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엉겁결에 떠맡다(1)
“예, 사장님!”
- 지, 지금 자네 어딘가? 괜찮은 거야?
심하게 말을 더듬는 것이 이동구 사장은 많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사장님은 댁에 잘 들어가셨죠?”
- 집은 무슨! 아직 거기야, 아까 차를 주차해놓은 곳!
“아니 왜 아직 안 들어가시고?”
- 어떻게 우리만 집에 들어가나. 한 사장이 그런 상황에 있는데. 근데 정말 괜찮은 거야?
“예, 전 괜찮습니다. 아까 사장님도 보셨던 보스랑 지금 술 한 잔 같이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야기가 잘 끝났거든요.”
- 뭐, 뭣? 보스랑 술을…?
이동구 사장은 조금은 생경하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예. 암튼 전 괜찮으니까 어서 귀가하세요. 제가 내일 자세히 말씀해 드릴 테니까.”
이동구 사장은 여전히 뭔가 개운치 않은 듯했지만,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지태의 말에 우선은 안심하며 전화를 끊었다.
지태는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서 이돈두를 흘깃 쳐다보았다.
누구랑 통화하나 은근히 엿듣고 있던 이돈두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피식 웃어 보인 지태가 설명해주었다.
“아까 자네들이 겁박했던 사장님이야. 아, 참! 그 양반들을 다시 건들지는 않겠지?”
“하,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해? 이거 자존심이 상하려고 하는데. 어이, 이봐! 남아일언 중천금이란 말 몰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내 입으로 한번 내뱉은 말은 꼭 지키니까 걱정 마.”
이돈두는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혀를 차고는 술병을 들어보였다.
“자, 어서 한잔하고 내 술 받아!”
흐뭇한 표정으로 지태가 술잔을 냉큼 비웠다.
그러고는 잔을 내밀자 이돈두가 천천히 술을 채웠다.
“이번엔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술을 받던 지태가 문득 생각났다는 얼굴로 이돈두를 쳐다보았다.
왠지 질문을 던지기 전부터 피식피식 웃어대는 폼이 수상쩍게 보인다.
뭔가 찜찜한 표정으로 이돈두는 어디 한번 질문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핫. 자네 이름말이야. 왜 하필 돈두야?”
“하, 이런!”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탄식을 내뱉으며 이돈두가 인상을 살짝 구겼다.
“뭐, 내 이름 이돈두가 돼지 돈(豚)에다가 대가리 두(頭)자를 쓰는 줄 아나 보지?”
지태는 부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여전히 짓궂게 웃었다.
“이 사람아! 돼지 대가리라는 뜻이 아니라 찬란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 돈에 머리 두 자! 태양의 가장 윗대가리라는 심오한 뜻이 있어. 아침 해 돈(暾)자야, 돼지 돈(豚)이 아니라! 알겠어?”
이돈두의 열변에 지태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 양손을 펼쳐보였다.
“오케이, 거기까지! 그래. 앞으론 내가 찬란한 아침 해의 대가리라고 불러줄게.”
이돈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린 채 쳐다보다가 결국 큰소리로 웃었다.
지태 역시 따라서 웃어주었다.
그 농담 한번으로 두 사람은 순간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이돈두가 그윽하게 지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야, 한 사장! 우리 그냥 친구 먹을래?”
“친구?”
“그래. 친구란 말 몰라, 친구?”
“하핫!”
“왜 웃는데?”
“자네하고 나는 적어도 일고여덟 살은 차이가 날 건데 괜찮겠어? 자네가 손해잖아.”
“니미!”
이돈두는 ‘뭘 그까짓 것을 가지고’하듯 픽 하고 웃었다.
“이 친구야! 건달들 세계에선 말이야. 나이, 그까짓 것은 아무 상관도 없어. 우리들 세계에서는 힘 센 놈이 곧 형님이야. 나보다 나이를 훨씬 더 많이 처먹은 놈들도 나한테 형님이라고 불러. 물론 의례적으로 바닥 형님들한테는 대접을 해주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렇다는 얘기야.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억지로 서열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당사자인 내가 친구 하자는데 어떤 놈이 뭐라 하겠어! 야, 너희들 생각은 어때?”
이돈두는 퍼뜩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돈두파 서열 2, 3위의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이돈두의 뜻을 받들겠다는 듯 냉큼 고개를 조아려보였다.
“형님의 친구시면 한 사장님도 당연히 저희 형뻘이 되십니다, 형님!”
“거봐, 들었지?”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해버리는 이돈두였다.
지태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까짓 거 트자. 친구하자고!”
그러고는 테이블 앞으로 팔을 길게 늘어뜨려 이돈두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돈두가 지태의 손을 꼭 붙잡고는 만족한 듯이 흔들어댔다.
* * *
티끌 모아 태산이라 했던가.
새 식구를 맞이한 이후 전 직원이 합심하여 오더에 매진한 결과는 은근 놀라웠다.
비록 몇 만 달러짜리 오더부터 몇 십만 달러의 오더까지 각자가 거둬들인 실적은 다양했지만, 그것들을 모아 한 달 총매출로 결산해보니 한스무역으로써는 실로 엄청난 성과였다.
오전에 전 직원들이 모여 회의를 가졌다.
이번 달 한스무역에서 거둬 올린 실적은 도합 830만 달러였다.
지태는 그동안 애쓴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도 조금만 더 발 벗고 뛰어보자는 독려 또한 잊지 않았다.
달리는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채찍을 내려치듯.
오늘은 금요일.
모처럼 전체 회식을 갖자는 지태의 말에 모두는 반겼다.
물론 선약이 잡힌 직원에게는 굳이 참석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부인의 병간호 때문에 부득불 참여하지 못하는 윤민수 부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회의를 마친 지태는 곧 대표실로 들어갔다.
얼마 전 지태가 외출하고 없는 사이 조현민 이하 모든 직원들이 회의를 한 듯했다.
그리고 딱히 불편한 점은 없지만 회사의 대표가 직원들과 한 공간에서 근무를 하는 게 남 보기에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들이 오간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태는 억지로 등 떠밀리다시피 그동안 비어놓았던 대표실을 이용하게 된 거다.
그날이 생각나서 잠시 픽 웃는 사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조현민이 곧 문을 열고 들어섰다.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어요?”
조금 전까지 얼굴을 맞대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찾아온 까닭을 묻는 거였다.
“이젠 튕기시겠다? 회사가 안정돼 가니까 이젠 목에 힘을 주고 싶으시다 이거지?”
조현민이 응접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차암, 형님도!”
지태는 피식 웃고는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무슨 일인데요?”
“그냥! 기분이 오늘 따라 더욱 좋아서 말이야.”
“내 얼굴을 보는 게 말이에요?”
지태의 썰렁한 농담에 조현민은 잠시 찡그렸다가 이내 정색했다.
“우리 회사 이번 달 실적 말이야. 아주 고무적이지 않아? 지난달 순 이익금만 해도 1억 5천을 넘었어.”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가 처음 창업할 때 우려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불식돼버렸어요. 형님이 새 식구들을 잘 뽑은 덕분입니다.”
지태는 불과 몇 달 사이에 몰라보도록 성장한 한스무역의 공적을 은근슬쩍 조현민에게 넘겨 버렸다.
그게 싫지는 않은 듯 조현민은 옅게 웃었다.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좀 있긴 하지.”
실없이 웃던 조현민은 곧 다시 웃음기를 거뒀다.
“다들 한 번씩 상처받았던 친구들이라 그런지 열의가 아주 대단하고 남달라.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매사에 임하거든. 덕분에 나도 요즘 엄청 부담감을 느낀다니까. 자극도 받고 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요. 직원들이 저런 식인데 대표라는 인간이 헐렁하면 안 되잖습니까. 직원들보다 몇 걸음이라도 더 많이, 좀 더 앞서 달려야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한스무역의 미래가 무지 밝아 보이네. 크크.”
조현민이 다시금 킥킥 웃다가 문득 고개를 내저었다.
그제야 이 방에 찾아온 용건이 따로 있다는 것을 자각한 모양이다.
“참, 윤 부장 말이야.”
“왜요?”
되묻는 지태를 보며 조현민이 무겁게 입맛을 다셨다.
“부인이 지금 많이 위독한가봐.”
“윤 부장이 말해줬습니까?”
“아니. 아침 업무 시작 전에 화장실에 갔다 오는 길에 병원 주치의하고 통화하는 걸 본의 아니게 엿들었거든. 자칫 잘못하면 오늘을 채 넘기기가…….”
조현민은 끝부분에 가서는 안타깝게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윤민수 부장은 아침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전혀 내색하지를 않았었다.
윤민수 부장의 애간장이 그토록 끊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속도 없이 퇴근 후에 전체 회식이나 하자고 했던 자신이 순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지태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급체를 한 듯 가슴이 메어왔다.
“후우~”
지태가 바닥이 꺼질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형님! 윤 부장님더러 어서 퇴근하라고 하세요. 지금 업무가 손에 잡히겠습니까.”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그럼요. 어서요!”
조현민은 망설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 *
윤민수 부장의 조기 퇴근이 어떤 이유 때문인지를 잘 아는 까닭에 모든 직원들은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던 중 퇴근이 가까워져 올 즈음이었다.
윤민수 부장으로부터 끝내 안타까운 비보가 날아들었다.
비교적 평화로운 모습으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전하는 윤민수 부장의 목소리는 얼마나 울고 또 오열했던지 잔뜩 쉰 목소리였다.
지태는 직원들에게 퇴근을 지시했다.
그리고 조현민 하나만 대동한 채 대학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퇴근하라는 대표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직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태의 뒤를 따라 장례식장으로 달려와 버렸다.
그 즉시 손발을 걷어붙이고 나선 지태와 직원들은 자신들이 마치 상주인 양 최선을 다해 조문객들을 맞았고, 그들을 접대하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이튿날 지태와 통화를 하면서 이 소식을 접하게 된 지은이 문상을 왔다.
“지은이는 아무 연고도 없는데 뭐 하러 왔어?”
이제 막 조문을 마치고 나온 지은에게 별 뜻 없이 물었는데, 그녀가 돌연 눈을 흘겼다.
“왜 연고가 없어? 지태 씨의 회사 가족이면 내게도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아무 이유나 막 갖다 붙여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상하게 말이 되었다.
지태는 그렇게 마음을 써준 지은이 고마웠다.
지은을 보내고 얼마 안 있어 이번에는 이동구 사장과 유근영 사장이 빈소를 찾았다.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태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이동구 사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슬픔은 나눌수록 줄어든다지 않은가. 더구나 한 사장의 회사 직원인데 당연히 와봐야지.”
지태는 다시 한번 감사의 묵례와 함께 그들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리고 조금은 한가한 틈을 타서 그들과 마주앉았다.
식사와 함께 소주 한 병을 비워갈 즈음이었다.
유근영 사장이 문득 한숨을 내쉬며 지태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에 뭔가 할 말 가득한 눈빛이었다.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우물쭈물 망설이는 유근영 사장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지태가 먼저 질문을 던지며 유도했다.
“아, 그게…….”
“동생! 상갓집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이동구 사장도 유근영 사장의 사정이나 고민을 아직 잘 모르는 듯했다.
그 역시 궁금한 표정으로 유근영 사장을 돌아보았다.
재차 한숨을 내쉰 유근영 사장이 이윽고 결심한 듯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남의 초상집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우리 한 사장이 직원의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고는 어렵게 결심을 했어요.”
“웬 결심?”
“형님, 잠깐만요. 그냥 지금은 제 이야기부터 들어주세요.”
유근영 사장이 양해를 구하며 이동구 사장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허, 차암!”
이동구 사장은 짐짓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해댔다.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유 사장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고민이랄 건 없고. 아무래도 내가 공장을 내놔야 할 거 같아요.”
“천지전자를 말입니까?”
지태가 되물었고,
“어이, 동생!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혹시나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고 이동구 사장이 재차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