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간보러 온 거니?(2)
아!
그러고 보니 요즘은 최봉준의 출현이 좀 뜸한 것 같다.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이후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머릿속을 자극하지 않았다.
‘이젠 내게서 떠나신 건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조현민이 어깨를 툭 쳤다.
지태가 왜 그러느냐는 듯 바라보자 고갯짓으로 소파 테이블을 가리켰다.
진동으로 놓아둔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떨고 있다.
지태가 팔을 뻗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 화면에 찍힌 발신자는 강성원이었다.
귀국 후 통화만 두어 차례 했을 뿐 아직 그를 만나보지는 못했다.
그는 경제사범을 추적하러 며칠째 지방에 내려가 있다고 했다.
“어, 성원아!”
- 바쁘냐?
“아니, 별로. 너 아직도 부산이야?”
- 올라왔어. 결국 쥐새끼를 붙잡았거든.
“어이구, 우리 깡성원이 제법 능력 있네. 사롸이써!”
- 지랄은 1절만 하세요.
강성원이 시크하게 대꾸를 내놓을 때 지태가 물었다.
“그럼 오늘은 퇴근할 수 있는 거냐?”
- 그래서 전화했지. 두 달 넘게 못 봤는데 네놈 몽타주 좀 나한테 들이밀어 보셔.
“그러자. 너 퇴근하는 대로 전화해.”
지태는 전화를 끊고 조현민을 돌아보았다.
“형님, 오늘 성원이 만날 건데…?”
그러니 한잔할 생각이 있으면 말하는 거다.
조현민이 아쉽다는 투로 쓴맛을 다셨다.
“몰랐냐? 오늘 불금이다. 우리 치킨집도 모처럼 바쁜 날이야.”
가게 일 도와주러 간다는 소리.
지태는 모처럼의 술자리인데 너무 아쉽다는 식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곤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던 일이나 마저 끝내고 퇴근 준비를 하려는 거다.
* * *
지태는 약속 장소를 호텔 일식당으로 잡았다.
강성원에게 오늘 만큼은 제대로 된 술과 식사를 대접해주고 싶었다.
“웬 럭셔리?”
마치 이런 곳은 처음이라는 듯 강성원은 괜히 두리번거렸다.
“빨리 앉아, 인마! 촌스럽게 왜 이래.”
지태의 핀잔에 강성원은 씩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공무원이 꼭 뇌물 받아 처먹는 거 같잖아.”
“말을 해도 꼭! 친구 간에 밥 한 끼 먹자는데 무슨 뇌물 타령? 인마, 이런 건 김영란 법에도 저촉이 안 돼.”
“그런가?”
강성원은 멋쩍게 히죽 웃었다.
“그나저나 너 얼굴 많이 상했다. 고생이 심했냐?”
“고생이 안 심했다면 거짓말이고, 아주 겁나게 많이!”
지태가 제 말끝에 넉넉하게 웃었다.
“그래도 엄청 벌었잖아. 그런 거라면 나도 당장 사표 쓰고 너 따라다니면서 목숨 걸겠다.”
“아서라! 유능한 네가 광수대를 떠나면 소는 누가 키우겠냐.”
“지랄!”
“암튼 이건 어쩌다 걸린 행운이야. 나 같은 놈한테 이런 행운이 뒤따라올 줄 어떻게 알았겠어. 지금 다시 생각해도 진짜로 꿈만 같다.”
“네놈 복이야. 그것 또한 네놈의 능력인 거고! 여하튼 늦복 터져 다행이다.”
강성원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지태는 조금은 간사하게 생긴 사케 병을 들어 강성원의 빈 잔에 따라 주었다.
강성원은 받은 잔을 내려놓고 반대로 지태에게 술을 따랐다.
그러다가 문득 정색했다.
왜 갑자기 무게를 잡나 싶은 마음에 지태가 흘깃 쳐다보았다.
가끔씩 어울리지 않게 강성원이 이리 나올 때는 꼭 뭔가 심상찮은 발언을 내놓곤 하기도 해서.
“뭔데?”
지태가 먼저 건너짚었다.
“지난번 필리핀에서 그 누구더라……?”
“후안?”
“어, 후안! 그 친구가 한국에서 더욱더 몸조심해야 할 거라고 그랬다면서?”
“그랬지.”
“그리고 또 케냐에서 그 사기꾼 놈이 너한테 귀띔해준 말도 있고.”
“……!”
“그래서 내가 나름대로 시간이 날 때마다 한번 파봤거든! 골드웰하고 선우 위주로 말이야.”
“……!”
지태는 계속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강성원은 사케 잔을 한입에 털어놓고서 지태를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첨엔 뭘 어떻게, 어디서부터 파고 들어가야 할지 답이 안 나오더라. 뭐 하나라도 제대로 된 단서가 있어야 쑤셔도 쑤셔볼 거 아니냐.”
“그야 당연하지.”
지태가 모처럼 추임새를 넣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강성원이 말을 이었다.
“……딱히 답도 없고 막연하다보니 그냥 회사 근처만 맴돌다 돌아온 것이 몇 번 돼. 그러다가 얼마 전 퇴근 무렵이었어. 골드웰에서 나오는 임원 하나가 왠지 좀 눈에 확 띄더라.”
“……!”
“젊은 놈이었는데 나잇살이나 잡수신 양반들이 그냥 다 끔뻑 죽는 시늉을 하는 거야. 그래서 경비를 서고 있던 아저씨한테 슬쩍 한번 물어봤어. 그랬더니 골드웰의 기획실장이라고 하더라, 부사장급이래.”
“부사장? 몇 살이나 돼 보였는데?”
“서른 중반 정도?”
“그럼 둘 중 하나겠네. 특별나게 대가리가 뛰어나거나 아니면 골드웰 경영자의 잘난 아드님.”
“빙고!”
“그니까 뭐? 그게 다야?”
결론은 내놓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꼬리만 자꾸 길어지는 것 같아 지태가 말을 잘랐다.
“급하긴! 인마, 이것도 내 나름대로는 귀한 시간을 투자해서 알아낸 거야. 우리 아름이하고 데이트할 시간까지 쪼개가며 어렵게 알아낸 거라고!”
“알았어. 미안하다, 미안해. 너 고생한 거 내가 다 아니까 계속해봐.”
“그 기획실장이란 놈의 친구가 누군 줄 아냐?”
“친구… 누군데?”
“바로 네놈이 면전에 대고 욕 한바가지 퍼붓고 사표를 내던졌다던 바로 그 새끼야. 선우글로벌 상무라는 놈!”
“헐!”
지태는 급기야 혀를 차고 말았다.
“그럼 허영만 그 새끼가 고작 그일 때문에 나를 죽이려한다?”
“그것까진 나야 모르지. 내가 알아낸 건 골드웰 기획실장하고 선우글로벌의 상무라는 놈이 친구 사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 전부니까.”
허영만이 주범이다?
속으로 되뇌던 지태는 곧 머리를 내저었다.
아무리 악랄하고 악귀가 씐 인간 망종이라도 그렇지 겨우 그까짓 일로 사람을 죽이려 든다는 건 상식에도 어긋나는 일이니까.
“고생했다. 근데 겨우 그 정도 추리만으로 허영만을 의심하기엔 지금으로썬 무리가 좀 있어.”
“하긴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그렇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엔 뭔가 많이 수상쩍지 않냐? 왠지 꼬리꼬리한 냄새가 풍기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용의선상에 두고 지켜보지, 뭐. 어차피 날 겨냥하고 있다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그만두지는 않을 거 아니냐. 내가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입질이 있을 거다.”
“여하튼 조심해. 내가 준 방탄복도 꼭 입고 다니고.”
“여긴 한국이야, 인마. 설마 총까지 쏘려고.”
“방탄복이나 방검복이나! 여하튼 칼도 막아 주는 거니까 이 형아 말에 일일이 토 달지 말고, 새꺄!”
“알았어, 알았으니까. 자, 건배.”
지태는 강성원의 빈 잔을 서둘러 채워 주고는 건배를 제의했다.
강성원이 밉지 않게 흘기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여하튼 안 죽고 무사히 살아와줘서 반갑다.”
쨍!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는 한입에 털어 넣었다.
“지태야! 아니지, 한 재벌님! 이 자리 끝나고 따로 2차도 있는 거냐?”
“당연히 있지!”
“분위기 좋은 데로 가는 거지?”
“어? 어! 아마 그럴걸! 암튼 기대해 봐.”
지태의 어정쩡한 답변에 강성원은 의심쩍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몹시 기대감이 어린 눈빛이었다.
* * *
본부장급 이상 임원들과 최근의 현안에 대해 저녁회의를 마친 임경남은 회사를 나섰다.
아직 일과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퇴근하고 싶지만 조금 전 회의에서도 아직 결말이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임원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최종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이번 회의안건은 부경물산 자체에서 추진하는 해외 신규 투자 건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이자 부경그룹의 후계자인 자신의 경영 능력을 아직도 미심쩍어 하는 아버지에게 뭔가 확실한 믿음의 도장을 찍어 두기 위해서는 지금쯤 가시적인 어떤 성과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무리를 해서라도 승부수를 띄우려는 것인데, 내부에서 해외투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부정적인 의견이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는 형국이었다.
생각 같아선 반대하는 임원들을 모두 단칼에 쳐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만 굴뚝같을 뿐 실제로는 제 맘대로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 임원들 대개가 아버지인 임상만 회장의 측근들이기 때문이었다.
말이 좋아 자신을 보좌하는 거지 실상은 감시역이나 마찬가지인 인물들이다.
미우나 고우나 대권을 거머쥐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동거를 계속 이어가야만 하는 처지.
전용 운전기사가 차문의 손잡이를 잡고 서있는 승용차 뒷좌석으로 임경남이 거드름을 피우며 올라탔다.
“출발하겠습니다, 사장님.”
수틀리면 욕설부터 날아오는 임경남의 성질머리를 잘 아는 까닭에 마치 군대 운전병처럼 운전기사는 출발하겠다는 보고를 해왔다.
곧 승용차가 미끄러지는 것처럼 부드럽게 출발하자 임경남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내 몸 흔들리지 않게!”
“예, 사장님. 근데 전방에 곧바로 과속방지턱입니다.”
“그니까 살살 넘으라고, 이 새끼야!”
임경남이 눈을 번쩍 뜨며 고함쳤다.
감히 어떤 대꾸조차도 내뱉지 못한 기사가 잔뜩 움츠러들며 과속방지턱을 넘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누구야, 또…….”
괜히 신경질을 내면서 임경남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액정에 찍힌 발신자의 이름은 송영완이었다.
“어, 오랜만이야!”
임경남이 잔뜩 높아졌던 목소리 톤을 죽이며 모처럼 밝은 목소리를 냈다.
- 오랜만이나마나 왜 아직 아무 소식도 없는 거야?
“아무 소식도 없다니, 뭐가?”
- 뭐냐, 이거?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님 알면서도 시치미 떼는 거야? 아, 저번에 우리 골드웰이 필리핀에서 손해 본 금액만큼 보전처리해 주겠다고 한 지가 언제야. 왜 여태 아무 소리가 없는 거냐고! 내가 오늘도 아버지한테 불려가서 호되게 깨지고 나왔어.
순간 임경남의 인상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그거 곧 해결해 줄게. 몇 푼 되지도 않는 거 가지고 너 자꾸 이럴 거냐? 그러잖아도 요즘 투자 건 때문에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구먼.”
영상통화가 아니니 스마트폰 너머에서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보일 리는 없겠지만 임경남은 짐짓 피곤하다는 듯 얼굴을 쓸었다.
- 왜, 뭐가 잘 안 풀려?
“풀릴 턱이 있냐. 우리 꼰대가 심어 놓은 늙다리들 잔소리와 간섭 때문에! 아, 시끄럽고 나중에 통화하자. 나 지금 꼰대들 밥 먹이면서 설득 작업 계속해야 돼.”
임경남이 금방이라도 전화를 끊을 듯하자 송영완이 급하게 불렀다.
“왜?”
- 필리핀 문제도 문제지만, 요즘 웬 수상한 놈이 우리들의 뒤를 캐고 다니는 거 같아.
“뒤를… 우리들의 무슨 뒤를?”
임경남이 고개를 갸웃했다.
- 아무래도 필리핀에서의 작업 건 때문인 거 같아. 나뿐만이 아냐. 허영만이도 그런 소리를 하더라. 어떤 형사 새끼 하나가 요즘 들어서 갑자기 회사 근처에서 알짱거린다고 말이야.
“이런, 씨! 그럼 한지태 그 새끼가 혹시 뭔가 소스를 경찰한테 던졌다는 건가?”
-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암튼 오늘 몇 시쯤 끝날 거 같냐? 좀 이따가 영만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올래?
“끝나는 거 봐서 연락할게. 어디서 보기로 했는데?”
- 그냥 오늘은 아지트에서 보기로 했다! 우리들 기쁨조는 다 맞춰 놨는데, 너도 미리 하나 불러 놓을까?
“생각 없다. 요즘은 그거 잘 서지도 않아. 저번에 그 시발 새끼한테 개지랄을 당한 이후로는!”
임경남은 절로 이를 갈았다.
유미라의 오피스텔에서 무릎을 꿇고 오줌을 지린 이후로는 발기조차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생전 처음 당한 치욕도 치욕이지만 남자구실도 못하고 있는 것 때문에 요즘엔 사는 맛이 도무지 나질 않았다.
“이 개새끼!”
- 뭐?
아직 전화가 끊기질 않았다.
자기한테 욕을 해댄 줄 알고 송영완이 되물어 왔다.
“너 말고 한지태 그 새끼!”
- 암튼 알았다. 돌아가는 사정 봐가면서 나중에 연락 줘.
전화가 끊겼고, 임경남은 다시 한번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리고는 괜히 운전기사를 향해 화풀이를 해댔다.
“차, 살살 안 몰래? 네놈 마누라 가슴 만지듯 살살, 살살, 이 새꺄!”
급기야 임경남은 발을 쳐들어 운전석 헤드레스트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