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그놈들의 도발(2)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셨어요, 대표님?”
“티 났어요?”
지태가 태연하게 물었다.
“많이 났습니다. 무슨 걱정거리 있어요?”
“그런 거 없어요, 전무님.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고기반찬을 혹시라도 어머니 혼자 다 드실까, 그거 걱정하느라…….”
‘저걸 농담이라고?’
조현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졌다’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박수연이 걸어오다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분 다투셨어요?”
“우리가 애냐, 다투게?”
조현민이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님, 말구요.”
말 한 마디마다 결코 지려고 하지 않는 박수연이었다.
확실히 조현민이 그동안 잘 키워놓은 것 같다.
연거푸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조현민을 보면서 지태가 피식 웃었다.
“수연 씨! 전무님이야, 아님 나야?”
볼일 보러 왔으면 둘 중 하나에게 어서 용건을 말하라는 거였다.
“아, 대표님께 용무가 있어요.”
“응!”
지태가 끄덕이자 박수연이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지난번 우리가 보내 준 오퍼시트에 대한 케냐의 컨펌이 떨어졌어요. 그대로 진행해도 좋답니다.”
“좋아요. 이건 박 대리가 계속 맡아서 담당하는 걸로!”
“넵!”
박수연이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돌아갔다.
지태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다시 굳어졌다.
이런 모습을 계속 보이고 있으면 다시 또 조현민의 간섭이 나올 것이다.
지태는 일부러 길게 기지개를 켰다.
몸 컨디션이 안 좋아 잠시 바람이나 쐬고 와야지 하는 예비 신호를 조현민에게 보내는 거였다.
지태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걸어 나가자 조현민이 흘깃 바라보았지만 더는 간섭하거나 참견하지 않았다.
* * *
오늘도 경영지원실장 이낙규는 숙제만 한가득 내려놓고 방을 나갔다.
지은은 회장실 바로 옆에 자리한 소회의실에 반강제로 소환당한 채 고문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경영수업의 일환으로 평일 오전에는 무조건 4시간씩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틀어박혀 경영지원실장이 내준 숙제와 씨름을 하다가 점심 무렵 그에게 컨펌을 받고나서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날의 학습 태도와 평가치가 곧장 아버지인 임상만 회장에게 보고되는 까닭에 농땡이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오늘 경영지원실장이 내려놓고 간 문서더미는 그룹의 전 계열사 재무제표 상황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대외비였다.
계열사의 전반적인 경영 실태를 살피고 부실 경영의 흔적이 보이는 곳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 먼저 꼼꼼히 따져 보라는 게 오늘 그녀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아울러 자신이 경영의 총책임자라면 이럴 때 어떤 조치 및 처방을 내릴 것인가도 생각해두라고 했다.
“후우!”
지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류를 살피는데 있어 자신의 머리가 따라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이비리그의 하나에 속하는 명문 사립대에서 MBA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자신이었다.
마음먹고 집중을 한다면야 크게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없을 터였다.
다만 경영에 별 관심이 없고, 이렇듯 억지 춘향 격으로 이곳에 앉아있다 보니 집중할 수 없을 뿐.
그러니 자꾸 해찰만 하고 싶었다.
지은은 만지작거리던 스마트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 뭐하고 있을까?’
생각만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그 자체만으로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지은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지은이 돌아보았다.
“어때, 좀 할 만하냐?”
아버지인 임상만 회장이었다.
“아빠!”
“어허, 회사에선 회장님이라고 부르래도 그런다!”
지은은 임상만 회장의 뒤를 살피는 시늉을 했다.
“피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리고 내가 뭐 정식 임원인가? 명함만 걸어놓았을 뿐인 이사잖아요.”
지은의 투정에 그저 허허 웃고 말던 임상만 회장이 의자 하나를 뒤로 빼내어 앉았다.
“잠시 앉아 봐라.”
지은은 잠시 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더니 몰래 찡그렸다.
오늘따라 진지하게 나오는 폼이 왠지 수상쩍은 까닭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이러는지 몰라도 어물쩍 대답하고 넘어가기엔 애당초 글렀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어요?”
“어때? 이제 어느 정도는 부경그룹 전반에 대해 감이 잡히긴 하냐?”
“……!”
“말해 봐, 어서.”
임상만 회장의 은근한 재촉에 지은은 정색하다가 픽 웃었다.
“아빤, 나를 맨날 어린애로만 보나봐. 내가 흔들렸던 건 2~3년뿐이었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스물 전후.”
이번엔 임상만 회장이 쓰게 웃었다.
그 무렵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지금껏 선입견에 사로잡혀 딸자식을 바라보았던 게 미안했다.
지은이 그 당시 방황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재벌가의 사모님답지 않은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던 지은의 어머니는 어느 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고 말았던 것이다.
지은은 견딜 수 없는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녀는 아버지인 임상만 회장을 선택했었다.
남편으로서 왜 최선을 다하지 않고 어머니가 죽음에 내몰릴 때까지 방치, 방관만 했느냐는 억지 허물을 뒤집어 씌워버렸다.
그렇게 원망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뾰족한 슬픔과 어떤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었다.
지은의 방황은 그녀의 말마따나 스물을 넘겨서까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학업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비난과 함께 새로운 돌파구로 학업을 선택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졸업 때까지 그녀의 학업 성적은 늘 상위권에서 맴돌았다.
임상만 회장은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이렇듯 반듯하게 잘 성장해준 지은이 참으로 대견하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더욱더 지은이를 애틋하게 여기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젠 그 녀석들과는 안 놀아?”
“놀긴요. 그 오빠들 하는 짓이 얼마나 유별났어요. 그게 궁금해서 별장 파티에 몇 번 구경하러 간 게 다였고. 근데 유치하더라고요. 내 입맛에 안 맞아서 그 후론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그건 네 오빠랑은 비교가 되는구나.”
“오빠가 왜요?”
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오자 임상만 회장은 그걸 진짜 몰라서 묻는 것이냐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짓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임상만 회장은 고개를 내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다. 자꾸만 이상한 소문들이 내 귓가에 들려와서.”
“뭐가요? 가령 어떤 것들?”
“아니래도 그런다.”
지은이 집요하게 되묻자 임상만 회장은 짐시 목청을 높이는 척했다.
그러고는 얼른 자신이 이곳을 찾아온 용건으로 직행했다.
“얘, 지은아.”
“예, 아빠.”
“너 요즘 지용이 소식 들었냐?”
“지용 오빠요?”
“그래. 얼마 전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더구나.”
“……!”
순간 지은은 얼음이 되어 아빠를 쳐다보았다.
임상만 회장이 갑자기 오지용을 언급한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지용은 현 야당인 미래 한국당의 최고 위원이자 당내 최대 계파를 이끌고 있는 오신환 의원의 외아들이었다.
6선으로서 차기 대선주자로 끊임없이 회자되는 거물 정치인의 아들인 오지용의 귀국 소식은 지은도 귀동냥을 통해 들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왜 갑자기 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지은은 수상한 눈길로 다시 임상만 회장을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민감하게 바라봐. 어제 오 의원과 안부전화를 주고받다가 얼핏 지용 군의 이야기가 나와서 네게 귀띔을 해주는 건데.”
“아직 미련 못 버린 건 아니죠?”
“무슨 미련?”
“지용 오빠랑 나를 엮으려는 거.”
“이놈이 말을 해도! 그리고 그만한 신랑감이 어딨다고 그래?”
“누차 말씀 드렸지만, 난 정략결혼 같은 거 안 해요. 내 미래를 함께할 사람은 내가 선택해요. 가문이니 뭐니 하는 족쇄차고 팔려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요.”
“이놈이, 정말! 그래서 요즘 한 머시기라고 하는 이상한 놈과 어울려 다니는 거야?”
“헐!”
지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임상만 회장을 노려보았다.
“요즘 내 뒷조사도 시켰어요, 아빠?”
지은이 쏘아붙이자 임상만 회장은 못마땅한 헛기침을 내뱉으면서도 부인하지는 않았다.
“난 요즘 젊은 애들의 트렌드라고 하니까 원나잇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따질 생각은 없어. 너도 성인이니 그쯤 즐기는 거야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음까지 내주면서 만나는 경우라면 다르지. 그런 건 애초에 싹을 잘라야 해. 나중에 더 큰 화근덩어리로 변하기 전에 미리 싹을 잘라야 한다는 얘기야!”
“난 원나잇 같은 거는 취미도 없거니와 내 인생에 아빠가 개입하는 것도 싫어요.”
“뭐야?”
임상만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눈을 부라렸다.
노기가 충천한 얼굴이었다.
지은 역시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굴하지 않겠다는 듯 마주 노려보았다.
임상만 회장은 자신이 한번 마음먹은 것은 기어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여기에서 밀리게 되면 앞으로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요구와 개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부녀지간이라 해도 끊어 낼 것은 미리 단호하게 끊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모든 건 아빠 말대로 따르겠어요. 경영에 참여하라 하시면 따를 거고, 집에만 콕 박혀 얌전히 지내라면 그 또한 따를 용의가 있어요. 하지만 내 인생에 대해서만큼은 개입하지 말아주셨음…….”
지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철썩!
급기야 임상만 회장의 분기가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내지른 손바닥이 지은의 뺨에 그대로 꽂혔다.
엉겁결에 뺨을 때려 놓고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임상만 회장은 곧 냉정해졌다.
이깟 일에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흔들리게 되면 지은을 결코 휘어잡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임상만 회장은 다부진 목소리를 냈다.
“그럼 그놈이 다칠 거다. 내가 그놈을 가만히 놔두질 않아!”
못을 박듯 강하게 내뱉고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묵직한 콧김을 뿜어 댔다.
그렇게 매서운 시선으로 잠시 노려보던 임상만 회장은 몸을 홱 돌렸다.
서너 걸음을 겨울 찬바람처럼 내딛더니 우뚝 멈추며 다시 뒤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마무리를 하듯 아주 큰 대못을 지은의 가슴팍에 박았다.
“너 이놈, 내 말 명심해. 그놈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면!”
지은은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임상만 회장의 뒷모습을 이를 악물며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 * *
테헤란로 대로변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온 12층짜리 빌딩의 옥상이다.
지태의 한스무역은 이곳 5층에 자리 잡고 있다.
무겁게 짓누르는 생각들을 털어 내려 올라왔지만 정작 답은 보이지 않고 자꾸 한숨만 나왔다.
자신을 끊임없이 해하려는 놈들의 윤곽이 확실하지 않은 때에도 이건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껍데기를 벗고 밖으로 기어 나오자 놈들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웬만한 사람보다 간덩이가 두어 배쯤은 더 클 거라고 자신했던 지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두렵고 떨렸다.
그만큼 놈들은 강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선뜻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강성원은 놈들의 사주를 받은 청부인들에게 칼까지 맞았다.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비록 강성원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심장이 떨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찢어질 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괴로웠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 강성원에게 미안했었다.
“개새끼들!”
지태의 악문 입술 사이에서 절로 욕설이 새어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