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그놈들의 도발(3)
뷔이익, 뷔이익.
슈트 안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확인해 보니 지은이다.
“하아.”
그러자 다시 한번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지은의 전화는 반가웠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오빠를 머릿속에서 맘껏 짓이기고 있던 까닭이었다.
그런 후에 지은의 전화를 받으려니 선뜻 내키질 않았다.
그럼에도 손길은 어느새 통화버튼을 옆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어!”
- ……!
무거운 마음으로 애써 대꾸를 했지만 그녀는 정작 전화를 걸어와 놓고선 아무 말이 없었다.
지태는 전화가 끊겼나 싶어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아직 통화연결 중이다.
지태가 그녀를 불렀다.
“여보세…?”
- 응. 그냥! 그냥 한번 걸어본 거야.
이윽고 지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지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음성에서 촉촉한 물기가 느껴진 까닭이다.
이건 틀림없이 조금 전까지 울고 있었다는 증거.
“울었…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 ……!
다시 또 이어지는 침묵.
지태는 그녀가 분명히 울었다는 것을 베이스로 깔아둔 채 그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인데, 왜 울었어?”
재차 다급하게 묻자 지은의 목소리에는 이제 가녀린 웃음기가 배어 있다.
그래도 여전히 울음 끝의 여운이 남아있어서 목소리는 촉촉이 젖어있었다.
- 그냥 자기가 보고 싶어서! 자기가 문득 보고 싶으니까 순간 마음이 좀 그랬어. 내가 살짝 우울 모드에 빠져 있었나봐.
“정말?”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눈치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태는 믿는 척 해주었다.
지금으로서는 이 말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그녀의 곁으로 달려가 위로를 해주거나 안아줄 상황이 아니라서 더더욱 그랬다.
- 자기야! 나만 보고 싶은 거야? 칫, 왠지 나만 무척 손해 보는 느낌!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남자가 아무 때나 울 순 없잖아.”
- 피이! 누가 울랬어.
“보고 싶다는 건 정말이야. 이건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100% 진심!”
- 어휴, 그래 믿어줄게. 근데 밖이야?
그 와중에도 귀는 밝았다.
지태는 이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여자의 하는 짓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옥상! 바람 쐬러 나왔어. 그러는 지은이는?”
- 과외 공부!
“본사?”
- 응. 실장님이 내준 숙제가 이제 거의 끝나가. 그런 의미로 우리 저녁에 볼래?
지태는 푸핫! 하고 웃었다.
핑계나 구실을 만드는데 있어선 지은을 따라올 사람이 없는 듯했다.
“이따 회사 분위기 봐서 톡 할게.”
- 시간 없어도 꼭 만들엉! 알찌?
일방적인 앙탈이지만 울음 뒤끝에 나온 거여서 지태는 그녀의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녀를 만나 물어보거나 살피면 될 것이다.
지태는 알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전화를 끊었다.
* * *
“어디 갔다 오는 거냐… 요?”
옥상에서 내려와 사무실에 들어서자 조현민이 바짝 다가와 물었다.
습관처럼 하대를 하려다가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급히 존대로 뒤바꾸었다.
“옥상에! 아까 바람 쐬러 갔다 온다고 했잖아요. 근데 왜?”
“손님이 찾아왔다… 요”
“손님요?”
“동구전자 이동구 사장!”
“아, 그래요?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저기.”
조현민은 사무실 맨 뒤편에 위치한 대표의 집무실을 가리켰다.
“무슨 일이시지?”
저번처럼 또 곤란한 일을 부탁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지태는 지레 찜찜했다.
지태가 대표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이동구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를 향해 지태는 약간 장난스러운 동작으로 허리를 넙죽 굽혔다.
“아이고, 사장님! 그간 기체후 일향 만강하셨습니까?”
“나, 원! 여전하네, 그 넉살은!”
이동구 사장이 환한 웃음으로 손을 내밀며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지태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그의 악수를 받았다.
“앉으세요, 사장님.”
“여긴 한 사장의 집무실 아닌가. 자네가 먼저 앉으시게.”
“아, 무슨 격식을 따지세요. 장유유서, 얼른 앉으세요.”
이동구 사장은 허허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를 보니 찻잔이 놓여 있었다.
재차 접대용 차를 권할 이유가 없어서 지태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긴 진짜로 어쩐 일이십니까?”
한가한 양반도 아니고 일부러 괜한 발걸음을 했을 리가 없었다.
지태가 방문 목적을 묻자 이동구 사장은 다시금 껄껄 웃었다.
“지난 번 사기꾼을 잡아준 거에 대한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잖은가. 더구나 사례비도 안 받고 말이야.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해서 인사차 들렀네.”
“일부러 간 것도 아니고 겸사겸사 들렸다가 온 겁니다. 너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으세요, 사장님.”
“그래도 사람으로서 도리라는 게 있는데 그건 아니지. 언제고 우리들한테 식사 한 끼 대접할 기회를 내줘.”
“그게 마음 편하시겠다면 그러죠, 뭐.”
밥 한 끼 얻어먹는 거야 뭐 어떠랴 싶었다.
지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비단 그것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발걸음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긴히 할 말이 있는 듯 이동구 사장은 자꾸 망설이는 눈치였다.
“뭐, 저에게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응, 그게 사실은 말이야. 그니까 그게…….”
* * *
직원들의 이목을 피해 사무실 밖으로 나온 조현민은 연신 혀를 차댔다.
복도 끝에 마련된 빌딩의 공용 휴게공간이었다.
환기를 위해 누군가 열어둔 창문으로 11월의 끝자락에 서있는 제법 기세등등한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혀를 차대는 조현민을 보며 지태가 쓴맛을 다셨다.
“그럼 어떡해요? 형님 같았음 그 양반의 부탁을 단칼에 잘라요?”
지태가 볼멘소리를 내뱉자 조현민의 태도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 사장님, 너를 진짜 무슨 해결사로 본 거 아니냐?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쪼르르…….”
조현민은 지태로부터 조금 전 회사를 나간 이동구 사장의 청탁을 듣고서 열을 내는 중이다.
경기도 군포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동구 사장의 외가 쪽 사촌동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딱히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왔다는데 어쩝니까? 들어주는데 돈이 들어가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지난번에 그 사장님들의 편의를 괜히 봐줬어. 그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니까 너를 알기를 완전히 만능해결사로 본 거다.”
조현민의 말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워서 지태는 토씨를 달지 않았다.
거의 불가능하다 여겼던 시에라리온의 사기꾼을 잡아 사기당한 원금에 더해 정신적 보상금까지 챙겨 받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들 입장에서는 지태가 하느님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터였다.
“근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딱 견적이 나온다. 그 사채업자 새끼들이 공장을 담보로 그깟 돈 3억을 빌려주고는 회사를 통째로 삼키려는 수작이야, 이거.”
이동구 사장이 전해주고 간 이야기의 전말은 이랬다.
그의 사촌동생인 유근영 사장의 천지전자는 보풀제거기와 전기주전자를 생산하는 업체였다.
그중 보풀제거기는 유통 경로를 통해 자체 판매를 하는 경우였고, 전기주전자는 대기업에 OEM방식으로 전량 납품하는 시스템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결제가 주로 어음이다 보니 자금 회전에 약간만 문제가 생겨도 공장은 순식간에 휘청거리기가 일쑤였다.
그동안엔 원청인 대기업에서 3개월짜리 어음을 돌렸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는 일방적으로 6개월짜리 어음을 날려 버리는 통에 가뜩이나 불안하게 지탱하던 자금 유동성에 문제가 생겨버린 거다.
유근영 사장은 급한 마음에 어음을 할인해 급한 불부터 꺼나갔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쌓이고 쌓여있던 자금의 동맥경화는 결국 약한 부위부터 팍팍 터지고 말았다.
유근영 사장은 만사 제쳐두고 이리저리 돈을 꾸러 다니는 게 하루 일과가 돼버렸다.
하지만 손 빌릴 데도 마땅찮은데다가 설령 있다 해도 누구 하나 선뜻 빌려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으로 기댄 곳이 사채였다고 했다.
그런데 운이 좋았던지 강남의 한 대부업체에서 거금 3억을 선뜻 빌려주겠다며 나선 것이다.
물론 공장을 담보로 잡는 조건이었지만, 다른 대부업체들과는 달리 이자도 아주 파격적이었다고 했다.
“글쎄 그게 다 걔네가 흔히 써먹는 미끼라니까. 일단 믿고 돈을 쓰게 만든 다음 나중엔 그냥 쌩까고 날라 버리는 거지. 약속기일을 넘길 때까지 찾지 못하도록 아예 잠수를 타버리는 거야. 이거 걔네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야.”
“이동구 사장님도 그걸 아니까 나한테 SOS를 친 거겠죠.”
“이 새끼들 딱 봐도 조폭 견적이 나와. 그게 아니라면 그런 놈들을 끼고 노는 놈들이던가.”
“어떡하죠, 형님?”
“짐은 네가 떠맡아 놓고 왜 방법은 나한테 물어?”
“정말 의리 없이 이러깁니까?”
지태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자 조현민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다시 돌려 쳐다보며 씩 웃었다.
“기한이 언제까지랬지?”
“앞으로 나흘 뒤.”
“그럼 일단 잠수를 탄 놈들을 찾아내야 뭘 시도라도 해볼 텐데…….”
“작심하고 잠수 탄 놈들인데 스스로 얼굴을 드러내겠어요?”
“안 드러낸다면 일부러라도 드러내게 만들어야지.”
“어떻게?”
“또 다른 호구 등장이요! 하는 거지, 뭐.”
“그 사장님처럼 담보를 맡기고 돈을 빌리고 싶다며 이쪽에서 오히려 미끼를 던진다?”
“당장에 그것 말고 무슨 수라도 있나?”
하긴 그렇다.
그나저나 우리 형님 천잰데?
지태가 살짝 감동을 먹었다는 시선으로 조현민을 쳐다보았다.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듯이 조현민이 괜히 으스댔다.
* * *
다른 직원들에 앞서 지태는 퇴근시간을 조금 앞당겼다.
지은을 만나기 전에 유근영 사장에게 돈을 빌려줬다는 문제의 강남 대부업체를 찾아가볼 생각이었다.
하나 파이낸스.
처음엔 건달들이 차린 허접한 사무실을 연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10층 규모의 빌딩 중 3층 전관을 그들의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제법 그럴싸한 간판까지 내걸어놓았다.
사무실의 출입문은 카드키로 열고 들어가는 구조였다.
지태는 카드키 홀더 바로 위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조금 뒤 용건을 묻는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 어떻게 오셨어요?
“돈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 개인이세요?
아무래도 뭔가 구린 데가 많은 곳이지 싶었다.
시시콜콜 물어가며 신중을 기하는 태도를 보니 딱 감이 왔다.
지태는 소리 나지 않게 쓴맛을 다신 후 냉큼 대답을 해줬다.
“남양주 마석에서 가구 공장을 하는 사람입니다. 공장을 담보로 돈을 급히 융통하려고 왔는데요.”
다행히 지태의 임기응변은 그녀에게 먹힌 모양이었다.
- 네, 잠시만요.
조금 뒤에 삐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됐다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지태가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있던 여직원이 제 깜냥엔 상냥한 척 인사를 해왔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호구가 제 발로 기어온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손님은 왕이라는 말을 갖다 붙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거다.
아니지, 호구는 왕이다, 라는 말이 더 맞는 건가?
아무튼 지태는 그녀에게 화답하듯 가벼운 목례를 해주고는 파이낸스 사무실을 빠르게 스캔했다.
30평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사무실에 달랑 이 여직원 혼자뿐이었다.
지태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여기 하나 파이낸스의 사장님 되십니까?”
“어머! 제가요?”
그럼 그게 나겠냐?
지태가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자 여직원은 입을 막고 까르르 웃었다.
“이 넓은 사무실에 아가씨 혼자 있으니 하는 소리죠.”
“아! 다들 영업 나가셨어요.”
“사장님도?”
“네! 요즘은 대부업도 경쟁시대라서 열심히 발로 뛰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힘들어요. 일단 좀 앉으시겠어요.”
여직원이 소파를 가리켰다.
자리를 잡고 앉자 마실 것을 물어왔지만 지태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일단 간만 보러온 것이어서 몇 가지만 확인한 후에 곧바로 나갈 생각이었다.
용건이 더 급했으므로 지태는 여직원을 맞은편에 앉게 했다.
“대출 상담을 하려면 담당자 분이나 사장님이 계셔야 할 텐데…….”
그러고는 몹시 급한 처지임을 보여 주려고 지태는 일부러 빈곤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