세요, 형님!”
“그래, 일단 먹자.”
고개를 끄덕인 조현민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지태를 다시 쳐다보았다.
“왜 또요?”
“우리만 푸짐한 점심을 먹는 게 영 미안해서 안 그러냐.”
그러자 지태가 뭔가 심중에 감춰둔 것이 있는 듯 픽픽 웃어 댔다.
“걱정 마셔요. 지난주 금요일에 못했던 회식 대신 이곳으로 전부 불렀으니까! 저쪽 다른 방에서 한창 식사 중일 겁니다.”
“이런, 이런!”
조현민은 다시 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듯 뒷목을 잡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토라졌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가격이 만만치는 않지만 유명 한정식 전문점답게 맛은 좋았다.
코스 요리로 나오는 것마다 입에 척척 감기는 것이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맛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엔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천천히 요리의 맛을 음미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리고 지태와 조현민은 마침내 보리 굴비에 된장찌개를 곁들인 돌솥밥을 끝으로 수저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제야 조현민이 숭늉으로 입안을 헹구며 지금껏 내내 궁금해 하고 있던 것을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