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그놈들!(3)
시선을 느낀 임경남이 마주 보았다.
거기에 대고 이현욱이 으르렁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시발, 그렇다고 해도 나 역시 포기 안 해. 아니, 못해! 나도 힘을 보태서 너희들과 함께 한다면 또 몰라도.”
“……그렇게 해.”
“어?!”
이현욱은 순간 의외의 대꾸를 들었다는 듯 맹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임경남이 무색무취의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함께 하자고. 혼자보다는 여럿이 다함께 그놈의 목을 비트는 게 낫겠지. 더구나 이젠 국내에 들어왔잖아. 바다 건너에서 일을 치른다면 몰라도 한국에 다시 들어온 이상 외국에서처럼 결코 쉽진 않을 거니까.”
“어떻게 할 건데?”
“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
너무 막연한 임경남의 대답에 이현욱은 다시 또 맹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발.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지. 어떤 수단을 쓰던 간에 확실하게 묻어버리기만 하면 되지, 뭐.”
이현욱은 털털하게 웃고는 돌연 목을 길게 뻗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안방 쪽으로 보이는 곳에 대고 크게 외쳤다.
“야, 이년들아! 이제 다들 기어 나와. 또 한바탕 진하게 놀아봐야지.”
엔터테인먼트에서 보내온 여자애들을 부르는 모양이었다.
이현욱은 그리 외쳐 놓고는 모두를 죽 훑어갔다.
“기분도 꿀꿀한데 이제 본격적으로 판 좀 깔아 봐야지. 흐흐.”
이현욱의 은근하고도 느끼한 제안이 나온 뒤로 허영만과 송영완은 무심결에 옆부터 돌아보았다.
임경남의 기분 여하에 따라 자신들의 처신이 달라져야 하는 까닭이었다.
재계 순위에서 밀리는 자들의 서러움.
두 사람의 시선을 느낀 임경남이 픽 웃었다.
“그래. 이 더러운 기분 좀 털어내 보자. 누구 얼음 좀 있으면 꺼내놔 봐.”
그러자 송영완이 얼른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봉지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코카인이다.
임경남이 제일 먼저 테이블 위에 놓인 둘둘 말린 오만 원 권을 이용해 코카인 가루를 ‘흡!’하고 코로 들이마셨다.
* * *
한바탕 격렬했던 순간이 지나간 다음이었다.
방안엔 이제 어떤 끈끈하고도 야릇한 적막만이 짙게 감돌고 있었다.
간간이 내뿜던 가쁜 숨소리도 시나브로 잦아들고 있을 즈음 지태가 왼쪽 팔을 뻗어 지은의 머리맡에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팔베개를 하듯 감싸 안아 자신의 가슴께로 바짝 당긴 후에 가벼운 입맞춤을 해 주었다.
“얼굴 쳐다보기 없기!”
짧은 입맞춤 뒤로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지태의 시선을 피해 지은은 부끄럽다는 듯 속삭였다.
“새삼스럽긴!”
지태는 여전히 지은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 몸을 똑바로 뉘였다.
그러면서 그윽하게 물었다.
“지은아! 나 말이지, 저번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뭘?”
“너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갈 거냐고…….”
“이렇게 사는 거라니?”
“네가 돈 많은 집의 딸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마냥 인생을 허비할 거냐고 묻고 싶었어…….”
지태의 그 말에 지은은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이야기인지 아는 까닭이다.
지은이 얕게 웃었다.
“내가 마냥 먹고 노는 백수 같아 보여서… 그게 싫었어?”
“꼭 그렇다기보다는 왜 그 아까운 머리를 써먹지 않고 그냥 썩히느냐 이거지, 내 말은.”
지태는 지은이 한때 방황한 적은 있지만 그럼에도 학업은 제대로 마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에 있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명문 대학에서 MBA 과정까지 수료한 지은이었다.
그것도 건성으로 학업을 마친 게 아니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것까지도.
“큭큭!”
지태가 자신을 알기를 너무 띄엄띄엄 알고 있다고 여겼던 걸까.
지은이 킥킥 웃었다.
그렇다고 비웃음은 아니다.
“지태 씨! 나 있잖아. 사실은 요즘 과외 받고 있어.”
“응?”
그게 웬 뜬금없는 소리냐 싶어 지태가 고개를 돌려 지은을 쳐다보았다.
지은은 천장에 시선을 박은 채 천천히 말했다.
“진짜야. 나 요즘 과외 받고 있다는 말.”
너무도 진지하다.
결코 장난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말투.
그러자 지태는 퍼뜩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거 혹시 재벌가에서 말하는 소위 경영수업이라는 거야?”
“그렇다고 봐야지, 뭐. 암튼 울 오빤 아직 몰라, 내가 과외 받고 있다는 거! 그룹에 이름만 걸어 놓은 이사가 뭐 하러 본사에는 자주 들락거릴까, 아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을 거야.”
“회장님께서 직접 가르치는 거야?”
“아니지. 우리 아빠가 어디 한가하게 나를 가르칠 시간이나 있겠어? 그룹 경영지원실 실장님.”
“그룹 경영지원 실장이라면 사장급인가?”
“부회장급!”
“하핫, 그거 참! 암튼 배우긴 제대로 배우는 것 같네. 거기 경영지원실이라는 데가 요즘 흔히 말하는 그룹 기획조정실 아냐?”
“그렇지, 뭐. 그룹의 전반적인 사항을 전부 다 기획하고 컨트롤하는 곳.”
“미안하네.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를 해서.”
지태가 멋쩍은 마음에 픽 하고 웃었다.
아버지 후광에다가 물려받은 지분만으로 펑펑 돈지랄을 하고 다니는 속없는 여자로만 보았던 자신이 금세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다들 그렇게 보는데, 뭐. 심지어 우리 잘나신 오빠마저도. 울 아빠, 무서운 사람이야.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해서 오빠를 100% 신뢰하진 않아. 그 대안을 어쩌면 지금 나한테서 찾으려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무섭네, 재벌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봤던 것보다도 더 삭막한 것 같고. 아, 물론…….”
“넌 아니야, 넌 빼고! 라는 말을 하려는 거지?”
지은이 지태에 앞서 말을 내뱉곤 피식 웃었다.
“그래. 넌 많이 다르긴 해. 재벌가의 별종인가 보지?”
“아니, 지태 씨가 만약 방황할 때의 내 모습을 보았더라면 지금처럼 그런 생각 안 했을걸!”
“그 이현욱인가 뭔가 하는 쓰레기 같은 부류랑 어울리고 다닐 때 말이지?”
“지금 질투하는 거얌?”
지은이 고개를 돌려 지태를 쳐다보며 웃었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지태가 헛기침을 했다.
“질투는 무슨…….”
지태가 투덜거리듯 내뱉고는 팔을 빼내려 하자 지은이 악착같이 팔을 붙들었다.
“난 지태 씨가 가슴 넓은 사내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똑같네, 밴댕이랑.”
“크크.”
그 소리를 들으니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다.
지태가 입술 사이에서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오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문득.
“나 오늘 자고 갈까?”
“그럼 이 시간에 그냥 돌아가려고 했어?”
“아니, 그냥. 지은이가 불편할까 싶어서.”
“싫어, 가지 마! 오늘은 자기랑 밤새 함께 있을 거야. 이렇게 오붓하게!”
지은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그러자. 오늘은 이렇게 꼭 껴안고 푹 잠들어 보자. 그전에 목마른 거 한 번 더 해결하고!”
지태는 팔베개를 하고 있던 왼팔을 감아 지은을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어휴, 짐승!”
좋으면서도 괜히 한번 튕겨 보는 지은의 앙탈마저 지태의 귀에는 섹시하게만 들렸다.
* * *
“전무님! 여기요.”
박수연이 이제 막 프린트해온 문서 몇 장을 조현민에게 내밀었다.
“어디보자. 어! 총 15명이네?”
“네. 후보군 60명에서 제 나름대로 추려본 사람들이예요.”
“어떤 기준으로 추렸는데?”
“보는 순간 여기에 확 꽂혀 오는 필이라고나 할까?”
박수연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콕콕 찍어 댔다.
“까분다!”
깨갱.
박수연은 금세 정색한 모습으로 조현민을 바라보았다.
“첫째론 최하 3년 이상의 경력자고요. 두 번째론 자소서에 내보인 포부,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 등을 우선으로 삼았고요. 마지막엔 이전 직장에서의 실패담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반면교사 삼겠다는 사람들 위주로 추려 봤습니다. 이상입니다!”
하급 병사가 상관에게 보고하듯 씩씩하게 입장을 밝히는 박수연을 보면서 조현민은 꽤나 만족했는지 고개를 퍼뜩 끄덕였다.
“좋아! 하루에 다섯 명씩 면접 날짜를 잡아서 통보해 줘.”
“옙!”
군기가 바싹 든 척.
박수연은 똑바로 선 그 자세에서 ‘뒤로 돌아!’를 해보이더니 씩씩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멍하니 바라보던 조현민이 끝내 헛웃음을 켰다.
‘자아식, 제법이네!’
조현민은 1차 서류 전형을 통과한 사람들의 문서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피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문서를 들고 지태 쪽으로 걸어갔다.
“이것 좀 살펴 봐.”
“뭔데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뭔가에 열중하고 있던 지태가 고개를 들어 조현민을 흘깃 본 후 다시 프린트된 문서로 눈길을 돌렸다.
“1차 서류 통과자들이야.”
“형님 생각엔요?”
“수연이가 나름 잘 뽑아 놓은 거 같아. 3배수라서 이중에 5명만 뽑아야 한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한스무역의 새로운 식구들을 뽑는 건 형님이 알아서 하세요. 전권위임입니다.”
지태가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다시 노트북으로 가져가자 조현민이 고개를 숙이고 화면을 훔쳐보았다.
“뭘 그리 집중하고 있어? 야동이라도 보고 있냐?”
“……!”
“어! 이 양반은…?”
엉겁결에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조현민이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면에 띄워진 눈에 익은 어떤 사람의 인터뷰 기사 때문이었다.
지태가 피식 웃었다.
“알만한 분이죠?”
“이 양반을 어디 좀 알다 뿐이냐. 이런 거물을 내가 왜 몰라 봐. 우리 같은 샐러리맨들의 우상이신데.”
그랬다.
화면 속 주인공은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이름만 대어도 단번에 알만한 대기업의 부회장까지 올랐다가 얼마 전 은퇴한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성공신화는 수차례 매스컴을 통해 소개되었고, 지금은 모든 샐러리맨들의 롤모델이자 업계의 전설이 된 사람이다.
“부러워서 찾아본 거냐?”
조현민이 지태의 어깨를 툭 쳤다.
“모셔 오려고요.”
“아하, 그래……. 어!”
무심코 반응했다가 깜짝 놀란 조현민이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냐?”
“이곳으로 모셔 오겠다고요.”
“헐!”
조현민은 입을 떡 벌렸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하는 눈빛이었다.
“뭔 소리야. 한스무역으로 저분을 모셔오겠다고?”
가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고 있으니 하는 소리였다.
“당장은 아니고요. 내 말은 그러니까… 음,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이죠. 한마디로 희망사항, 헤헤헷.”
지태가 끝내 바보처럼 웃었다.
“난, 또! 에라, 이 싱거운 놈아.”
조현민은 털털하게 웃음을 흘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태가 그 뒤에 대고는 피식 웃었다.
방금 내뱉은 말과는 달리 현재 지태가 가슴에 품고 있는 뜻은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웃음 속에 도사린, 묘하게 반짝이는 눈빛이 바로 그러했다.
다만 조현민이 지태의 심중에 숨은 꿍꿍이를 제대로 읽지 못했을 뿐.
* * *
새 식구로 들일 지원자들의 면접이 시작됐다.
조현민은 지원자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 면접시간을 넉넉하게 잡아 차담회 방식의 일대일 토론으로 진행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조현민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지태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한 듯 박수연은 아까부터 자꾸만 지태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수연 씨, 왜?”
“아, 아녜요.”
박수연이 사시처럼 눈동자만 돌려 훔쳐보다가 딱 걸렸다.
당황해하는 박수연을 보면서 지태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보다는 조 전무님이 사람 보는 눈썰미가 훨씬 더 좋아. 그래서 그런 거야.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
“그래도…….”
“수연 씨도 나중에 두고 보면 알 거야.”
박수연이 아직 조현민의 진면목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지태는 생각했다.
나중에 새 식구를 선발한 결과를 보면 박수연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 것이다.
뷔이익, 뷔이익.
책상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가늘게 떨어댔다.
눈에 익은 전화번호.
지태의 입술이 반가운 마음에 활짝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