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제 밥값은 하는 사람들(2)
눈치를 챈 유성락 부회장은 비웃음을 섞어 다시 물었다.
“내가 잘못 말한 건가? 그래서 속으로 조소를 날리고 있는 거야?”
“회장님께서 짐작하시는 바가 틀렸다는 걸 시위하는 중입니다.”
“내 짐작이 틀렸다? 그럼 자네의 생각은 뭔데?”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는 주의입니다, 저는!”
“그게 다야? 원, 싱겁기는!”
유성락 부회장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지태가 낮고 잔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창업을 한 이후 지금까지 대로가 아닌 샛길만을 골라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턴 처음 창업할 때 가졌던 본연의 자세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물론 걷다 보면 다시 또 가끔은 샛길로 빠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기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초심만큼은 절대로 버리지 않을 작정입니다, 회장님.”
“……!”
유성락 부회장은 가만히 경청했다.
“제가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 또한 장담할 수는 없겠습니다. 아직까지 이 나라에서 기업을 하려면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를 걸어야 할 때가 많을 테니까요. 지금껏 일가를 이룬 대기업들이 그러했듯 저도 편법, 불법 등 온갖 꼼수에 휘말릴 수도 있을 거란 이야깁니다. 다만 일정한 선이나 도를 넘는 일은 없도록 할 겁니다. 적어도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빼면서까지 악랄한 방법은 쓰지 않을 거라는 건 장담할 수 있습니다.”
“지나친 자기 비호이고 궤변이로구먼.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게 벌어서 어찌하겠다는 건데?”
“재벌의 새 이정표를 세우고 싶습니다.”
지태가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가령 어떤 거?”
“지금 일가를 이루고 있는 재벌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겠다면 대답이 되겠습니까?”
“그렇담 지금 일가를 이룬 재벌들은 다 나쁘다는 말이네?”
“존경받는 기업인으로서의 재벌은 제가 기억하기론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정반대라면, 자넨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이건가?”
“존경보다는 사회에 많은 부분을 기여했다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가진 자의 책임을 다하는 그런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입니다.”
“허허. 그 꿈이 이루어지려면 지금보다 더 많이 개처럼 뛰어야겠구먼, 그래. 훗날 정승처럼 살려면 말이야.”
“……!”
“그래서 지금 나더러 자네가 개처럼 돈 버는 일에 발을 담가달라는 건가? 이제 겨우 개처럼 살아온 인생에서 탈출한 사람한테?”
“…….”
지태는 대답을 미루어둔 채 유성락 부회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개처럼 돈 버는 일은 제가 다 하겠습니다. 다만 회장님께서는 지나치게 정도를 벗어나 초심을 잃지 않도록 저의 중심을 바로 잡아 주는 일만 해주십시오. 그게 제가 드리는 부탁입니다, 회장님.”
지태가 간절함을 담은 눈빛으로 유성락 부회장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지태의 눈빛을 읽듯 멀건이 쳐다보던 유성락 부회장이 마침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대목에서 뭔가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는다면 두들겨 팰 눈빛인데 그래. 그러지, 내 생각을 말해주도록 하지.”
“…….”
지태는 이제 어떤 기대에 찬 눈빛으로 유성락 부회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 몸값은 아주 비싸다네. 한스무역의 규모로는 내 연봉을 맞춰 주지 못할 거란 말이야. 물론 나 또한 벼룩이 간을 내먹듯 이 조그만 회사에서 월급이나 뜯기엔 민망한 처지고…….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이러면 어떨까?”
“예, 말씀하시지요.”
“월급 받는 상임고문은 사양함세. 대신 자네의 고충이나 가끔 들어주는 비 상임고문은 어떻겠나? 아, 물론 자네가 초심을 잃어 간다 싶으면 내가 나서서 매운 채찍질도 해주도록 하고!”
이제 됐다!
그렇게 속으로 외친 지태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듯 허리를 깊숙이 굽혀 큰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허허, 이거 참!”
유성락 부회장의 입가에서 기분 좋은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박수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전 직원들 모두가 지금껏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유성락 부회장 같은 거물이 이 조그만 회사에 찾아와 대표와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중인데 일손이 제대로 잡힐 턱이 있겠나.
그나저나 지태는 감격에 겨운 얼굴이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찔끔거릴 정도였다.
이 시대를 사는 샐러리맨들의 우상이요,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남은 유성락 부회장이 한스무역에 힘을 보태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어찌 감동받지 않을 것이며 큰 경사가 아니겠는가.
한스무역으로서는 오늘 드디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날이었다.
* * *
“왜 이리 기분이 좋은 거야? 바쁘다는 핑계로 내 얼굴 못 본 것이 그리 좋았어?”
꼭 사흘 만에 얼굴을 보는 지은이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귀여운 앙탈이라면 앙탈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진짜로 바빴어.”
지태가 지은의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달래 주었다.
“피이! 얼마나 바쁜데 내가 직접 찾아오겠다고 해도 발걸음을 막아? 자기, 나한테 애정이 식은 거지?”
“식기는 뭘 식어. 얼마 전 우리 회사에서 새 식구들을 맞았잖아.”
“그럼 새 식구들한테 소개하기엔 내가 부족하고 창피한 거야?”
지태의 변명에도 지은은 여전히 깐족거렸다.
제 딴엔 지태의 애정을 확인하는 차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자, 그만 하시고 식사 주문이나 먼저 하시죠, 아가씨!”
더 이상 받아 주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지태는 얼른 지은의 말을 끊으며 웨이터를 불렀다.
모처럼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케냐에 있을 때 난생처음 송아지스테이크를 먹어 봤어. 한편으론 어린 송아지를 먹는다는 게 좀 짠하긴 했는데 이거 생각보다 엄청 연하고 맛있더라.”
그러니까 저녁 메뉴로 그것을 시키자는 말이었다.
지은은 별다른 토씨를 달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남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지금은 뭐든 들어줄 수 있다.
사랑을 한창 꽃피우는 시기.
지태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었고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그를 닮고자 하는 지은의 마음이 곳곳에서 투영되는 것은 아주 당연했다.
“새로 맞이한 사람들은 회사에 적응 잘하고 있어?”
포크로 고기 한 점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던 지은이 물었다.
“200%!”
“어머, 그 정도야?”
“날마다 나를 놀라게 만들어. 지금까지 새 식구들이 따낸 순수 오더만 해도 벌써 200만 달러에 가깝다니깐.”
“우와! 자긴 인복이 많은 사람인가 봐.”
지은이 좀 오버한다 싶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재계 서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경 그룹 같은 곳에서 200만 달러야 그야말로 껌 값도 안 되는 매출이겠지만, 한스무역은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회사가 아니던가.
그것만 해도 대단한 실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게 전부 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새 식구들이 올린 실적이라 그렇다.
“금방 재벌 되겠다, 자기.”
지은이 히죽 웃었다.
“오버하긴. 그게 조금만 더 지나치면 비웃음이라는 거 알지?”
“어머, 어머! 지태 씨야 말로 오버 좀 하지 마. 난 그저 순수하게 축하하려는 것뿐…….”
그때였다.
“어? 너, 지은이 아니냐?”
누군가 등 뒤에서 지은의 말을 끊으며 알은 체를 해왔다.
말을 내뱉던 지은은 물론 지태 역시 뜻하지 않은 사내의 참견에 고개를 돌렸다.
“야, 맞네, 지은이!”
그녀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반갑게 알은 체를 해오는 사내에게 지은은 큰 거부감을 품지 않는 눈빛이었다.
“어, 영완 오빠!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레스토랑이니까 당연히 식사하러 왔지. 아, 쏘리! 데이트 중인데 내가 방해했나?”
송영완은 사과를 하듯 지태를 향해 살짝 눈인사를 해 왔다.
지태가 앉은 채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받았다.
“방해를 한 건 맞는데 오빠니까 봐줄게. 참, 인사해. 이쪽은 내가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남친, 한지태 씨. 그리고 이 오빠는…….”
“송영완입니다. 골드웰 인터내셔널 기획실장입니다.”
송영완은 지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을 먼저 소개하며 지태에게 손을 내밀었다.
‘골드웰?’
지태가 순간 흠칫 놀라는 눈빛으로 송영완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내 손이 부끄럽습니다, 한 대표!”
그는 이미 지태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예, 한지탭니다. 근데 예전부터 저를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지태가 의문을 담아 물었다.
물론 골드웰 측의 오더를 받아 필리핀에 다녀온 사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이야 보고를 받았을 테고, 또 그런 연유로 알고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름을 듣자마자 예전부터 아주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니까 하는 소리였다.
송영완은 어색한 듯 괜히 헛웃음부터 터뜨렸다.
“알죠. 한 대표야 워낙 유명한 분이 아닙니까. 물론 저희 골드웰이 거기에 기여한 바가 결코 작진 않지만. 여하튼 한 대표의 이름을 듣는 순간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송영완이 그런 식으로 변명을 해대며 얼렁뚱땅 위기를 모면했다.
지태는 곧 그의 변명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굴었다.
강성원이 몰래 탐문한 바에 의하면 이놈은 필리핀과 케냐에서 자신의 죽음을 사주한 배후라고 생각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럴 때 그것을 자신이 눈치를 채고 있는 듯이 행동한다면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달아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또 다른 흉계를 꾸밀 것이고.
이놈을 긴장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지태가 송영완의 악수를 받았다.
“아, 그렇군요. 그나저나 인사가 늦었습니다. 신생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오더를 믿고 맡겨 주신 점,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뭘요. 감사의 뜻이야 오히려 우리가 표해야지.”
송영완은 악수하던 손을 떼어내고는 지은을 바라보았다.
“넌 어째 갈수록 더 예뻐지는 것 같다? 한 대표처럼 멋진 남자를 만나서 그런 건가?”
“피이, 나야 원래 예뻤어! 그나저나 오빠도 더 멋있어졌다. 요즘 뭐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좋은 일은 뭐! 암튼 나중에 보자. 저쪽에 동행한 손님이 있어서. 한 대표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한번 보십시다.”
그냥 해보는 소리일 거다.
나중에 밥 한번 먹자는 사람치고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 놈을 못 봤다.
같이 얼굴 맞대고 밥 먹을 생각도 없긴 하지만.
그사이 지은에게서 시선을 거둔 송영완은 지태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지태도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남발하며 손을 맞잡았다.
“그러죠. 언제 기회를 봐서 감사의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뭐, 그럽시다. 밥값이야 누가 내든!”
송영완은 레스토랑의 홀을 가로질러 제자리를 찾아갔다.
“어떻게 아는 사람이야?”
“응. 울 오빠 친구야. 대학 때부터.”
“임경남 사장의 친구?”
“결혼 전만 해도 아주 날라리 중에서도 상날라리였는데 지금은 맘을 좀 잡았나봐. 뒷구멍으로는 아직도 그러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지은이 흘린 뒷말의 뉘앙스는 꼭 개 버릇 남 주겠느냐고 하는 것 같았다.
지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선을 돌려 송영완이 앉아 있는 곳을 흘깃 바라보았다.
허영만에 송영완, 거기에 임경남까지 더하니 뭔가 그림의 윤곽이 잡히는 것도 같았다.
‘결국 그거였던가.’
지태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본 지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태 씨, 혹시 또 오해하는 거야? 나 영완 오빠랑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냐. 이현욱과는 전혀 다른 케이스라고.”
지태의 한숨이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오인한 지은이 변명을 해왔다.
지태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왜 또 오버하고 그래? 누가 의심을 하고, 오해를 했다고.”
“근데 웬 한숨?”
“먹은 게 체했나봐. 속이 더부룩하면 가끔 이럴 때 있어. 한숨을 쉬어대는 버릇.”
“피이, 정말 변명도 가지가지다.”
지은이 밉지 않게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