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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99화 (99/272)

099화. 강남 돈두파!(1)

역시나 이번에도 지태의 작전이 먹혔다.

여직원이 은근히 물어왔다.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한 2억쯤…….”

“와우! 굉장히 큰 금액이네요. 근데 담보는 확실하시고요?”

“예. 내가 공장부지와 건물, 그리고 마석 인근에 땅을 좀 가지고 있습니다. 공시지가로만 따져도 족히 7~8억은 넘을 겁니다.”

여직원은 일단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한 발 뒤로 빼는 모습을 연출해왔다.

“작은 단위의 대출이라면 제 선에서 처리할 수도 있어요. 근데 억 단위는 사장님의 결재가 꼭 필요하거든요. 사장님의 급한 사정은 잘 알겠지만 일단 명함을 제게 주고 가시면 따로 연락드리도록 할게요.”

간을 보러 온 건데 명함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지태는 대신 자신의 스마트폰 번호를 남겨놓고 사무실을 나왔다.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져 놨으니 만약 군침이 돈다면 머잖아 덥석 물고자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것이다.

빌딩 밖으로 나온 지태는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이제는 지은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 * *

도심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라운지 바였다.

이 비싼 강남땅에 정원까지 갖춘 술집이라니.

지태는 택시에서 내려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오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정원 쪽으로 면해 있는 통유리 너머로 지은이 보인 까닭이다.

여느 때와는 확실히 달라 보인다.

왠지 무거운 느낌의 분위기.

뭔가 그녀에게 일이 생겼음이 분명해 보였다.

‘뭐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 지태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자신의 마음도 무거웠다.

지은을 만나러 나오는 길이 예전 같지 않고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녀가 임경남의 여동생이라는 것이 오늘처럼 무겁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되도록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남녀 간에 사랑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임경남과 혈육으로 얽혀있는 그녀의 사정을 조금은 무시할 만큼 깊이 빠져버리게 됐다.

그런데 오늘은 많이 다르다.

잠시 잊고 있었던 부담감이 새록새록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더구나 강성원이 놈들에 의해 칼을 맞은 이후엔 더더욱 그런 부담감이 먹구름처럼 밀려들었다.

바야흐로 놈들과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을 앞두고 있는 지금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평사시의 모습으로 지은을 대한다?

“하아!”

모르겠다.

그럴 만한 배짱이 없는 듯 내재된 자신감이 급하게 추락하고 있다.

“흐읍, 후우~”

지태는 숨을 크게 들이켠 다음 천천히 내뱉고는 다시금 라운지 바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왔어?”

지금껏 우울모드로 앉아있던 지은이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가 지태임을 확인하고는 애써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지금 그녀가 보이는 발연기에는 어색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지만, 지태는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지태가 맞은편에 앉으려 하자 지은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리 와서 앉아.”

그러면서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톡톡 쳐 보였다.

지태가 가볍게 미소를 날리면서 지은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은은 기다렸다는 듯 지태의 어깨에 머리를 갖다 대었다.

“안아 줘, 자기야! 잠시만…….”

어, 점점?

지태는 시선만 돌려 지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녀의 요구대로 팔 한쪽을 길게 뻗어 어깨를 감았다.

“진짜 왜 그래?”

“왜는 무슨. 그냥 안기고 싶어서.”

“…….”

지태는 이 대목에서 뭔가 한마디쯤 대꾸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정돈되지 않은 머릿속이 부초처럼 둥둥 떠다니는 느낌만 자꾸 들 뿐이었다.

그러다가 겨우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저녁은 뭘 먹을래?”

“후훗!”

지은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 미소 그대로 빤히 쳐다보았다.

지태가 쩝 하며 입맛을 다셨다.

“저녁 먹자는 내 말이 그렇게 웃겼어?”

“아니. 난 그냥 자기의 그 말에 순간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지은이 다시 고개를 돌려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

“뭐랄까… 오피스텔에서 라면 먹고 갈래?”

“뭐어?”

지태는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털털하게 웃었다.

“그건 걍 농담이고. 나 사실 별로 밥 생각이 없어. 지태 씬 많이 고파?”

“나도 사실…….”

“그럼 우리 오늘은 이럴까? 밥 대신 술!”

확실히 내가 모르는 뭔가 있다.

지태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품은 채 빤히 지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지은의 속을 도무지 알 수도, 읽을 수도 없었다.

오늘 이 시간만큼은 그녀의 포커페이스가 수준급이라고 느껴졌다.

‘그래, 때가 되면 알겠지.’

지태는 그녀가 왜 하루 종일 우울모드에 빠져 있었는지에 대해선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은 지은의 뜻대로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좋아, 콜이다! 한잔해, 우리.”

* * *

주량을 오버했다.

와인 두 병을 밑바닥까지 깔끔하게 비우고서야 두 사람은 라운지 바를 나왔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지은은 일부러 차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듯했다.

지태는 걸음이 약간 흐트러진 지은의 팔목을 붙잡아 부축했다.

“집 근처까지 데려다줄게.”

“싫은데!”

“어?”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지태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장님께서 요즘 예민하게 구신다며? 그러다 혼나면 어쩌려고 그래?”

“그 예민하게 구는 회장님 때문에 내가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거야, 이 바보야.”

지은은 입술을 삐죽이며 지태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럼 어쩌자고?”

“오피스텔!”

“오피스텔에?”

“응. 보란 듯이!”

허!

지태가 답이 안 나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단 가자. 대신…….”

“쉿! 그만!”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그러곤 흘깃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숙이는 동작으로 지태가 부축해주던 팔을 쏙 빼냈다.

곧 자석에 척 달라붙듯 지태의 팔짱을 끼며 안겼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은 도로까지 걸어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가 오피스텔 앞에 이르자 지태는 곧 돌아서려 했다.

지은과 오늘밤을 함께 보냈다간 며칠 전부터 머릿속에 계속 맴돌던 어떤 다짐을 기어이 꺼내고 말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애틋함을 담은 눈길로 붙잡는 지은을 뿌리치고 차마 돌아설 수는 없었다.

“그럼 너 자는 것만 보고 바로 나올게.”

“싫어. 자기랑 내일 아침 모닝커피도 함께 할 거야.”

지은은 오늘따라 콧소리를 섞어가며 심하게 고집을 부렸다.

그 이면에는 자신이 그러는 것처럼 지은 역시도 뭔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전에 없이 심하게 오버를 해오는 데는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는 거라고 지태는 판단했다.

‘그래, 임경남은 임경남이고 지은이는 지은이야. 훗날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자연스럽게 부딪쳐 보자.’

답을 구하기 어려운 문제를 끌어안고 끙끙대봤자 영양가 없이 골머리만 썩힐 뿐이다.

이럴 땐 차라리 모든 것을 잊고 쉬어가는 게 옳다.

지태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은 미리 정해진 하늘의 뜻대로 맡겨두고 지금은 일단 편하게 마음먹기로 결심했다.

* * *

미끼를 물긴 물었다.

지태가 전화번호를 남기고 돌아온 지 하루가 다 되어 가는 퇴근 무렵.

모르는 전화번호 하나가 어서 전화를 받으라는 듯 액정 화면에서 둥둥 떠다녔다.

지태는 이 번호를 보는 순간 하나 파이낸스의 사장 내지는 그에 버금가는 담당자일 거라는 촉이 꽂혔다.

그래서 직원들의 이목을 피해 얼른 대표실로 이동한 다음 전화를 받았다.

“예, 튼튼가구 대표, 조현민입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제 본명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갖다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래서 급히 머릿속에서 급조한 튼튼가구란 회사명과 함께 조현민이란 이름을 차용해 둘러댔다.

- 아, 예. 어제 우리 하나 파이낸스를 찾아오셨다면서요? 급전이 필요하시다고.

건달의 성문(聲紋)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들어보면 그들 특유의 뉘앙스가 있다.

이놈이 딱 그랬다.

“혹시 사장님 되십니까?”

- 예, 내가 하나 파이낸스 대푭니다.

“아, 그러시군요. 좀 도와주십시오, 사장님. 제가 급히 자금을 돌려야할 상황에 놓여 있어서 그럽니다.”

-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일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라서…….

그러니까 그에 합당한 담보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물론 어제 7~8억쯤 되는 담보물이 있다고 거짓 정보를 흘려 놓은 상태.

이 파이낸스의 사장이라는 놈은 그것에 혹해서 전화를 해왔음이 분명하다.

공시지가로만 따져서 7~8억이니 실제 매매가는 그것을 훨씬 상회한다고 봐야 한다.

이놈 입장에서는 이윤이 엄청 많이 남는 장사라고 벌써부터 침을 흘려대고 있는 것이 지태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그래서 꿀릴 게 없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놈과의 전화통화에 임했다.

“제 공장과 대지를 담보로 잡겠습니다. 공시지가로 약 7~8억…….”

- 아, 그건 들었습니다. 그럼 언제가 좋겠습니까?

‘당장 만나야지, 인마.’

지태는 속으로 픽 웃고는 좀 더 애가 닳아 죽겠다는 목소리를 냈다.

“저야 지금 당장 찾아뵙기를 원합니다만.”

- 지금은 곤란하고요. 아, 그렇지, 8시쯤 다시 전화를 줄 테니까 강남으로 넘어와요.

“예, 예! 알겠습니다. 총알처럼 날아가겠습니다.”

뚝.

지태는 통화가 끊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너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지 이 형님이 몽타주 좀 보자.”

지태가 대표실 밖으로 나오자 조현민이 힐끔 돌아보았다.

표정이 밝은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던 조현민이 턱짓으로 휴게 공간을 가리켰다.

지태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사인을 준 후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동구 사장에게 전화를 넣으려는 거다.

천지전자 유근영 사장과 함께 강남으로 넘어오라고 할 참이다.

그래서 그들과 더불어 하나 파이낸스 놈이 지정한 장소에 같이 가려는 것.

그 자리에서 대출원금과 이자를 던져 주고 깔끔하게 대출 문제를 마무리 지어 버리면 되었다.

전화를 끊은 지태가 휴게 공간 쪽으로 걸어갔다.

지태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조현민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표정이 밝아?”

“이동구 사장님의 사촌아우 분의 일 땜에요.”

“왜?”

“잘 풀릴 거 같은 예감이 들거든요.”

“그으래?”

“사실 어제 퇴근하면서 거기에 잠깐 들렸거든요. 살짝 미끼를 던져 놓고 왔더니 그걸 덥석 물었어요.”

“아까 그게 그 전화였어?”

“예. 급전이 필요하다고 잔뜩 엄살을 떨어 놨더니 당장 보자네요.”

“걔들 건달이든가 아니면, 백퍼 건달 끼고 노는 놈들이라니깐. 조심해야 돼.”

“염려 붙들어 매셔요, 형님.”

지태가 소리 없이 웃어 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윤민수 부장이었다.

“대표님, 전무님!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조현민이 먼저 끄덕였고, 지태가 앉은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물었다.

“아내 분이 계시는 병원으로 바로 가는 거죠?”

“예.”

“같이 나가죠. 그러잖아도 일이 있어서 저도 일찍 퇴근하려던 참입니다.”

지태는 제자리로 돌아와 슈트만 챙겨 윤민수 부장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부인의 병세는 좀 어떠십니까?”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탄 지태가 1층의 숫자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인사치레로 말은 그리했지만 윤민수 부장의 표정은 썩 밝지가 못했다.

아니 거의 절망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하, 어떤 위로의 말을 드려야할지……. 암튼 부장님이라도 기운을 내셔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빌딩 밖으로 걸어 나와 주차장 쪽으로 가려던 윤민수 부장이 깜빡했다는 듯 돌아보았다.

“대표님, 어디까지 가십니까? 가시는 곳까지라도…?”

“아닙니다. 별로 멀지 않은 곳이고, 또 만나서 같이 갈 일행도 있습니다. 어서 가보세요.”

“아!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한 채 공손히 목례를 하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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