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93화 (93/272)

093화. 새 식구들(3)

“네가 어제 퇴근하면서 그러지 않았어? 새 식구를 맞으러 간다고 말이야.”

“아, 그거!”

지태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었다는 듯 기가 차게 끌끌 웃었다.

그러곤 씁쓸하게 내뱉었다.

“보기 좋게, 아주 깔끔하게 발로 차였어요, 형님.”

“뭐어, 차여? 도대체 누구한테 차였다는 말이야?”

“있어요, 그런 분!”

“그런 분?”

조현민이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분’이라고 극존칭을 붙인 걸 보면 나이 어린 친구는 아닌 듯싶었다.

좀 더 물어보고 싶었는데 지태는 이미 더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조현민이 쓴맛을 다셨다.

바로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박수연이 출근하고 있었다.

조현민이 오늘은 다들 별일이라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뭐냐? 수연 씨는 왜 또 이렇게 일찍 출근했어?”

“오늘 새 식구 맞는 날이라 그런지 잠이 통 안 와서요. 여기가 설레서.”

박수연은 제 가슴께를 콕 짚어 보이며 히죽 웃었다.

“새 식구들 중에 몰래 점찍어 둔 친구라도 있어?”

“말도 안 되는 질문엔, 노. 코. 멘. 트!”

박수연은 조현민이 보란 듯 장난스럽게 건들거리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내 발등, 내가 찧었지. 쟤를 키워도 너무나 많이 키워 놨어!”

조현민은 헛웃음을 삼켰다.

새 식구 중 가장 먼저 출근한 이는 윤민수였다.

큐브 인터내셔널에서 영업 관리를 하다가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 퇴사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윤 과장, 일찍 오셨네요.”

조현민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그리고는 악수를 청하며 윤민수의 첫 출근을 반겼다.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하죠. 이제 우린 다 같은 한 식구인데요. 참, 우리 대표님은 처음이시죠? 인사하세요. 한지태 대표님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윤민숩니다.”

“격렬하게 환영합니다.”

지태가 손을 내밀었다.

윤민수가 손을 맞잡자 지태가 감사를 표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을 담은 듯 참으로 따뜻한 인사였다.

“한스무역 같은 조그만 회사에 지원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고맙습니다. 앞으로 우리 윤 과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어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그리고 저는 솔직히 한스무역이라는 브랜드보다는 대표님의 명성을 듣고 지원한 겁니다.”

“예?”

“모르셨습니까? 대표님은 우리 업계에선 이미 유명인사십니다.”

“이거 기분이 묘합니다. 똘끼로 유명 인사가 된 걸 즐겨야 하나? 하하핫. 여하튼 환영합니다. 조 전무님, 윤 과장님 자리 좀 안내해 주세요.”

“예.”

박수연까지 셋만 있을 때와는 달리 지태와 조현민은 서로에게 경어를 썼다.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듯 두 사람의 말투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8시 20분.

새 식구들까지 모두 출근을 마친 뒤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첫날이니만큼 아침조회 시작 전 간단한 개인 소개가 있었다.

소개가 끝난 다음 곧 조회로 이어졌는데 회의 주관은 지태가 했다.

“…그리고 새로 입사하신 여섯 분 모두 이곳이 아주 작은 회사라 그런지는 몰라도 희망연봉을 좀 소심하게 적어 내신 경향이 있더군요.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저로서는 아주 바람직한 직원들을 맞이한 거 같아서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한 달 뒤 막상 월급계좌를 찍어볼 여러분들의 마음은 저와는 몹시 다를 겁니다.”

빙 둘러앉은 직원들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이 일었다.

“그래서 혼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대로 모른 척 양심에 털 난 사람이 될까, 아니면 양심을 속이지 말고 좀 더 솔직해져 볼까. 그러다가 결심했습니다. 제가 손해를 보는 쪽으로, 여러분들이 써낸 희망 연봉보다 좀 더 올려 드리자는 쪽으로!”

지태가 농인 듯 진심을 담아 선언하자 순간 와아! 하는 함성이 터졌다.

벌써부터 비위가 좋은 두어 명의 사원은 엄지 척까지 해보였다.

웃음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지태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쐐기를 박았다.

“대기업만큼은 아니더라도 중견업체에 버금가는 수준에서 연봉을 맞춰드리겠습니다. 대신 각자가 일당백 전사가 되어야 하는 건 감수를 해야 합니다. 월급보다 더 무거운 업무가 주어질 겁니다. 모두 각오되셨죠?”

“예에!”

모두는 한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지태가 말을 마치자 조현민이 그 뒤를 이어받았다.

“오늘부터 한 식구로 근무하게 될 여러분들의 직위와 직책을 먼저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윤민수 과장님, 아니 이제부터 직위는 부장입니다. 직책은 영업관리부장이시고. 다음은…….”

조현민은 이어 나머지 다섯 명의 직위와 직책도 순서대로 불러주었다.

지태가 책상 위에 손을 모으고 겸손하게 경청하는 바로 그때였다.

뷔이익, 뷔이익.

바로 옆에 진동으로 놓아둔 스마트폰이 격하게 몸을 떨어 댔다.

지태는 시선이 모아진 직원들에게 양해의 눈인사를 날리고는 곧 대표실로 들어갔다.

전화 발신자는 케냐의 에릭이었다.

“에릭!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거긴 지금 새벽 시간이 아닙니까?”

- 그러니까요. 이거 시간 맞추기가 참으로 어렵군요.

케냐와는 시차가 6시간이 난다.

서울이 현재 오전 9시 무렵이니 나이로비는 지금쯤 새벽 3시라는 이야기다.

“그럼 일부러 잠도 안 주무시고 이곳 출근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한 겁니까?”

- 하하.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또 달리 말하자면 그렇기도 합니다.

“무슨 소리에요?”

- 조금 전까지 상무부 차관님하고 술을 마셨거든요. 이건 내 사비로 대접한 거예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럼……?”

왠지 풍겨 오는 뉘앙스가 듣기에 좋았다.

지태가 기대를 듬뿍 담아 건너짚자 에릭이 넉넉하게 웃었다.

워낙 성격이 밝은 것도 있지만 술기운까지 섞인 그 웃음소리는 더욱 호탕하고 유쾌하게 들렸다.

- 예. 오늘 구매물품 목록을 넘겨받았습니다. 당장 거래를 진행시키랍니다.

“하하. 그거 듣던 중 엄청 반가운 말씀이시네. 고맙습니다, 에릭.”

- 별 말씀을! 여하튼 구매목록은 곧바로 이메일로 보낼게요. 거기에 차관님께 인사치레할 것을 감안해서 오퍼시트를 작성해 보세요.

그거야 당연한 소리였다.

지태는 고마움을 담아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 후 이제 그만 잠자리에 누우라는 말을 남기며 전화를 끊었다.

뿌듯하다.

아니, 가슴이 미어질 듯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비로소 한스무역이 오퍼상의 이름을 건 이후 제대로 한 건을 올리는 순간인 거다.

* * *

새 식구들이 출근을 시작한 지 딱 5일 만에 벌써 체계가 잡혀가는 것 같았다.

직원 조회가 끝나자 윤민수 부장은 영업팀 전부를 불러 자체적으로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다.

아직 조직이 분업화되지 않은 탓에 영업팀은 영업기획에서부터 전략, 마케팅은 물론 영업지원 분야까지 서로 협동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것을 선두에서 지휘하는 소임을 맡은 것이 바로 윤민수 부장이었는데, 지금까지는 지태나 조현민의 간섭 없이 스스로 알아서 체계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조현민이 문득 시선을 돌려 지태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그들의 모습을 표 나지 않게 훔쳐보다가 시선을 느끼고는 돌아보았다.

조현민이 만족스럽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지태가 동감이라는 듯 천천히 끄덕일 때였다.

“대표님! 여기요.”

박수연이 서류 몇 장을 들고 와서 지태 앞에 내려놓았다.

지태가 눈빛으로 이게 뭐냐는 식으로 묻자 박수연이 곧 대답을 주었다.

“케냐의 오더물품에 대한 단가표에요. 몇몇 업체들의 입찰 가격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가격을 써낸 업체의 것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대표님.”

“거기가 어딘데?”

“서울 전기요.”

“그래. 수고했어요, 수연 씨. 아니, 이젠 박 대리지!”

박 대리라는 호칭에 박수연이 머쓱해진 표정으로 웃었다.

지태도 화답하듯 그윽하게 웃어주었다.

새 식구들의 경력을 따져 대리에서 과장까지 전 직장에서보다 한 단계씩 직위를 높여 주었는데, 거기에 박수연 또한 더욱 열심히 하라는 격려 차원에서 끼워 넣었던 거다.

“그럼 검토해 보신 후에 말씀해주세요. 바로 오퍼시트를 작성해서 케냐로 보내겠습니다.”

“예, 수고!”

지태는 박수연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이제 예전처럼 반말은 없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경어를 붙이기로 세 사람은 굳이 합의를 보지 않고도 이미 자발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태는 박수연이 작성해온 구매물품의 단가표를 들여다보았다.

- LED STREET LIGHT 120W 1,000 * 390 = 390,000 USD

- LED FLAT LIGHT(정 사각) 30W 10,000 * 81 = 810,000 USD

- LED FLAT LIGHT(직 사각) 30W 10,000 * 81 = 810,000 USD

- LED DAWN LIGHT 25W 1,000 * 43 = 43,000 USD

- LED BULB LIGHT 20W 20,000 * 35 = 700,000 USD

- LED TUBE LIGHT 20W 30,000 * 23.70 = 711,000 USD

모든 항목을 꼼꼼히 살펴본 지태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도합 3,464,000달러였다.

여기에 에릭의 상관이었던 상무부 차관의 리베이트를 10% 덧붙인 3,810,400달러로 오퍼시트를 날리면 된다.

리베이트는 총 구매 가격의 10%라고 이미 합의에 못 박아둔 사항이니 차관 쪽에서 별다른 군소리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제품의 단가일 텐데, 지태에게 오더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차관의 선에서 따로 줄을 대어 한국 내 단가를 알아볼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염려할 것은 없었다.

이번 오더에 바가지를 씌우거나 특별히 단가를 높여 잡은 것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합리적이라거나, 아니면 최저가에 구매를 잘한 것이라고 몰래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를 일이다.

지태가 살펴보던 단가표를 내려놓을 때였다.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여서 고개를 들어 보니 한쪽에 모여 회의를 가지던 팀원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윤민수 부장이 지태 쪽으로 걸어왔다.

“대표님, 지금 바쁘십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그럼 저와 함께 휴게 공간에서 차 한잔하시죠.”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보다.

지태가 흔쾌히 끄덕였다.

“그러시죠.”

먼저 앞장서 가던 윤민수 부장은 커피포트가 놓인 곳으로 가서 커피 두 잔을 따라 왔다.

“대표실을 놔두고 왜 밖에 나와 계십니까?”

지태 앞에 커피 한 잔을 내려놓던 윤민수가 물었다.

“왜, 제가 나와 있으니 불편하십니까?”

“하하. 불편이라뇨.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그저 기왕에 만들어져 있는 대표실인데 왜 빈방으로 놀려 두나 싶어서 말이죠.”

“나중에 규모가 더 커져 자리가 꽉 찬다면 몰라도 지금은 우리 가족들 모두와 더불어 호흡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이것만은 당분간 양보 못하니 불편하더라도 참아 주세요.”

지태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윤민수 부장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한 회사의 대표입네 하고 겉멋만 들어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지태의 태도가 좋아 보였는지도 모른다.

“역시 제가 회사 하나는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이러면 적반하장이겠죠? 누가 누구를 선택했는데, 하고 말이죠.”

윤민수 부장은 엉겁결에 내뱉고는 자신의 발언을 얼른 다시 주워 담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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