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그놈들의 도발(1)
지은은 아버지 임상만의 강요를 못 이겨 요즘엔 본가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녀의 승용차로 본가 근처까지 동승했다가 지태는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에서 빤히 바라보는 지은의 눈빛엔 뭔가 아쉬움이 그득했다.
“오늘 같은 날은 자기랑 함께 하고 싶은데…….”
지은이 투정부리듯 말했다.
지태가 창문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그윽하게 웃었다.
“들어가, 그만. 내일 아침 일찍부터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어휴, 회사가 조금만 더 커지면 아예 주말부부……. 아니다, 주말연인이 되겠네.”
지은이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투정을 부리자 지태가 얼른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지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래, 이걸로 오늘은 용서할게. 대신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전화해 주기! 알?”
“알!”
지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은은 손을 흔들고는 천천히 차를 전진시켰다.
그녀의 승용차가 눈에서 멀어지자 지태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임경남…….”
레스토랑에서 송영완과 마주친 이후 지태의 머릿속을 내내 떠도는 이름이었다.
허영만과 송영완만으로는 도무지 나오지 않던 해답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임경남의 친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로소 뭔가 좀 풀려 가는 느낌이었다.
‘그날의 치욕이 나를 기어이 죽이고 싶을 만큼 컸던 것인가?’
지태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그날이 어쩌면 임경남이 살아온 일생일대 최고의 치욕일 수도 있었을 거다.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모두가 자신을 떠받들어 주어 오로지 귀하게만 커왔던 그였다.
그런 임경남이 개돼지보다도 못하다고 여긴 흙수저에게 생전처음 그런 수모를 당했으니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치욕으로 남아 있을 수는 있겠다.
그렇다 한들 그 이유만으로 살의까지 품는단 말인가.
거기에 동조한 허영만은 또 뭔가.
퇴사하던 날 상무집무실에서 속 시원하게 욕설 한번 내질렀던 그 일 때문에?
아니다.
놈은 매우 약삭빠른 놈이다.
그 정도의 원한만으로는 만에 하나 잘못되면 인생을 조질 위험성까지 감수하면서 임경남에게 동조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송영완 같은 경우엔 자신과 악연이 있다거나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지 않은가.
단지 의리 때문에?
그것도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바로 뒤따라올 어떤 금전적 이익!
필리핀과 케냐에서 입은 골드웰과 선우글로벌의 손해를 일정부분 임경남이 보전해 줬거나 그에 부합하는 보상을 해주었음이 틀림없었다.
“재벌의 배포가 확실히 다르긴 하네. 나 하나 잡는 걸로 그런 거액을 선뜻 날릴 만큼.”
지태의 입에서 곧 쓴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심각해졌다.
쓴웃음이라도 결코 웃고 넘어갈 상황은 아니었다.
선전포고도 없이 누가 전쟁을 걸어왔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비로소 그 실체를 알게 됐다.
바로 부경 그룹의 후계자인 임경남이다.
그리고 그를 지원하는 세력으로는 허영만과 송영완이 있다.
하나같이 만만찮은 놈들이다.
말하자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혼자서 그들을 전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살해 위협이야 전후좌우 잘 살피면서 대처를 하면 된다지만, 만에 하나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사업의 앞길을 방해하고 나온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나.
거기엔 아직 이렇다 할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고, 지금 당장엔 그것을 막아낼 용기나 자신감도 없었다.
임경남이 마음먹고 덤빈다면 한스무역 같은 구멍가게 하나 죽이는 것쯤은 손톱 끝으로 벼룩을 눌러 죽이는 일보다 더 간단할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지태는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후우!”
지태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언덕을 내려왔다.
부촌이라 그런지 골목으로 올라오는 택시 한 대를 보지 못했다.
승용차로 몇 분이면 올라갔던 언덕길을 터벅터벅 한참을 내려오다가 비로소 대로변에 다다랐다.
택시는 다행히 금방 잡혔다.
지태는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해주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쉽지 않은 전쟁을 앞둔 병사의 암담함이 다시금 밀려들었다.
막막한 생각에 갇혀 암담한 어둠속으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을 때 그를 부르는 택시기사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지태가 눈을 뜨고 바라보자 기사는 룸미러에 대고 턱짓을 해댔다.
“손님의 핸드폰이 울리는 것 같습니다만…….”
그 소리에 슈트 안주머니를 살펴보니 그제야 진동이 확실히 느껴졌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액정 화면을 확인하는데 모르는 전화번호가 떠 있다.
“여보세요, 한지탭니다.”
- 안녕하세요. 저, 아름이에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속사포처럼 자신을 소개하는 바람에 지태는 미처 그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다.
“미안한데, 누구시라……?”
- 아름, 김아름이라고요, 지태 씨.
강성원의 여친이었다.
지태는 순간 머쓱해졌다.
“아, 미안해요. 너무 뜻밖이라.”
- 지금 성원이 오빠 폰을 몰래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지태 씨한테 전화하는 거예요.
연락을 해온 것이 뜻밖이라는 지태의 말에 김아름은 동문서답하듯 전화번호를 알아내게 된 경유를 그렇게 설명해 줬다.
하지만 지태는 이처럼 비밀스럽게 전화를 걸어온 이유가 더욱 궁금했다.
“왜요?”
- 오빠가 알리고 싶지 않아 했거든요.
답답했다.
앞뒤 자르고 제 할 말만 해대는 통에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뭘 말입니까? 뭘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 다친 거. 자기 다친 걸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지태 씨가 걱정할 거라고.
“다, 다쳐요? 성원이가 다쳤단 말입니까?”
- 저, 그게 사실은…….
* * *
가락동에 위치한 경찰병원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지태는 곧장 김아름이 알려준 병실로 올라갔다.
2인실이었는데, 지태가 도착하기 전 김아름은 지레 자신과의 통화사실을 실토를 했던 모양이었다.
강성원은 반쯤 세워진 침대에 등을 기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
지태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흘기기부터 했다.
걱정을 많이 하면서 왔는데, 막상 위중하지 않은 모습을 보니 속으로 안심이 되어서 그랬다.
머리가 깨졌는지 붕대를 감고 있었고, 허벅지에도 압박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칼을 맞아 꿰맨 듯했다.
“잘한다, 이 자식아!”
지태는 강성원에게 한마디를 툭 날리고는 시선을 돌려 김아름을 쳐다보았다.
누구보다 크게 놀랐을 김아름이었다.
위급할 정도는 아니다싶은 강성원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김아름을 달래줄 타이밍이었다.
“많이 놀랐죠? 그래서 싸움을 못하면 내가 경찰하지 말라했는데.”
내뱉고 보니 좀 그런가?
지태는 이걸 농담이라고 뻔뻔하게 내뱉은 자신의 말이 후회가 됐다.
김아름이 다행스럽게도 맑게 웃었다.
“우리 오빠도 싸움은 제법 해요. 지태 씨가 몰라서 그렇지.”
결혼식만 올렸다면 부창부수라고 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태는 다시 강성원을 흘기며 물었다.
“어쩌다 그랬냐? 조폭들 싸움판에라도 끼어든 거야?”
전화상으로 김아름에게 부상의 이유까지는 물어볼 새가 없었던 데다가 강성원이 형사니까 당연히 그런 식으로 유추한 거였다.
강성원이 쓰게 웃었다.
그러자 김아름이 대신 말해 주었다.
“조폭 싸움에 끼어든 건 아니고요. 양재동에서 당했대요.”
“양재동? 거긴… 왜?”
“선우글로벌과 골드웰이라는…….”
“아름아, 잠깐!”
강성원이 김아름의 말을 급하게 잘랐다.
그러고는 흘깃 지태의 눈치를 살폈다.
지태는 이제 어느 정도는 사태의 전말을 꿰뚫어 본 듯했다.
선우와 골드웰이란 회사명이 나오는 순간 분명히 놈들과 연관이 있다고 이미 단정 지어버린 표정이었다.
“양재동에 뭐가 있었는데?”
지태가 침대로 좀 더 바짝 다가가 보조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놈들 아지트!”
“그놈들을 계속 뒤쫓고 있었던 거야?”
“내가 뭔가에 한번 꽂히면 끝을 보는 성격이잖아.”
“그래도 그 문제는 나랑 먼저 상의를 했어야지. 걔들이 어떤 새끼들인지 알잖아. 너 혼자 감당할 놈들이 아니야.”
지태는 미안하고도 안타까운 마음에 목청을 높였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칼침 놓은 건 그 새끼들이냐?”
“이미 눈치를 챈 것 같더라. 마치 내가 거기에 나타날 줄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어.”
“누가, 걔네가 직접 칼질을 했어?”
강성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전문 칼잡이들. 딱 봐도 조직 냄새가 나는 놈들이더라.”
“이 새끼들 봐라? 그럼 네가 광수대 형사인 줄 알면서도 칼질을 했다는 얘기네.”
“그 새끼들한텐 철옹성 같은 백그라운드가 있는데 뭐가 무섭겠냐. 손익계산을 따져 보니 밑지는 장사가 아니겠다 싶었던 거지.”
“이런 시발 놈들!”
지태가 무심코 욕설을 내뱉고는 얼른 김아름을 돌아보았다.
“말씀들 나누세요. 저는 잠시 자판기에서 마실 것 좀 빼올게요.”
그녀는 엉겁결에 욕을 내뱉은 지태가 무안해할까 봐 애써 못들은 척 딴청을 피우더니 이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어디 애들인지는 모르고?”
“조폭 새끼들이 나 어디 식구요, 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약간 의심스러운 새끼들은 있어.”
“어떤 새끼들?”
“언젠가 너희 회사로 조직 애들이 쳐들어왔다고 했었지?”
지태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호건설 이현욱이 복수 차원에서 보내온 돈두파란 놈들이었다.
“걔들이 의심스러워?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양재동 그 아지트로 대호건설 이현욱이가 들어가더라. 그 새끼도 놈들의 멤버가 확실하다면…….”
“음! 그렇담 이제 퍼즐이 좀 맞춰지네.”
지태는 어느 정도 확신이 드는 것처럼 이를 악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을 본 강성원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야! 설마 너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제발 부탁인데 허튼짓하지 마라. 나 퇴원하걸랑 광수대 인원들 전부 다 끌고 가서 그 새끼들을 몽땅 다 조져 놓을 테니까 넌 절대…….”
“안 해, 절대 안 해! 그니까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나 잘해, 인마!”
“너 그 말 진심이지?”
강성원이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 그렇다니까! 내 배에는 무슨 철판이라도 깔아 놨냐. 내가 너처럼 그 미친 짓을 하게.”
지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끄덕이며 피식 웃어 주었다.
하지만 강성원은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풀지 않는 듯 보였다.
* * *
사무실은 아침부터 활기를 띠고 있었다.
전 직장에서 자신들이 관리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오더들이었다.
하지만 새 보금자리에 터를 잡은 이후 회사 브랜드의 프리미엄 없이 오로지 제 힘과 노력만으로 따낸 실적들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무실에 열의가 넘쳐흐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전화기를 붙들고 상담을 하거나 오퍼시트를 검토하느라 바쁜 직원들을 보면서 조현민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새 식구를 맞고부터 회사는 비로소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제법 회사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예전 선우글로벌 시절 영업부 하나를 똑 떼어내 이곳에 가져다 놓은 기분도 들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돌려 지태를 흘깃 바라보던 조현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모습이 왠지 좀 이상했다.
모니터에 시선은 박아 두고 있는데, 딱히 거기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대표님!”
제법 큰소리로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다.
조현민은 다시금 지태를 불렀다.
“한 대표님! 야, 한 대표!”
처음엔 강하게, 두 번째로 부를 땐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그제야 지태가 돌아보았다.
“불렀어요, 형니, 아니 전무님?”
지태 역시 엉겁결에 형님이라고 호칭을 하려다가 얼른 바꿨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불러도 대답이 없냐… 요?”
직원들 눈치를 보면서 존대를 하려니 이런 사적 대화를 나눌 땐 영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